1. 가여운 것들(앨러스데어 그레이, 이운경 역. 황금가지. 2023. 476쪽)
: 19세기, 의사 아치볼드 맥캔들리스는 의대생 시절 유일하게 사귄 친구 고드윈 벡스터와 종종 함께 산책을 한다. 고드윈이 언젠가부터 자신을 피하는 듯 하여 아치볼드는 기습적으로 고드윈의 집을 방문하고 낯설지만 눈길을 끄는 여인과 마주친다.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치볼드의 모든 것을 신기하게 여기고 이후 고드윈에게서 임신한 채 자살하려 강에 뛰어든 시신에게 태아의 뇌를 이식하여 살려냈다는 고백을 듣는다. 이후 고드윈은 벨라의 교육과 사람들의 호기심을 피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1년의 세계여행을 다녀오고, 1년 후 재회한 아치볼드를 본 벨라는 그와 결혼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곧 방탕한 변호사 웨더번과 눈이 맞아 도망을 친다.
<<프랑켄슈타인>>의 말랑 버전이랄까.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리지만 고드윈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볼 뿐 아니라 끝까지 책임진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피조물처럼 외형이 흉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쩄든 벨라는 상당히 사랑스러운 트러블메이커다. 당대에는 드물게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스스로를 구할 줄 아는. 이런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물론 고드윈의 헌신적인 애정과 아치볼드의 든든한 지지가 있어서 가능하기도 했지만. 사실 마지막 부분의 아치볼드는 좀 한심하긴 했다. 벨라는 마지막까지 맘에 들었고. <<프랑켄슈타인>>은 읽는 내내 안타까웠는데, 이 책은 읽는 내내 유쾌했다.
2. 첫번째 희생자 상. 하(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황금가지. 2004. 309쪽, 265쪽)
: 우먼스 머더 클럽 1권. 샌프란시스코 경찰 린지는 갓 결혼한 부부가 호텔방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을 맡게 된다. 면식범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곧 다른 신혼 부부가 신혼 여행지에서 살해됨으로써 연쇄 살인 사건이 된다. 린지는 첫번째 사건에서 대담하게 범죄 현장으로 잠입한 기자 신디, 예전부터 합이 잘 맞았던 부검의 클레어, 늘 완벽하게 자신의 일을 해내던 검사 질에게서 도움을 받으며 이 사건을 수사한다.
일단, 클레어나 질은 비슷한 직종에 종사하기에 친해진 것도 함께 수사를 해나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기자인 신디는, 신선했다. 역시 초반에는 살짝 비호감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나같으면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친하게 지내기 힘들 거 같은데, 쿨하다. 다만 제목이 의미하는 게 살인 사건 자체의 희생자가 아닌 린지의 개인사와 관련있다는 게 유감이다. 솔직히 그가 희생됐을 때 너무 짜증이 나서 책을 확 덮어버렸다. 작가야, 살려냈어야지!
3. 두번쨰 기회(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황금가지. 2006. 404쪽)
: 교회 성가대를 향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다. 대상은 할렘의 흑인 교회. 인종 증오 범죄처럼 보이는 이 사건을 조사하던 린지는 언뜻 보기엔 자살 같은 이전의 다른 사건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인종 증오 범죄가 아닌 경찰을 타겟으로 한 연쇄 살인이라는 걸 밝혀낸다.
작품 제목은 린지의 아버지와 관련이 있다. 어릴 때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곧 이 사건과의 관련성이 드러난다. 아버지 이야기를 읽으며, 린지의 복잡한 마음이 안타까웠다. 어릴 때 버림받은 원망과 작지만 좋았던 추억들, 그리고 혈육이기에 배어나오는 애정. 물론 냉소적인 난 린지가 약해질 때마다 등짝을 후려치며 정신 차리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우먼스 머더 클럽 멤버들의 이야기가 조금 전개되는데, 좀더 나와도 좋을 듯 하다.
4.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지현상. 오러. 2023. 272쪽)
: 호러 소설집. 해피엔딩 따윈 없다. 본격적으로 기괴한, 공포에 충실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귀신보다 무서운 건 현실. 그 공포 속으로 발을 디딜 수 밖에 없는 건 현실에 등떠밀려서이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외면하고만 싶은 이유는 현실도 그만큼 두렵기 때문. 다 무서웠지만 가장 끔찍했던 건 <문 뒤에 지옥이 있다>.
