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쁨 - 문정희 시선집 ㅣ 시월 활판인쇄 시선집
문정희 지음 / 시월(十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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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랑을 주제로 한 시 100편을 모았다.

몇 해 전에 나온 같은 주제의 시선집에다 최근 발표한 몇 작품을 첨가했다.

그동안 나의 시를 사랑해 주신 분들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수명이 몇 백년도 더 된다는 견고하고 우아한 한지에 청홍의 장정을 한 이 수공예 시집을 만드는 동안 참 행복했다.

_ 책머리에

 

 

참으로 특별한 시집을 선물받았다.

시월출판사에서 납활자인쇄 출판문화를 부활하고자 현재 활동중인 문인의 자선 작품을 단행본으로 소량 인쇄, 발행하고 있는데 그 중 한 권인 문정희 시선집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두 스무 여권이 출간되었다 한다.

문정희 시인이 책머리에 이른 것처럼 '견고하고 우아한 한지에 청홍의 장정을 한' 시집은 그 외모로도 참 멋스럽고 우아하지만, 이 안에 실린 글자들이 한 자 한 자 활판으로 찍힌 것이라 하니 그 글자들을 보는 마음이 얼마나 신기하고 특별한지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 활판으로 된 책은 이 시선집이 유일하다.

거기에 책 속지에는 문정희 시인의 곱고 단아한 글씨로 내 이름 직접 넣은 서명까지 되어 있어 더더욱 특별하고 소중한 책이 되었다.

 

시집을 많이 읽어보지 못한지라 문정희 시인의 시집으로서도 처음 만나보는 것인데, 사랑을 노래한 시 100편과의 만남, 정말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워낙 특별 장정인지라 선뜻 밑줄을 긋거나 혹여 종이 상할세라 접착메모지도 붙이지 못하고 곱게곱게 읽기만 했는데, 마음속으로 갈무리해둔 시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사실 이 시집을 펼치던 밤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눈물이 뚝뚝,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라게 줄줄 흐르던 그런 밤이었다. 앉아도, 누워도, 그야말로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그래도 밤마다 늘 읽던 습관대로) 이 시선집을 손에 잡았는데, 내 눈이야 울던 말던, 시 한 편 한 편 참으로 아름답고 환희에 가득 차더란 말이지...

 

이 시집을 다 읽을 때쯤에는 흐르던 눈물이 멈췄던가 어쨌던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게 지난 9월 끝자락의 일이었으니까...

그때는 어떤 이유로 울었건 말건, 지나고 보면 얼마나 울었는지 생각도 잘 안 날 정도로, 모든 것은 잔잔해지기 마련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_ '흙' 부분

 

 

정갈하게 새겨진 글자를 한 자 한 자, 시인이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를 한 구절 한 구절, 눈으로, 마음으로, 손끝으로, 코끝으로 읽었던 행복한 시간.

(활판이 신기해서 자꾸 손끝으로 글자를 더듬어 그 느낌을 느껴보고, 시집에 코끝 바짝 들이대 한지 냄새도 맡아보고 그랬다.)

비록 문정희 시인과의 첫만남이 많이 늦긴 했지만, 앞으로 그의 시들을 꾸준히 만나며 가슴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을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_ '유리창을 닦으며' 전문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_ '겨울 사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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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에 서쪽을 빛내다 ㅣ 창비시선 3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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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장석남 시인의 새 시집 출간 기념으로 낭독회가 열렸었다.

시인의 음성으로 직접 듣는 시,가 탐이나 낭독회에 가고 싶었으나, 시인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게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 책장에 꽂혀 있던 시인의 시집을 한 권 빼들었는데, 그 밤이 하얗게 새버리는 거였다.

바로 온라인 서점에 접속해 신간과 구간을 모두 구입해 여러날 동안 시인의 시와 진한 연애를 했다.

뺨을 서쪽에 빛내기도 하고, 왼쪽 가슴 아래께에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젖은 눈을 들어 먼 허공을 보기도 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미소를 머금어보기도 하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은 밤을 보내보기도 하며 지새운 많은 밤들...(아직 새떼들과 함께 망명하지는 못했다.)

