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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가끔은 나에게도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삶을 즐기지도 사랑하지도 못 하는 나에게도, 삶이 선물이라는 걸 주다니, 그럴 때는 삶이라는 게 아주 팍팍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가끔은 관대하기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가을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은, 바로 (아주 가끔이나마)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눈물나게 반가운 존재다.
다른 계절도 아닌 가을에, 그것도 삼 년 연속 김연수 작가의 책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선물' 아니면 '축복'이겠지!
이는, 가을을 유난히 못 견뎌하는 나의 습성(?) 때문이기도 한데, 내가 사랑하는 계절 여름이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여름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기나긴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을만 되면 온몸의 기운이 쫘악 빠져나가는 내가, 김연수 작가의 책 덕분에 가을을 기다리고 가을을 행복하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올해에도 가을을 기다린 단 하나의 이유는, 김연수 작가의 새 소설집이 가을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역시 내게는 선물, 아니면 축복!
핑크빛 아름다운 이 소설집에는 모두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해, 이미 만나본 적 있는 소설도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온 후에 읽는 느낌은 첫만남처럼 새롭고 신선하기만 했다. 게다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아홉 소설 읽어 '안 재밌는' 소설 없었다. 가장 좋았던 어느 한 편을 꼽기가 힘들 정도로, 이번 단편집은 아홉 편 모두가 어찌나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던지. 나는 9월의 절반 정도를 이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보냈다. (이 책을 받아들고 두 번 읽었는데, 처음에는 궁금하여 단숨에, 그 다음에는 한 편 한 편 조금 더 공을 들인 데이트를.) 이 '여자친구'는 참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분홍빛 입술로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나는 아직 내년 여름을 만나려면 한없이 지루한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기로 해 버렸다. 여름이 아직 멀었으면 어때, 내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책 읽기가 무척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책이 내 안에서 불러 일으키는 추억,을 만나게 될 때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 안에 그런 추억들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그 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자카란다나무의 추억이었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이 만개한 앞에서 사진을 찍어 내게 선물을 했던 이가 있었다. 사진 뒤에는, 꼭 자카란다 꽃이 피면 이렇게 사진 찍어서 하나 보내달라는 메모와 함께 작별 인사가 적혀 있었는데, 십 년 전의 추억이 담겨 있는 그 사진을 케이케이 덕분에 떠올리고는 앨범을 뒤적여 찾아냈다. 아, 이렇게 보랏빛이 찬란한 나무였지, 자카란다는. 결국 나는 자카란다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고, 이후로 '자카란다'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지도 못 한 채 십 년을 보냈지만, 케이케이의 집 근처에 있던 그 자카란다나무는 나를 십 년 전 추억 속으로 이끌어주었다. '나'는 자카란다나무 아래에서 케이케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나는 자카란다나무 사진을 보며, 그녀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해본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가서 자카란다나무를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치 서른의 내게 주는 특별 선물인 것만 같았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나의 서른에 이런 소설을 선물해주는 김연수 작가를 어찌 아니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이 끼워맞추자면 그렇게 끼워맞춰서라도 또 하나의 행복을 맛보고야 만다. 이 소설에 담겨 있는 김연수 작가의 '쓸데없는 눈물'이 결코 쓸데없지 않다는 것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지 몰라도, 이 지구 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움직인 게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나의 하루 1440개의 조각이 어딘지 모르게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정말 그는 소설가를 그만 두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제 그의 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김연수 작가의 '여자친구'는 참 아름답다! 그치?
_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79)
_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우리의 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뤄지지 않은 소망들은 모두 그처럼 대단한 것들이었다.(95)
_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 사는 한, 하루에 두 번씩 평생 택시를 탄다고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같은 택시를 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107)
_ 좋은 술과 후회 없는 인생이란 그런 풍토에서 빚어지는 것. 술과 인생은 무더운 여름날 꺼내놓은 생선과 같으니, 그 즉시 음미하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만다.(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