5. 움직임(조경란. 작가정신. 2024. 124쪽)
: 오랜만에 이 작가의 작품을 읽었는데, 작가의 초창기 작품을 개정해서 재출간한 것이다. 스무 살 이경.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무작정 외가로 왔다. 할아버지와 이모, 삼촌과 함께 다락이 있는 단칸방에서 살며 모래를 섞어 블록 벽돌을 만드는 할아버지와 삼촌을 위해 도시락을 싸고 집안일을 한다. 농협에서 하루종일 돈을 세는 이모는 밤마다 외국어 공부를 하며 탈출을 꿈꾼다. 이경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담배꽁초가 버려진 마당 귀퉁이의 화단을 돌보고, 앞방 남자의 방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중 이 건물의 3층 안마시술소에서 일하는 삼촌의 여자가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30여년 전보다 더 오래전 이야기처럼 읽혀 읽으면서도 낯설었다. 30여년 전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은데. 그러다 문득 부끄러워졌다. 내가 너무 나이브했구나. 이런 가족도 분명 있었을텐데. 이 가족에게서 희망을 보는 것 또한 순진함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희망은 이모 한 사람에게나 있겠지. 물론 이모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잘 덮일 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견딜 뿐이다. 희망 따위.
6. 엿보는 마을(리사 주얼, 안은주 역. 한즈미디어. 2022. 440쪽)
: 오랫동안 해외를 돌아다니며 히피처럼 살던 조이. 결혼도 휴양지 호텔에서 일하다 만난 남자와 충동적으로 해버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릴 때 살던 꿈꾸던 집을 산 오빠네 2층에서 살게 된 조이는 이웃집에 매력적인 외모와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아내와 10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걸 알게 된다. 공립학교 교장인 그를 계속 관찰하는 조이. 그런데 어떻게 2개월 후 그 집의 부엌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그 집 쓰레기통에서는 조이가 신었던 부츠의 장식이 발견되었을까?
(약스포)
조이가 살인자가 아닐 거라는 건 처음부터 (희미하게나마) 드러난다. 조이는 생각은 없을지언정 누굴 죽일 거 같지는 않은 캐릭터라서. 처음엔 당연히 피해자가 그 사람이고 범인은 또다른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나갈수록 다채로운 인간들이 등장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들 중 멀쩡한 인간보다 비호감에 성격 삐뚤어진 인간들이 훨씬 많아서 계속 찌뿌린 채 읽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제나의 엄마는 가엾지만 앞으로 정보기관의 요원이 될 거라면서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스토킹하는 톰 피츠윌리엄의 아들 프레디, 톰을 무조건 칭송하는 제나의 친구, 남편에게만 올인하는 톰의 아내 등. 톰도 비호감이긴 마찬가지다. 톰이 죽었어야 했는데! 가장 멀쩡해 보이는 캐릭터가 범인이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건, 정상인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 사회의 모습 아닐까.
7. 여분의 사랑(박유경. 다산책방. 2023. 268쪽)
: 처음 읽는 작가의 단편집. 화자들 중 누구에게도 공감이 되질 않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희망적으로 끝나지만 그 희망이 너무 희미해서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작가는 예민한 시선으로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은근한 멸시를 잡아내는데, 답답한 곳을 긁어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저 혼자만의 소심한 복수를 하거나 자기만의 작은 위로를 하는 데서 그쳐서 속상했다. 물론 이게 현실이지만, 소설 속에서까지 그런 갑갑함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그래도 이 작가를 계속 읽을 생각이다.
8. 폴과 비르지니(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김현준 역. 휴머니스트. 2022. 212쪽)
: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됐던 때에 목가적인 환상을 불러일으켜서 인기를 끌었다는 서문을 읽고 기대를 갖고 읽었는데, 전반적인 이야기의 방향성은 다르지 않았으나 결말이... 18세기 프랑스 섬(현 모리셔스). 작품 속 화자는 프랑스 섬의 포르루이의 숲 한가운데에 나란히 붙어 있는 빈 오두막 두 채에 관심이 간다. 마침 지나가던 노인에게서 이곳에 살던 두 가족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화자. 오래전 젊은이 라 투르는 아내와 함께 이 섬에 도착한다. 집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귀족 출신 아내 또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썼기에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희망에 차 있던 라 투르는 그러나 열병에 걸려 죽고, 임신한 라 투르 부인은 간신히 숲 속의 허름한 오두막을 발견해서 그곳에 살기로 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옆집에는 귀족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마르그리트라는 여성이 갓 태어난 아들 폴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라 투르 부인은 곧 딸을 낳아 비르지니라고 이름붙이고 두 명의 노예와 이웃의 도움을 받아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살아간다. 같은 요람에서 함께 자란 폴과 비르지니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데, 어느날 라 투르 부인의 존재를 문득 기억해 낸 부인의 이모가 비르지니를 파리로 부른다.