 

  나의 가슴이 요정도로만 떨려서는 아무것도 흔들 수 없지만 저렇게 멀리 있는, 저녁빛 받는 연(蓮)잎이라든가 어둠에 박혀오는 별이라든가 하는 건 떨게 할 수 있으니 내려가는 물소리를 붙잡고서 같이 집이나 한 채 짓자고 앉아 있는 밤입니다 떨림 속에 집이 한 채 앉으면 시라고 해야 할지 사원이라 해야 할지 꽃이라 해야 할지 아님 당신이라 해야 할지 여전히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이렇게 떨리지만 떨게 할 수 있는 것은 멀고 멀군요 이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이 내 평생의 일인 줄 누가 알까요. _ '오막살이 집 한 채' 전문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음속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짓고 시구들과 함께 가슴을 떨었다. 실은, 이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떨게 만들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지만. 역시 멀고 먼 곳에. 그 떨림이 멈추기 전에 그 속에 집을 한 채 앉히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시들을 읽으며 자꾸자꾸 떠올리던, 계속계속 삼천포로 빠졌던, 그 얼굴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떠나질 않네.

 

지난 가을의 추억을 무심히 떠올리기에는, 왠지 딴청 피우고 싶은 밤이다. 시나 읽어야지!

 

 

하루를 탕진하고

별을 본다

후후 불면 숯불처럼 살아나거라

피리를 불랴? 살아나거라

 

한 두엇 천년이나 지났을까? 손톱 한번 깎고 나니

어느덧 숨 끝에 까무룩이 돋아나와 손등에 앉는

하늘의 문자들

 

北쪽 하늘 별 옮겨앉듯 들들들 읽어나가는데

하는 수 없이 껴안을 전율도 있어

또 한번 사랑을 탕진한다

 

숯처럼 앉아

별을 본다

피리를 불랴?

숨은 하늘 _ '北쪽 하늘 별 옮겨앉듯' 전문

 

  이제 모든 청춘은 지나갔습니다 덥고 비린 사랑놀이도 풀숲처럼 말라 주저앉았습니다 세상을 굽어보고자 한 꿈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안 것도 겨우 엊그제 저물녘, 엄지만한 새가 담장에 앉았다 몸을 피해 가시나무 가지 사이로 총총히 숨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세상을 저승처럼 둘러보던 새 이마와 가슴을 꽃같이 환히 밝히고서 몇줄의 시를 적고 외워보다가 부끄러워 다시 어둠속으로 숨는 어느 저녁이 올 것입니다. _ '11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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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전후사의 재인식
김도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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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연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한 건, 한 지인이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읽었던 때의 아련한 감동을 적은 글을 보고나서였다.

사실, 작가의 이름도 그 소설의 제목도 그 글을 통해 처음 접했다.

책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그가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에 보내는 찬사와 사랑을 보며 작가의 글이 무척 궁금해졌더랬다. 한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아버린 글이라니! 아아, 나는 이처럼 누군가로부터 뜨거운 애정과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는 작가에 대해서는 일단 마음이 푸근해지며 문이 활짝 열리는 편이다. 살면서 어느 누군가의 영혼을 사로잡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아마, 평생 단 한 사람의 마음도 사로잡지 못 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는 쓸쓸한 인생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읽어봐야 한다. 이 작가!

마침 작가의 신간이 나왔기에 나는 나를 유혹한 그 책 대신 신간 『이별전후사의 재인식』을 먼저 만나보게 되었다.

