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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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작가 아라이는 티베트 자치구 마얼캉현에서 태어났다.

티베트 출신 작가의 책은 처음 만나보았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는 여행서적으로만 만나보았지, 소설을 통해서 만나본 기억도 거의 없다.

 

아라이는 나에게는 낯선 작가이지만, 중국에서는 2007년에 중국평론가들이 뽑은 '실력파 중국 작가 순위'에서 모옌에 이어 두 번째로 선정될 정도로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라고 한다. 그의 또다른 작품 『색에 물들다』는 1999년에 중국에서 선정한 '100년간 100권의 우수 중국문학도서'에서 1998년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런 중국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살짝 부끄러워지며,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될 티베트의 생생한 모습이 무척 기대되었다.

여행서가 아닌 소설을 통해 만나게 될, 그것도 티베트 출신 작가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될 티베트는 어떤 모습일지...

 

새로운 글을 만나게되겠구나는 설렘에 앞서 작가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읽으며,

이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을 다시 해야 했다.

 

"문화가 발전되어 있고, 세계를 잘 아는 사람들은 티베트의 자연이 너무나도 척박하여 사람들이 아주 힘들게 살아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잖은 사람들은 그런 척박한 땅에 무릉도원을 세우고자 했고 거기에 '샹그릴라'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전 세계가 발전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을 이용해 티베트의 발전을 바라지 않거나, 티베트의 미개발 및 몽매함을 보존하기 위해 동정을 구하고 그 합법성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내가 바로, 유토피아적 상상으로 티베트 등 국가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였기 때문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만났던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나라들을 보면서, 그 나라들이 조금이라도 더 개발되기 전에 방문해야겠다는 조급함, 그 나라들만이라도 개발되지 않고, 영원히 아름다운 자연을 간직한 '샹그릴라'로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게 얼마나 엉뚱한 나의 욕심이고 지나친 이기심이었나, 하는 생각에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가의 바람대로, 티베트를 내 상상속의 티베트와 비교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티베트와 소통하고, 티베트를 이해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과연 작가가 들려주는, 자신에게 익숙한 티베트 사람의 이야기는 무엇일지.

 

이 책에는 모두 열세 편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티베트의 발전 과정과 티베트 백성들의 생할, 중국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이, 조금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낯섦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읽어왔던 중국 소설들과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는 점이라면, 어딘가 신화 또는 전래동화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티베트라는 나라가 내 마음속에 워낙 신비한 분위기로 그려져 있다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 특히 결말 부분이 어렸을 때 많이 읽었던 외국 전래동화나 신화를 떠올리게 했다.

티베트의 진실을 봐 달라고 한 작가의 말을 가슴에 새겼음에도, 이 책을 덮으며 티베트를 더 신화적인 이미지로 간직하게 된 부분이 없잖아 있다.

 

'스스로 팔려간 소녀'에 그려진, 읍내를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고 사는 지촌 여인들의 모습이 특히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다. 그래서 지촌의 그 소녀는 , 더 넓은 곳, 더 멀리에 있는 세상의 끝을 찾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팔아버린 거겠지. 그녀가 본 세상의 끝은 어디였을까? 현 소재지를 넘어, 성 소재지를 넘어, 주 소재지를 넘어, 더 큰 도시를 넘어, 베이징까지, 그리고 외국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소녀의 생각을 따라, 나도 그녀가 찾아갔을 세상의 끝을 그려본다.

 

아라이라는 작가를 통해 만나게 된 티베트의 이야기, 무척 신선하고 좋았다. 그의 또다른 책 『색에 물들다』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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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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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발표 기사를 접하고 내내 책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라는 제목에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후 문학동네 계간지에 실린 작가의 수상 소감과 수상 인터뷰를 읽으며,

나는 한번도 본 적 없는 장은진 작가에게 그만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와 '녀석'이 함께 썼다는 이 책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책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의 수상 소감과 인터뷰를 반복해서 읽었다. 괜히 뭉클했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녀의 편지를 만날 수 있었다.

편지와 가을. 아,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게다가, 편지 여행!

 

'나'는 든든한 동반자 와조와 함께 3년 간 '편지 여행' 중이다.