(스포)
앞에서 말했듯 결말이 너무 어이없다. 이게 무슨...이게 맞아? 이렇게 다 죽어버리는 게? 특히 비르지니. 그러니까, 비르지니는 드레스를 차마 벗을 수 없어서 죽은 거지? 그렇게 무력하게 배 위에서 죽지 말고 차라리 드레스 입은 채로 바다에 뛰어들어서 죽었더라면 나았을까? 아니, 애시당초 파리에서 나고 자라서 파리 사교계에서 활약을 했던 귀족 아가씨도 아닌 비르지니가 드레스 벗기를 부끄러워했다는 거 자체가 남성 작가의 환상을 투여한 거라고 생각되지만, 이 작품이 씌여진 시대를 생각하면 접고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조금은 멍청하게까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라 투르 부인의 이모님을 빌런 취급하는 건 부당하지. 드레스 못 벗어서 죽은 애도 있는데. 노부인이 당시의 사회 관습을 비판없이 따랐고 종손녀가 살아온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악인이라 하는 건 너무하다. 난 차라리 이모 쪽이 더 이해된다. 아무튼, 18세기 낭만주의 소설은 나와 맞지 않는 걸로. 그냥 비르지니가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가 딱 좋았다. 그래도 소설 자체가 재미없거나 잘 못 쓴 글이라는 건 아니다. 결말이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거지.
9. 좀비즈 어웨이(배예람. 안전가옥. 2022. 178쪽)
: 좀비 창궐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단편. 첫번째 작품인 <피구왕 재인>이 정말 좋았다. 우정과 사랑 사이의 그 간질간질한 감정이,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그 강인함이. 표제작도 좋았다. 그런 식의 로드 무비 스타일은 꽤 신박했다. 나라면 못했을텐데. 마지막 작품 <참살이404>에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밝혀지는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직장인 중 한 명으로서 공감이 되면서도 자기혐오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 세 작품 속 인물들 모두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남을 밟아야 자신의 몸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래야만 하는 현실과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하는데 이 작품들의 배경은 판타지지만 현실과 가장 맞닿아있는 지점이 바로 이거. 그렇다고 주인공들이 다 먼치킨인 것도 아니고 자신보다 힘이 센 인물들에게 어쩔 수 없이 휘둘리고 착취당한다는 점도 현실적이었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게 되어서 기쁘다.
10. 셰리(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장소미 역. 녹색광선. 2024. 208쪽)
: 쉰 살이 다 된 레아. 친구의 아들인 스물 다섯 셰리는 오늘도 레아의 침대에서 잠을 깼다. 셰리와 레아는 6년 전부터 연인이 되었고, 레아와 셰리의 모친은 셰리를 열 일곱 소녀와 곧 결혼시킬 참이다.
번역이 너무 직역이라 읽기 힘들었다. 게다가 잊을 만 하면 한번씩 등장하는 문법오류/비문이 꽤 거슬렸다. 사실 그래서 내가 이 출판사를 기피하는데... 레아의 마음은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셰리의 철없음은 참아주기가 꽤 힘들어서 레아에게 공감하려는 내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레아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으면서 그녀의 행동을 통해 그녀의 마음이 드러나는 서술은 훌륭했다. 아마 당대에는 저자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더불어서 내용이 파격적이면서도 흥미진진했겠지. 비록 현대의 독자인 내게 이 내용은 그닥 파격적이지 않지만, 어찌됐든 이 작가의 책은 계속 읽어볼 생각이다. 제발 다음 책은 번역/교정교열 좀 제대로 해주길...
11. 하늘과 땅 식료품점(제임스 맥브라이드, 박지민 역. 미래지향. 2024. 488쪽)
: 1972년 펜실베니아 포츠타운의 오래된 우물에서 해골이 발견된다. 경찰은 목에 메주자를 걸고 있는 그 해골에 관해 알고 있을 듯한 유대인 노인을 심문하지만 그는 아는 바가 없다고 얘기하고, 곧바로 들이닥친 허리케인에 모든 증거는 사라진다. 노인 또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데... 사실 이 모든 사건은 47년 전, 이 마을 치킨힐이 유대인 정착촌이면서 흑인들의 마을일 때부터 시작됐다. 2차대전 때 홀로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 모셰는 마을의 가장 큰 극장을 소유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고, '하늘과 땅' 식료품점의 딸 초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한다. 모셰의 수입이 넉넉해 그들은 얼마든지 시내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초나는 식료품점을 떠나기를 거부했고, 그렇게 그들은 식료품점 2층에서 살며 초나도 식료품점 운영은 놓지 않는다. 어느날 난로 폭발 사고로 엄마를 잃고 청력도 잃은 소년 도도의 이모 애디 - 식료품점 점원이자 흑인 - 가 조카를 주정부에서 정신병원에 수용하기 위해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숨겨달라고 부탁하고, 초나는 오래 전 우정을 나눴지만 지금은 말조차 섞지 않고 있는 옆집사는 흑인 친구 버니스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숨겨준다.