 

책 속 글의 분위기는 나의 지레짐작과 많이 달랐고, 내가 즐겨 읽는 글들(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주위를 둘러보면 소설속 주인공을 닮은 이웃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글들?)과도 느낌이 많이 달라, 낯선 동네에서 어쩌면 조금 길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 한 편 모두다 인상적인 글들이었지만, 그래도 마음을 온전히 나누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남는 건, 내가 평소에 익숙지 않은 것에 적응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져서인지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떡ㅡ병점댁의 긴 하루」였는데(아, 그게 그러니까, 결코 야한 장면들이 등장해서가 아니고, 흠흠...)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 여성이 이 물 설고 말 선 나라에서 남편에게 학대 받다가 그런 남편이나마 죽고 난 후 홀로서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장면이 굉장히 애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상에 좋은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병점댁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지도 몰라, 제발 그렇게 되길 바라던 마음은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이지 '헉!!' 소리가 터져나올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가슴에 철렁, 돌멩이 하나 던져진 느낌... 「메밀꽃 질 무렵」('메밀꽃 필 무렵'의 오타가 아니고, 허생원의 아들 동이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다)의 마지막도 가슴이 쩡, 하는 그런 느낌이 안타까웠는데... '상심'에 이르게 만드는 결말이 조금쯤 원망스러우면서도, 통속적인 '해피엔딩'보다는 이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현실은 그런 거라며 씁쓸하게 마음을 토닥여야 했다.

 

나귀 대신 승합차를 몰고 메밀꽃 밭을 지나는 동이와 허생원 부자의 마지막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 인생이 뭔가요?"

"뭐긴. 장보러 왔다가 장보고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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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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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뜻밖의 선물을, 우주 저편에서 보내온 것 같은 선물을 받았다.

기다렸지만 기대하지는 못 했던,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 했던, 故 이석주 작가의 사진집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작가가 생전 마지막 여행지였던 홋카이도와 아키타에서 찍은 설경에 강성은 시인이 글을 붙이고 박상순의 시 '너 혼자'에서 제목을 따 이 세상에 탄생하게된 사진집이다. 혼자서는 올 수 없어, 작가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아 태어나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석주 작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작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 방송을 통해 전해진 작가의 이야기라든가, 그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어 자주 방문했던 작가의 블로그에서 본 사진과 글 등을 통해, 내게 남아 있는 모습들이 있는 것인데, 그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 하나는 바로 눈[雪]이다. 작가가 눈을 참 좋아했던가? 사진집 『눈이 오는 날』을 다시 펼쳐 본다. 프롤로그에 작가의 눈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다.



난 눈을 좋아한다. 지금 막 하늘에서 내리는 눈 속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위에 닿아 흐르는 눈(雪)물을 좋아한다. 내 눈(眼)이 눈(雪)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눈의 인사는 참 따뜻하다. 어느새 어깨 위까지 내려와 날 감싸주는 배려까지 보인다. 난 그런 눈이 참 좋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사실, 『너 혼자 올 수 있니』를 받아들고 그 안의 사진을 감상하며 책상 한켠에 잠들어 있던 『눈이 오는 날』을 다시 꺼내어 펼친 건, 작가가 직접 쓴 글을 읽고싶어서이기도 했다. 『너 혼자 올 수 있니』는 작가의 사진집이기는 하지만, 직접 글을 붙이진 못 했다. 그의 삶은, 그가 생애 마지막 설경을 담는 것까지만을 허락했기에. 이에 시인 강성은이 그만의 감성이 담긴 글을 지어 사진집의 여백들을 채워주었지만, 신예 시인의 글을 만나게 되는 반가움과 기쁨도 작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전에 멀리서나마 그를 응원하고 그의 건강을 기도했던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사진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했을 테지만. 아니, 어쩌면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그 사진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이 읽히고, 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면 더욱 좋을 테고.



내가 바라보는 눈과 지금의 내 마음을 찍어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맘과 다르게 왜곡되는 말과 행동 대신, 마음이 고스란히 보여질 수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면 내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 같았고,

사진을 보면서 외로워 보인다고 말해주면 내 외로움을 알아봐주는 것 같았다.