여행지에서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지만, 그 대신 매일매일 편지를 쓴다.

그의 편지는, 배우를 꿈꾸는 여고생 239도에게도 가고, 자신 때문에 식물인간이 된 친구에게 매일매일 시를 읽어주는 750에게도 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에게 짐을 봐달라고 한 뒤 버스로 돌아오지 않은 421과, 길에 들러붙은 껌딱지로 예술을 하는 99에게도 간다.

숫자는, 여행을 다니며 '나'가 만난 사람들, 그 중에서도 '나'에게 주소를 알려준 사람들에게 붙여준 것이다.

'나'의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집에 있으면 꿈결처럼 찾아오는 발작 때문에,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시작한 여행이었다.

집만 아니라면 어디에서라도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 전국 각지의 모텔을 전전한다.

매일 밤,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매일 아침,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 온 것이 없는지 묻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여행은, 편지가 오면 끝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았다.

 

누구에게서도 답장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나'의 여행은 3년이나 이어지고, 그러다 751을 만나게 된다.

지하철에서 책을 파는 여자.

여자가 파는 『치약과 비누』는 '오늘 나는 치약을 먹었다. 내일은 비누를 먹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책이다.

여자 자신이 쓴 책이다. 자기 자신이 쓴 책을 직접 가지고 나와 파는 소설가라니!

'나'와 와조와 여자. 셋의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는 여행이 이어진다.

 

이 책이, '슬픈 책'인지는 잘 모르겠다. 슬프다,는 건 개인의 감정이니까, '슬픈 책'이라는 말로 타인의 감정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나를 울게 한 건, 대부분 와조였다. 와조, 와조, 내게로 와조...

시력을 잃은 할아버지의 여생을 곁에서 지켜줬던 안내견 와조.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시력을 잃고 '나'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와조.

작가의 수상 소감이 자꾸 떠올랐고, 와조의 모습을 그리며 '녀석'을 떠올렸을 작가가 생각나, 나는 와조가 나올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작은 생명체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울리고 만다.

나의 작고 여린 친구 '몽'이 한번씩 앓거나, 수술을 받거나 하면 그런 증상은 더 심해진다.

올해, 몽은 큰 수술을 또 한 차례 받았고(제발, 이제 더 이상 수술 받는 일 없길! 건강하게 지낼 수 있길!)

그 이후 내 마음은 더 약해져버렸다.

그래서 와조의 이야기에 더욱 오래 눈길이 머물렀고, 더 많이 애틋했으며, 주체하지 못할 눈물을 흘렸다.

 

와조의 이야기는 나를 울렸고, '나'의 편지 쓰기는 내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지금 당장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나'는 1번부터 750번까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에게, 그리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

비록 아무도 '나'에게 편지하지 않지만.

왜 아무도 답장을 쓰지 않는 걸까, 왜 '나'의 여행이 3년이나 이어지도록 만드는 걸까,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나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또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단 한 명도.

'편지를 받을 사람이 있고 또 답장을 보내줄 사람이 있다면, 생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단 한 사람뿐이라 하더라도.'(277)

가슴이 무겁게 내려 앉으며, 이 생이 견디기 힘겨운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지다가, 나는, 나의 생을 견딜 만 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 같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라면, 내 편지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답장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지금 내 편지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졌다.

그리고, 그에게 긴긴 편지를 썼다. 이 가을에 내가 읽은 이 책에 대하여, 아주 긴 편지를.

 

내일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것이다.

우체통은 비어 있을테고, 나의 편지는 무거우므로 '텅!'하고 빈 우체통을 울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릴지도.

하지만, 그 소리를 듣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므로, 나는 쓸쓸함보다는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들지도 모르겠다.

 

'나'의 편지 여행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쓰길. 이 가을, 다섯 줄 문자 메시지보다 더 많은 우표들이 팔려나가길.

그리고 나의 편지가 누군가의 우편함을, 누군가의 편지가 나의 우편함을 똑똑, 두들겨주길.

그러면, 우리 모두 생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깊어 가는 가을이, 더욱 행복해지지 않을까?

