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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
정세영 글.그림.사진 / 이숲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한때 잠깐, '스페인'이란 글자만 보면 넋을 놓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스페인에 설렐 일은 없어졌지만, 그때의 '버릇'은 오래가는지 여전히 '스페인'이란 글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먹어본 건 많이 없어도 세계 요리에는 항상 많은 관심이 가서, 언젠간 저 요리들을 먹어보러 꼭 여행을 떠나리!라는 다짐도 하곤 하는 나.
스페인 요리 역시 내겐 낯선데, 이 책을 통해 열세 가지 스페인 요리를 만나볼 수 있다니, 읽기도 전부터 맛있다.
책 제본이 무척 독특했다. 제목에 '편지'라는 단어가 들어가더니, 정말 그에 딱 어울리는 제본이다.
마치 엽서 박스처럼 생긴 이 책의 앞면은 위에 올린 사진과 같고, 뒷면은 바로 주소를 적어서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맛있는 편지'가 보내고 싶어지면 이 책을 사서 그대로 주소만 적어 보내면 되겠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 작고 예쁜 책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제목의 모든 단어가 나를 사로잡은 셈이다.
스페인, 요리, 편지.
이 책을 쓴 정세영 씨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사진과 요리를 배워 한국에서 '알바이신'이라는 스페인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한다.
'간단하고 맛있으면 된다'는 저자의 요리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책에는,
'간단하고 맛있는' 열세 가지 음식의 소개, 레시피, 그리고 음식에 대한 추억 한 자락이 담겨 있다.
먼저 낯선 스페인 음식에 대한 소개를 들은 후에, 바로 저자의 독특한 레시피를 만나게 되는데,
이 '요리책'의 최대 특징이자 장점이라면, 절대 거들먹거리지 않는 레시피를 싣고 있다는 것!
명색이 '레스토랑 경영자'인데, 절대 어깨에 힘주고 어려운 용어와 정확한 계량으로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따라할 수 있도록,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굉장히 재미있게 설명해준다.
제일 처음에 나온 요리는 '해물 빠에야' 였는데, 이런 문장들을 만나고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재계한 재료에 칼질 / 오징어는 껍질을 벗겨 누드로 / 여러분 성격대로 자릅니다 / 바지락과 홍합을 모셔오세요 / 바지락과 홍합이 하품할 때까지 끓입니다 / 마늘의 양 역시 여러분 개성에 따릅니다 / 레몬을 예쁘게 잘라 성격대로 토핑하세요
아, 이런 깜찍하고 참신한 레시피라니!!
요리책을 펼쳐놓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책에 적힌 대로, 감자는 큰 거 하나, 양파는 중간 거 두 개, 기름은 몇 스푼, 아 그런데 이거 100g은 어떻게 확인하지? 재료 준비에서부터 '정석대로' 하기 위해 상당한 애를 먹고, 재료의 분량이 잘못되면 실패할까봐 조마조마하곤 했는데, 이 책은 뭐든지 '여러분 개성'에 맡긴다. 그러니까, 나처럼 '개성 없는' 사람은 처음에 뭘 얼만큼 넣어야 할지 몰라 상당히 고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몇 스푼, 몇 그램 따지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일단 요만큼 넣어보자! 내 마음껏 요리할 수 있으니 속 편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초대한 '귀찮은 단계는 다 뛰어넘고 가장 심플하지만 가장 맛난 요리의 세계'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 책에 나오는 요리는 정말 다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을 듯 하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준비하라고도 하지 않고, 값비싼 조리 기구도 필요 없다.
그저 이 '심플한' 안달루시아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애정과, '이까이꺼 나도 할 수 있겠군!'이라는 자신감만 있으면 준비 완료!
이렇게 마음에 쏘옥 드는 레시피와 함께 실려 있는 짧막한 에세이들은 때론 코믹하고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진지했다.
굶주림과 '누드' 때문에 고생한 소풍 이야기를 읽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1965년 생인 저자와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딱 하나 남은 1965년산 셰리주를 열어 환영해 주는 '스페인 처녀' 이야기에서는
그만 감동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 행복하고 맛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과 그림을 모두 직접 쓰고 찍고 그린 저자의 다재다능함이 무척 부럽기도 하고,
그런 재주를 맘껏 발휘하여 이처럼 사랑스러운 책을 만들어 주었음에 무척 고맙기도 했다.
언젠가 저자가 경영한다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가서, 저자가 소개해 준 음식들을 맛보고 싶다.
_ 자, 1965년산 셰리주가 포도주 저장고에 딱 한 병 남아 있었다니, 오늘 이걸 마시면서 우리 기적같은 재회를 기념하자.
이제 우리 집에는 1965년산 셰리주가 한 병도 남지 않겠지만, 마지막 병을 너와 함께 비웠다는 기억만은 영원히 남지 않겠니?(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