(약스포)
등장인물이 꽤 많다. 이름을 외우는 게 힘든 나로서는 초반에 헷갈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초나. 다리를 절지만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토라를 읽고, KKK단 행진을 비난하는 컬럼을 쓰고, 피부색 따위와는 상관없이 옳은 일을 했던 초나. 이 멋진 여성의 마지막이 그런 식이어서 솔직히 너무 열받았고, 빌런이 합당하게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사고사했다는 게 짜증났지만 이 작품 전체의 이야기는 좋았다. 작가의 전작처럼 여러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작지만 적당히 따뜻한 공동체의 느슨한 연대와 여러 우연이 겹쳐서 만드는 소소한 복수, 그리고 현실적인 해피엔딩이 좋았다.
12. 쓰리 데이즈(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400쪽)
: 우먼스 머더 클럽 3권. 오랜만에 질과 함께 조깅을 하던 린지는 우연히 드러난 질의 어깨 부근에서 멍을 발견한다. 말을 돌리는 질이 걱정스럽지만 질이 먼저 말하기 전에 다그칠 수도 없는 것. 질과 헤어져 계속 조깅을 하던 린지의 코앞의 저택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불타는 저택 안에서 남자아이를 구해 나오는 린지. 폭발이 일어난 집은 악덕 사업가로 질타를 받고 있는 라이타워의 집. 사건 현장에서는 '오거스트 스파이스'라는 서명이 된 경고장이 발견된다. 얼마 후 의료보험업계의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조지 벤고시언이 호텔에서 독살당하고, 역시 오거스트 스파이스의 이름을 달고 신디 앞으로 이메일이 도착한다. 연이어 테러를 예고하는 오거스트 스파이스. 세계 경제지도자들과 미국 부통령이 참석하는 G8 회담을 취소하지 않으면 3일마다 테러를 일으키겠다고 협박하는데...
수사물이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사건들만이 아닌 사회 문제도 건드린다. 왜 세계 경제의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는가? 이 불균형을 해소할 방법은 정말 없나? 왜 세계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외면하는가? 이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면 정말 과격한 방법 외에는 없는 걸까? 사건의 해결은 솔직히 좀 허무했다. 그래, 내부고발 중요하지. 수사관들이 아무리 정보를 캐고 다녀도 협조와 제보가 없으면 쉽지 않다. 근데 그건 현실에서 그런거고, 소설 속에서만이라도 막 휘리릭 해결하는 그런 것 좀 보면 안 될까? 게다가 이번 에피소드는 정말이지, 이 작가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이 시리즈의 첫번째 희생자도 매우 어이없었는데 이번 희생자는 정말이지... 그렇게 죽일 거였으면 그런 서사라도 만들지 말든가. 그렇게 폭력에 시달리고 괴롭게 살게 했으면서 그렇게 죽게 한다고? 이 캐릭터를 죽여서 이 시리즈를 끌고 나가는데 무슨 편리함이나 재미가 있나 싶다. 게다가 린지의 로맨스도... 이제야 좀 로맨스가 전개되나 싶었는데.... 앞서 신디의 로맨스도 그냥 얼버무렸으면서!
13. 한밤의 배회자(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460쪽)
: 우먼스 머더 클럽 5권. 이 시리즈는 순서와 맞춘 숫자가 제목에 들어가는데, 이 책의 원제는 The 5th Horseman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임팩트가 없어서 이렇게 번역한 거 같은데, 여러 도서관에서 순서 상관없이 빌려서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나로서는 매우 헷갈린다.
샌프란시스코 병원에서 상태가 나쁘지 않은 환자들이 갑자기 죽는 일이 계속 발생한다. 주로 처방전이 뒤바뀌거나 의료 인력의 실수로 잘못된 처치를 받고 사망하는 이 사건은 법정 싸움으로 전개되고, 신디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한편 우먼스 머더 클럽에 새로 합류한 변호사 유키는 엄마와 함께 외출했다가 갑자기 엄마가 쓰러져 샌프란시스코 병원으로 옮긴다.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된 엄마. 하지만 갑자기 엄마가 사망하고, 이 사안이 매우 이상함을 감지한 린지는 병원 관계자로부터 갑자기 사망한 사람들의 눈꺼풀 위에 카두케우스 문양이 새겨진 동전이 올려져 있었다는 제보를 받는다. 연쇄 살인임을 직감한 린지. 또 한편으로, 주차장에서 고가의 차 안에 완벽한 화장과 드레스로 단장한 채 앉아 있는 여성 시신이 발견된다. 차주와는 관계없어 보이는 이 시신을 살해하고 옮긴 범인을 찾기 위해 린지의 팀은 바쁘게 움직인다.