아, 나는 정말이지 이 책이 무지무지 좋다!!! 꼬옥 껴안아 주고 싶은 책이다!

 

 

정말, '나'에게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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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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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나에게도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삶을 즐기지도 사랑하지도 못 하는 나에게도, 삶이 선물이라는 걸 주다니, 그럴 때는 삶이라는 게 아주 팍팍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가끔은 관대하기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가을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은, 바로 (아주 가끔이나마)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눈물나게 반가운 존재다.

다른 계절도 아닌 가을에, 그것도 삼 년 연속 김연수 작가의 책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선물' 아니면 '축복'이겠지!

 

이는, 가을을 유난히 못 견뎌하는 나의 습성(?) 때문이기도 한데, 내가 사랑하는 계절 여름이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여름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기나긴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을만 되면 온몸의 기운이 쫘악 빠져나가는 내가, 김연수 작가의 책 덕분에 가을을 기다리고 가을을 행복하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올해에도 가을을 기다린 단 하나의 이유는, 김연수 작가의 새 소설집이 가을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역시 내게는 선물, 아니면 축복!

 

핑크빛 아름다운 이 소설집에는 모두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해, 이미 만나본 적 있는 소설도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온 후에 읽는 느낌은 첫만남처럼 새롭고 신선하기만 했다. 게다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아홉 소설 읽어 '안 재밌는' 소설 없었다. 가장 좋았던 어느 한 편을 꼽기가 힘들 정도로, 이번 단편집은 아홉 편 모두가 어찌나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던지. 나는 9월의 절반 정도를 이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보냈다. (이 책을 받아들고 두 번 읽었는데, 처음에는 궁금하여 단숨에, 그 다음에는 한 편 한 편 조금 더 공을 들인 데이트를.) 이 '여자친구'는 참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분홍빛 입술로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나는 아직 내년 여름을 만나려면 한없이 지루한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기로 해 버렸다. 여름이 아직 멀었으면 어때, 내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책 읽기가 무척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책이 내 안에서 불러 일으키는 추억,을 만나게 될 때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 안에 그런 추억들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그 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자카란다나무의 추억이었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이 만개한 앞에서 사진을 찍어 내게 선물을 했던 이가 있었다. 사진 뒤에는, 꼭 자카란다 꽃이 피면 이렇게 사진 찍어서 하나 보내달라는 메모와 함께 작별 인사가 적혀 있었는데, 십 년 전의 추억이 담겨 있는 그 사진을 케이케이 덕분에 떠올리고는 앨범을 뒤적여 찾아냈다. 아, 이렇게 보랏빛이 찬란한 나무였지, 자카란다는. 결국 나는 자카란다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고, 이후로 '자카란다'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지도 못 한 채 십 년을 보냈지만, 케이케이의 집 근처에 있던 그 자카란다나무는 나를 십 년 전 추억 속으로 이끌어주었다. '나'는 자카란다나무 아래에서 케이케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나는 자카란다나무 사진을 보며, 그녀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해본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가서 자카란다나무를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치 서른의 내게 주는 특별 선물인 것만 같았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나의 서른에 이런 소설을 선물해주는 김연수 작가를 어찌 아니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이 끼워맞추자면 그렇게 끼워맞춰서라도 또 하나의 행복을 맛보고야 만다. 이 소설에 담겨 있는 김연수 작가의 '쓸데없는 눈물'이 결코 쓸데없지 않다는 것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지 몰라도, 이 지구 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움직인 게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나의 하루 1440개의 조각이 어딘지 모르게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정말 그는 소설가를 그만 두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제 그의 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김연수 작가의 '여자친구'는 참 아름답다! 그치?

 

 

_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79)

 

_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우리의 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뤄지지 않은 소망들은 모두 그처럼 대단한 것들이었다.(95)

 

_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 사는 한, 하루에 두 번씩 평생 택시를 탄다고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같은 택시를 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107)

 

_ 좋은 술과 후회 없는 인생이란 그런 풍토에서 빚어지는 것. 술과 인생은 무더운 여름날 꺼내놓은 생선과 같으니, 그 즉시 음미하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만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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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
정세영 글.그림.사진 / 이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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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때 잠깐, '스페인'이란 글자만 보면 넋을 놓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스페인에 설렐 일은 없어졌지만, 그때의 '버릇'은 오래가는지 여전히 '스페인'이란 글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먹어본 건 많이 없어도 세계 요리에는 항상 많은 관심이 가서, 언젠간 저 요리들을 먹어보러 꼭 여행을 떠나리!라는 다짐도 하곤 하는 나.

스페인 요리 역시 내겐 낯선데, 이 책을 통해 열세 가지 스페인 요리를 만나볼 수 있다니, 읽기도 전부터 맛있다.

 

책 제본이 무척 독특했다. 제목에 '편지'라는 단어가 들어가더니, 정말 그에 딱 어울리는 제본이다.

마치 엽서 박스처럼 생긴 이 책의 앞면은 위에 올린 사진과 같고, 뒷면은 바로 주소를 적어서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맛있는 편지'가 보내고 싶어지면 이 책을 사서 그대로 주소만 적어 보내면 되겠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 작고 예쁜 책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제목의 모든 단어가 나를 사로잡은 셈이다.

스페인, 요리, 편지.

 

이 책을 쓴 정세영 씨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사진과 요리를 배워 한국에서 '알바이신'이라는 스페인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한다.

'간단하고 맛있으면 된다'는 저자의 요리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책에는,

'간단하고 맛있는' 열세 가지 음식의 소개, 레시피, 그리고 음식에 대한 추억 한 자락이 담겨 있다.

 

먼저 낯선 스페인 음식에 대한 소개를 들은 후에, 바로 저자의 독특한 레시피를 만나게 되는데,

이 '요리책'의 최대 특징이자 장점이라면, 절대 거들먹거리지 않는 레시피를 싣고 있다는 것!

명색이 '레스토랑 경영자'인데, 절대 어깨에 힘주고 어려운 용어와 정확한 계량으로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따라할 수 있도록,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굉장히 재미있게 설명해준다.

 

제일 처음에 나온 요리는 '해물 빠에야' 였는데, 이런 문장들을 만나고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재계한 재료에 칼질 / 오징어는 껍질을 벗겨 누드로 / 여러분 성격대로 자릅니다 / 바지락과 홍합을 모셔오세요 / 바지락과 홍합이 하품할 때까지 끓입니다 / 마늘의 양 역시 여러분 개성에 따릅니다 / 레몬을 예쁘게 잘라 성격대로 토핑하세요

 

아, 이런 깜찍하고 참신한 레시피라니!!

요리책을 펼쳐놓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책에 적힌 대로, 감자는 큰 거 하나, 양파는 중간 거 두 개, 기름은 몇 스푼, 아 그런데 이거 100g은 어떻게 확인하지? 재료 준비에서부터 '정석대로' 하기 위해 상당한 애를 먹고, 재료의 분량이 잘못되면 실패할까봐 조마조마하곤 했는데, 이 책은 뭐든지 '여러분 개성'에 맡긴다. 그러니까, 나처럼 '개성 없는' 사람은 처음에 뭘 얼만큼 넣어야 할지 몰라 상당히 고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몇 스푼, 몇 그램 따지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일단 요만큼 넣어보자! 내 마음껏 요리할 수 있으니 속 편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초대한 '귀찮은 단계는 다 뛰어넘고 가장 심플하지만 가장 맛난 요리의 세계'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 책에 나오는 요리는 정말 다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을 듯 하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준비하라고도 하지 않고, 값비싼 조리 기구도 필요 없다.

그저 이 '심플한' 안달루시아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애정과, '이까이꺼 나도 할 수 있겠군!'이라는 자신감만 있으면 준비 완료!

 

이렇게 마음에 쏘옥 드는 레시피와 함께 실려 있는 짧막한 에세이들은 때론 코믹하고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진지했다.

굶주림과 '누드' 때문에 고생한 소풍 이야기를 읽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1965년 생인 저자와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딱 하나 남은 1965년산 셰리주를 열어 환영해 주는 '스페인 처녀' 이야기에서는

그만 감동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 행복하고 맛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과 그림을 모두 직접 쓰고 찍고 그린 저자의 다재다능함이 무척 부럽기도 하고,

그런 재주를 맘껏 발휘하여 이처럼 사랑스러운 책을 만들어 주었음에 무척 고맙기도 했다.