'캐딜락 아가씨'라니, 작가의 무신경함에 화가 났다. 아무리 오래전 작품이라도, 아무리 화자가 정의감에 불타는 여성이라도 피해자를 그런 식으로 대상화하다니. 이게 원문이 이런 건지 아니면 번역 과정에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다. 두 사건이 있긴 하지만 둘다 범인이 너무 쉽게 잡힌다. 고급차 사건은 처음부터 범인을 드러내놓고 시작하고, 수사팀이 범인을 알아내는 과정과 검거 과정, 그들의 동기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같은 느낌이 강했고, 샌프란시스코 병원 사건은 충분히 몰입할 만 했지만 범인을 밝히고 잡는 과정이 시시했다. 그래도 린지와 우먼스 머더 클럽 각각의 이야기와 우정은 재밌다. 비록 4권은 건너뛸 수 밖에 없어서 아쉽지만(내가 다니는 3군데의 도서관에 다 없다).
14. 여섯 번째 표적(제임스 패터슨, 이영아 역. 랜덤하우스코리아. 2010. 456쪽)
: 우먼스 머더 클럽 6권. 토요일 오후. 항구에 접근하고 있는 페리에서 총성이 울린다. 시작은 아들을 심하게 혼내고 있던 젊은 엄마와 그 아들, 그리고 범인을 말리려던 보험사 직원과 페리 승무원에 이어 우리의 유능한 검시관 클레어의 가슴에까지 총알이 박힌다. 그리고 여섯 번째 총알도 발사된다.
사건이 하나가 아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범인은 처음부터 밝혀진 가운데 린지와 팀원들의 수사가 전개되고, 그 와중에 납치 사건과 아파트 내 연쇄 살인까지 이어진다. 이 정신없는 가운데 린지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데스크가 아닌 현장이라고 상사에게 어필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내가 화가 나는 건, 이걸 상사가 받아들이는데, 그 방법이 계급 강등이라는 거. 부서장 지위를 박탈해야만 현장일을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경직된 사고 방식인가? 린지처럼 뛰어난 수사관을 사무실에 붙들어 두려한 것부터 어이없지만 현장 복귀를 꼭 강등이라는, 마치 징계처럼 느껴지는 방법을 통해야만 해? 저자가 당시 경찰국 내의 딱딱하고 어리석은 사고의 흐름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넣은 에피소드인지 아니면 실제로 경찰 조직은 다 그딴식인지는 모르겠다.
뭐, 암튼 별개로 보였던 세 사건은 결국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고, 범인은 진작에 잡히지만 역시나 정신이상을 주장한다. 범인의 정신병을 다룬 다른 수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 또한 결말이 속 시원한 권선징악은 아니다. 그래도 작가는 나름 할 수 있는 한 해피엔딩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역시나 여성들의 우정이고, 난 그래서 이 시리즈를 계속 읽고 싶다.
15.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앨런 알렉산더 밀른,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이종인 역. 현대지성. 2016. 336쪽)
: '머리는 없'지만 귀여운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 알고 있는 푸 이야기는 그냥 단편적으로 본 애니메이션이 다였고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인데 물론 어른이 읽기에는 단조로울 수 있지만 흥미로운 부분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헤펄럼프는 어떤 동물일까? 우즐이랑 위즐은? '홍수가 나서 피글렛이 물에 완전히 둘러싸여 버리는 이야기'가 가장 좋았고, 이 이야기 전에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친구들을 데리고 북극 타멈을 떠나는 이야기'가 가장 좋았다. 무엇보다 등장 인물들이 다 좋았다. 모두가 기댈 수 있는 크리스토퍼 로빈. 로빈이 사랑해마지않는 푸. 머리는 없지만 시와 노래를 잘 만드는 푸. 사랑스러운 푸. 읽으면 읽을수록 푸를 더 사랑하게 되는 책.
16. 여기는 괜찮아요(전성태. 창비. 2024. 280쪽)
: 차분하고 묵직한 단편집. 전에 읽은 작품들이 풍자와 해학의 분위기가 꽤 있었어서 이 작품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세월호 참사, 가족의 죽음, 팬데믹 상황에서의 소외 계층 등 소재가 무거워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좋았던 건 첫번째 작품 <깡통>.
17. 옐로페이스(R. F. 쿠앙, 신혜연 역. 문학사상. 2024. 444쪽)
: 주니퍼 헤이워드와 아테나 리우는 '찐친'은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어울렸을 뿐. 데뷔작 하나 간신히 출판한 지질한 무명작가인 주니퍼와 달리 아테나는 중국계 여성 작가로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대형 출판사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계속 승승장구하다 이제는 넷플릭스와 계약까지 했다. 주니퍼와 아테나는 축하파티를 하다 아테나의 집으로 옮겨왔고, 아테나는 자신만의 팬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며 부엌으로 향한다. 잠시 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주니퍼가 달려갔을 때 아테나는 목에 팬케이크가 걸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하임리히 요법을 시행했지만 소용없었고 주니퍼는 아테나가 죽어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구조대가 떠난 뒤 주니퍼는 아테나의 서재에서 얼핏 봤던 초고를 충동적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읽을 수록 놀라운 내용의 그 작품을 준은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보내 열광적인 반응을 받고, 열정을 다해 초고를 수정해서 출판을 하기에 이른다.
처음엔 그저 표절 혹은 도둑질 얘기하고 생각했다. 문단에서 있을 법한, 어쩌면 꽤 자주 일어날 지도 모를 이야기. 하지만 이건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명만 봤을 땐 백인인 주니퍼가 동양인인 아테나가 쓴 원고로 명성을 얻고 그걸 정당화하고자 필명마저 동양인처럼(준 송) 바꾸고 자신의 혈통에 대해 묻기 전엔 입을 다무는, 동양인에 대한 조롱을 비판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의 질문을 던진다. 누군가가 착취와 폭력에 시달렸다면, 그 이야기를 쓰는 건 당사자에게만 국한된 권리(?)인가? 그 고통을 통해 받은 이익을 누릴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단순히 작품만 놓고 봤을 때 그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목적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이 작품에선 아테나 또한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소설로 발표하여 자신의 명성을 더 높인다. 하지만 아테나가 그랬다고 준도 아테나의 작품을 가져다 이용할 권리가 생긴 건 아니지 않나. 이 사안은 인종과 문화 차별 문제 뿐 아니라 젠더 문제, 사회계층 문제로도 논의를 확대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결국은 모든 게 '태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소재를, 해당 사안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 얼마나 진심을 가지고 피해자를 대하느냐의 문제. 피해자에게 공감하기 위해 얼마나 다가가느냐의 문제. 아마 준에게는 이 진실성이 보이지 않았겠지. 물론 준은 자신의 필명을 바꾸거나 자신을 중국계로 착각하여 초청하는 강연에서 불편함을 보이며 나름의 양심(?)을 드러내지만 저자는 독자가 준을 쉽게 용서하게 두지 않는다. 그래서 결말이 참 우스웠다. 아, 출판계 사람들이란... 저자가 정말 까고 싶었던 건 결국 자본주의에 잠식된 출판계였나보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출판계의 민낯이 조금 슬프다.
18. 기나긴 순간(빌 밸린저, 이다혜 역. 북스피어. 2008. 208쪽)
: 화자는 병원에서 깨어난다. 천장의 희미한 불빛을 보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자신의 목에 가로로 길게 상처가 있음을 알아챈다. 곧 의사와 간호사가 오고, 자신이 목이 잘린 채 발견됐으며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게되지만 자신이 누군지, 어디 사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양말만 신은 알몸으로 목이 잘린 채 발견됐고 양말 안에는 1천달러 지폐가 있었다는 걸 병실을 방문한 경찰에게서 듣지만 역시나 기억나는 건 없다. 경찰은 지문 조회를 통해 그가 빅터 퍼시픽이라는 걸 밝혀 내고, 무사 퇴원한 빅터는 자신을 처음 발견해서 신고한 비앙카를 찾아간다. 한편 경찰은 (또다시) 목이 잘려 죽은 알몸 시체를 발견하는데...
교차 서술을 읽으면서, 그리고 책 뒤의 반전 부분이 봉해진 채 출간됐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반전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짐작은 하면서도 스스로의 추리력을 계속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이 작가의 필력은 뛰어나다. 가장 큰 힌트가 가장 헷갈리게 하는 요소여서 더욱 그랬다. 빅터의 캐릭터가 꽤 냉혹해서 굳이 이런 주인공을 내세워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그 이유도 마지막에 알았다. 이 작가의 작품은 두번째이고 먼저 읽은 <<이와 손톱>>보다 더 흥미로웠다. 국내 출간된 작품이 딱 하나 남았다는 게 조금 아쉽다.
19. 토스트(나이젤 슬레이터, 안진이 역. 디자인이음. 2012. 384쪽)
: 저자의 자전적 소설. 장편이기는한데 음식명으로 된 각 챕터가 짧아서 부담없이 페이지가 쭉쭉 넘어간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지만 엄마는 요리 솜씨가 뛰어나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음식을 먹는 것 뿐 아니라 만드는 것도 좋아했던,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남성적인 매력이 없어서 늘 아버지가 못마땅해했던 화자의 어린 시절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갑자기 엄마를 병으로 잃고난 후의 이야기는 꽤 슬펐다. 특히 마시멜로우 얘기(p.166)는 너무 가슴 아팠다. 그리고 혼자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때 고모에게 전화를 해서 준비하는 동안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얘기(p.187)도. 소설이라는 거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한 챕터 한 챕터의 이야기가 다 에세이같았다.