언젠가 저자가 경영한다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가서, 저자가 소개해 준 음식들을 맛보고 싶다.

 

 

_ 자, 1965년산 셰리주가 포도주 저장고에 딱 한 병 남아 있었다니, 오늘 이걸 마시면서 우리 기적같은 재회를 기념하자.

  이제 우리 집에는 1965년산 셰리주가 한 병도 남지 않겠지만, 마지막 병을 너와 함께 비웠다는 기억만은 영원히 남지 않겠니?(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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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신예희 글.그림.사진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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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배고프면 화가 난다.(화,라기 보다는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고 해두자.)

요즘은 덜 하지만,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이 내가 슬슬 언짢아지는 기색을 보이면 일단 밥부터 먹자고 식당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배고프면 화가 난다’는 것 외에 더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여튼 엄청난 반가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궁금한 것은 무조건 입에 넣고 보는 그녀, 지은이 신예희가 들려주는 음식 여행!

책을 읽다가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책 아주 못쓰겠구만!!’하면서 성을 냈다.

정말이지, 가만히 방에 앉아서 보기에는 정말 너무너무 괴로운 책이었다.

책 속에는 온통 맛있는 음식 천지였으며, 그 음식 맛을 나타내는 그녀의 글은, 글자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달달하고 향긋했으며, 사진들은 당장 뜯어먹고 싶도록 예쁘게 찍혀있었다.(마카오식 에그타르트, 정말 사진을 오려서 한입에 꿀꺽 하고 싶었다!)

내가 이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그 나라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고 슬펐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지에서도 맥도널드나 피자헛같은 ‘검증되고’ 친숙한 곳을 찾아가 끼니를 때우려는 사람이 있고, 현지 음식점을 기웃거리며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음식들을 먹으려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이고, 지은이도 당연히 후자이다.

중국에 가서는 같은 테이블의 한국인 모두가 거부한 ‘왕번데기’를 용감하게 먹기도 했고(이 왕번데기가 뭔지 아는 사람은 나랑 안 놀려고 할지도!), 왕푸징 거리에서 만난 전갈 꼬치 앞에서 용기를 내어보기도 했다(용기만 냈다). 하지만 정작 먹어본 현지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나와 함께 여행한 친구들은 대부분 여행지에서도 맥도널드를 찾는 쪽이었다. 역시, 여행은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과!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참 많이도 날아다녔다.

날아가며 먹는 기내식부터 시작해서 홍콩&마카오, 스페인, 터키, 태국, 일본에서 만난 먹을거리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홍콩에서 만난 애프터눈 티는 '영국식으로다가 우아하게 애프터눈 티 한잔'을 '죽기 전에 꼭 해볼 일' 목록에 적어 넣게 했으며, 갑자기 튀어나온 '샹차이' 사진에 흠칫 놀라 몸을 떨기도 했고(이 책에는 그 이름이 '코리앤더'라고 나와서 미처 마음의 준비를 못 했다!), 상상만 해도 뒷골이 당기는 달달한 스페인 초콜라떼가 먹고 싶어 애꿎은 초콜릿만 열심히 먹어댔으며, 터키의 커피집 카흐베하네에서 공주병에 걸려보고 싶기도 했고, 태국의 열대과일들이 눈에 밟혀 사진을 보며 '이건 무슨 맛' '저건 무슨 맛' 입맛을 쩝쩝 다셨다.

 

모든 여행자의 가슴에는 나름대로의 꿈과 목표가 있다.

나도 이런 여행도 해보고 싶고 저런 여행도 해보고 싶은데, 언젠가 꼭 한번은 이렇게 음식만을 위한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책을 덮었어도, 눈앞에는 책속에서 본 맛있는 음식들이 어른어른 떠다닌다.

당장 떠나지 못할 나에게는 정말 잔인한 책이다!

아, 정말 달달하고 맛있고 향긋하고 행복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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