다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성적 학대의 이야기는, 저자의 의도를 헤아리기 힘들었다. 친족 및 가까운 사람의 아동 성폭력을 고발하는 건가 싶기에는 어조가 너무 담담할 뿐 아니라 뒷얘기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를 그냥 넘기기에는 등장하는 시점이나 이야기의 농도가 좀 생뚱맞고. 물론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이고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중 이런 일들은 그냥 지나치기에는 강렬한 사건들이기는 하지만, 이걸 자서전이 아닌 소설로 기획했다면 그런 이야기들에 좀더 명백한 역할이 주어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 이중 하나는 거짓말(김애란. 문학동네. 2024. 240쪽)
: 경찰서에 있는 지우. 어른이 와야 갈 수 있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애인이었던 선호 아저씨에게 연락을 한다. 지우가 경찰서에 있게 된 건... 채운은 엄마가 교도소에 들어가고 이모와 함께 살게 되어 전학을 온다. 담임은 자기소개를 해보라며, 자기네 반에서 학기 초에 했던 자기소개 게임을 말해준다. 다섯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되 반드시 하나는 거짓말이어야 한다는 것. 소리는 채운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흥미를 느낀다.
지우, 채운, 소리는 다 편부모 하에 있고 나름의 결핍을 갖고 있다. 특히 지우는 세상에 단 둘인 엄마마저 잃고 착하디 착하지만 자신과는 일말의 연결도 없는 선호 아저씨와 함께 사는 게 마음 편하지는 않다. 유일한 애착의 대상인 도마뱀 용식이를 돌보며 살 수 있게 돈을 벌고 싶어 소리에게 용식이를 맡기고 건설현장 알바를 하러 떠난다. 그리고 채운이 전학오기 전, 지우와 채운은 한 빌라에 살았던 적이 있고 지우는 그때 보았던 걸 웹툰으로 그린다. 이렇게 셋은 약하게 혹은 미묘하게 얽혀있다. 셋의 이야기는 모두 안쓰러웠고, 각자의 사정을 서로에게 드러내놓지 못하는 것 또한 슬펐다. 다만 결말은 이야기의 완성 측면에서 좀 미진한 느낌이었다. 물론 세 아이는 4 지금보다 더 나아갈 것이고 특히 지운이는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게 되면서 좀더 편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소리와 채운의 이야기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싶다. 그래도 이 작가의 오랜만의 장편, 정말 반가웠다.
21. 스파이더 게임(제임스 패터슨, 최필원 역. 대현문화사. 2005. 547쪽)
: 워싱턴 빈민가 거리에서 일가족 3명이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다. 심리학자이자 경찰인 알렉스와 파트너 존 샘슨은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곧 유명인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배우 엄마를 둔 매기 로즈와 재무장관의 아들인 슈림피 골드버그가 납치된 사건에 차출된다. 범인은 늘 조용했던 수학교사 게리 손지. 그러나 FBI와 재무부 검찰국까지 합세한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알렉스는 재무부 검찰국 책임자 제지 플레네이건에게 끌린다.
(약스포)
심리학자라는 설정을 왜 넣었는지 모르겠다. 전혀 심리학자같지 않다. 법정 증언 장면에서 '정신의학은 과학이 아닙니다'는 대체 무슨 말이야? 게다가 공범자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는 게 니나 세르지에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라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몸값 지불하려다가 헬기로 납치됐을 때 이미 의심했어야 하지 않나? 게리 손지가 모든 걸 밝히겠다며 불렀을 때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집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 나나 마마가 경찰을 부른다고 하자 자신이 경찰이라며 부르지 말라고 한 것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이들 생각은 안 해? 당연히 지원을 요청해야지! 아니, 애시당초 자기 집 감시/보호를 요청하지 않은 거 자체가 이해 안 간다. 아이들이 있는데. 자기 혼자 다 할 거라는 거, '이 쇼는 내 것'이라는 게리 손지랑 뭐가 다른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너무 질질 끄는 느낌이었다. 우먼스 머더 클럽 시리즈는 안 이랬는데. 아무래도 알렉스가 자꾸만 수사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만든 게 패착이었던 듯. 수사에서 배제되었어도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미친 캐릭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냉철하게 주어진 상황을 분석하고 이용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게다가 로맨스는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물론 나름의 반전을 위해서였겠지만...
22. 딕테(차학경, 김경년 역. 문학사상. 2024. 240쪽)
: 다재다능했던 저자가 여성 인물들을 통해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얘기한다. 개인의 삶은 결코 역사와 분리되어 흘러갈 수 없으며, 만주에서 태어난 부모에게서 나서 미국으로 이주한 디아스포라로서의 저자로서는 이것이야말로 계속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주제일 것이다. 전체 9개의 챕터는 아홉 명의 뮤즈의 이름을 갖고 있고 각각의 챕터는 그 내용에 맞는 사진, 그림, 서예 등의 부가자료들이 풍부할 뿐 아니라 서술의 형식도 다양해서 계속 흥미를 갖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책 뒤의 해설에서 역자도 얘기했듯, 이해가 술술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비록 이 책을 여기저기서 '소설'이라고 분류하는 데에는 반대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저자의 전위적인 산문들을 읽는 동안 지적으로 충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23. 금성에서 봐(빅토리아 비누에사, 신혜연 역. 서사원. 2025. 452쪽)
: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열 여섯 미아. 곧 수술을 앞두고 있지만, 힘겹게 이 세상을 더이상 살아가야 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남은 시간이 있을 때 생모를 만나고 싶을 뿐. 몰래 입수한 서류에 따르면 생모는 스페인에 있다고 한다. 사진 수업에서 만난 노아가 이 여정에 함께해 주기로 했지만 얼마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미아는 문득 창문 밖에서 노아를 죽인 사고차의 운전자인 카일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폭포 공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사라지는 걸 목격하고, 혹시나하는 맘으로 폭포 공원으로 가 자살하려는 그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스페인 여행에 억지로 동참하게 한다.
어찌보면 클리셰 범벅이다. 시한부 소녀와 절망에 빠진 소년, 그런데 둘 다 예쁘고 잘생겼어. 그럼 당연히 사랑에 빠져야지. 그리고 그 사랑이 둘을 구원하는 거고. 물론 그 와중에 '엄마찾기'라는 과제가 있고, 그러면서 둘 다 성장을 하고. 뻔한 이야기였는데도 재밌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이런 순하고 동화같은 이야기를 읽어서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작가의 필력도 한몫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24. 하나도 못 맞히는 점집(이선영. 클레이하우스. 2024. 304쪽)
: 하남시 대통로에는 '미스코리아'라는 점집이 있다. 중년 여성과 건장한 남자가 나란히 앉아서 점을 봐주는데 사주팔자를 적어내고 고민을 이야기하면 아기 동자가 남성에게 접신하여 전생을 이야기해준다. 그런데 던져주는 이름이 좀 의심스럽다. 죄다 나이팅게일 아니면 카사노바 같이 유명인들. 게다가 의사한테 과거에 '동이보감을 쓴 허균'이라고 하질 않나...
그냥 편하게 후루룩 읽고 싶어서 선택했고, 역시 딱 그 정도였다. 막 엄청 감동적이지도 않았고 모든 에피소드들이 다 여기저기서 들어봄직한 뻔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그냥 엄마나 이모한테서 동네 사람들 얘기 듣는 기분으로 슬슬 읽었다. 비호감 빌런이 등장하지 않기도 했고. 어쩄든 미스코리아 점집에서 하는 얘기는, 사람이 살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와 의를 지키면 모든 일들이 다 잘 풀릴 거라는 거겠지. 그건 만고불변의 진리고.
25. 빛이 이끄는 것으로(백희성. 북로망스. 2024. 360쪽)
: 파리에 거주하는 건축가인 화자는 그동안 남을 위한 작업만 해왔다는 생각에 집을 구매하고자 하지만 워낙 예산이 적은 탓에 기대도 안 하고 있던 중, 시테 섬의 오래된 저택이 헐값에 매물로 나왔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 집에 가서 현 집주인의 대리인과 만난 화자는 특이한 내부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저택에 큰 호기심을 느끼고, 집주인의 요구에 따라 스위스 루체른의 요양병원에 있는 그를 만나러 가는데, 마침 도착한 날 집주인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머물게 된 화자는 그 병원 또한 역사가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매우 독특한 구조의 건물임을 알게 되고, 집주인이 메모로 요구했던 문제를 풀기 위해 곳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플롯은 괜찮은데 문장이 너무너무 엉망이다. 진짜 이렇게 거지같은 문장을 가진 출판물은 오랜만이다.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서 초고를 읽는 기분이었다. 한 문장 안에서 동어반복이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니고 같은 뜻의 문장을 연달아 두 번 이상 쓴 문단도 허다하다. 디테일이 어긋나는 건 초보 소설가의 실수로 눈감아 줄 수 있겠지만 지저분한 문장들은 견디기 힘들었다. 참다참다 편집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외워두었다. 문장만 괜찮았다면 내용면에서는 나쁘지 않아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텐데. 저자의 원래 직업이 건축가여서 쓸 수 있었던 작품이고 두 건물의 독특함을 제외하면 내용상으로는 단순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다음번 작품을 준비중이라니, 나무한테 미안한 건 나뿐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