마음을 알아달라고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조용히 그 사람의 눈(眼)이 내 마음을 알아보는 것에 난 감동했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그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작가의 마음이 이 책, 『너 혼자 올 수 있니』 속의 많은 사진들로 남았다. 이제 우리가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 혹은 '외로워 보여'라고 말해도 '그래, 그게 바로 내 마음이야'라고 말해줄 작가가 곁에 없어 사진과 나, 오롯한 둘 만의 대화가 되었지만, 내가 어떤 눈으로 사진을 보고 어떤 감상을 남기든, 우주 저편의 그가 다 미소지으며 고개 끄덕여줄 것 같다. 그래, 맞다고, 바로 그 마음이라고.



당신이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던 것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여주지 못했던 것

당신이 껴안고 싶었는데

껴안지 못했던 것



그러나 나는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껴안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우리 영혼이 닿아 있어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99쪽


책 속 사진들은 참 따스하기만 하다. 분명 2월의 홋카이도는 무척이나 추웠을 텐데, 분분히 흩날려 머리에 뺨에 손등에 와 닿는 눈송이는 차가웠을 텐데, 겨우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은 발끝을 시리게 만들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꽁꽁 얼어붙은 날씨나 차가운 눈송이 모두 그의 마음 필터를 통과한 뒤에는 은은하고 따스한 기운으로 화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그처럼 따스했던 것일까? 여행지 숙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알약 마저도, 조금 더 희망차 보이고, 그로 인해 모든 걸 떨쳐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데 말이다... 차가운 눈을 사랑했지만, 눈송이가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도록 따스한 심장을 가진 이였을 것이다. 이 사진들을 찍은 이는...



이제 작가가 남긴 사진들을 더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이 사진집이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겨울을 몹시 싫어하는 나이지만, 내가 그래도 겨울을 추억할 수 있고 겨울에 애틋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건,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그리하여 이 겨울의 찬기마저도 훈훈한 따스함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긴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사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폭설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종종 그의 사진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니까. 사진의 힘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기도 하는 거니까.



그가 있는 우주 저편은, 눈이 자주 내리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아무리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뜨거운 심장이 그와 함께이니까.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그는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사진과 함께이리라. 오늘도 가만히 사진집을 펼쳐 그의 사진들과 대화를 나눠본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 기차가 달려요. 그대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가 보아요...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어쩌다 슬픈 이야기를 하려 하면

괜찮아 다들 슬픔은 있어



어쩌다 아픈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다 나을 수 있어



어쩌다 외로운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누구나 혼자야. 라고 말했지



그럼 난 그냥 웃었지



어쩌다 너에게 슬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아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외로움이 올 때



그때 넌 정말 괜찮았니?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9쪽, 이석주 블로그 글 (http://blog.naver.com/soar0108)



시들지 않는 건 없지만

영원할 순 없지만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시간은 지속된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79쪽



기억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23쪽


그리고, 이석주 작가가 내 심장에 남긴 한 마디.

"인생에, 나중은 없더라구요."







이석주 작가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군 전역 후 1년간 사진작가 조선희의 스튜디오에 출근하며 사진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 2007년부터 홍대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사진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9년 간암 투병을 선고받은 뒤에도 지치지 않는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여러 사진전들을 기획 전시했다. 충남 당진에 마련한 갤러리 겸 작업실 ‘호련’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그의 이야기는 2009년 2월 KBS 다큐멘터리 <사미인곡>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09년 9월 MBC <생방송 오늘 아침>에도 ‘말기 암 사진작가 아들의 어머니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폐암까지 전이된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와 아키타 여행을 다녀온 후 눈(雪)에 관한 사진전을 준비하던 2010년 4월, 만 스물여덟의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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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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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일반적인 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제목,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어떤 독자를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고 말하는 거지?

표지 그림의 우아한 노부인이 바로 그 주인공 되시겠다. 우아할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기까지 한, 바로 영국 여왕이 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이다.

'여왕'이라는 직위 자체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지만, 책 앞에 모두가 평등한 것이지, 어찌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일까?

그건, 아마도 여왕의 본분 중 하나가 '취미를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취미에는 기호가 끼어들고, 기호는 피해야 했다. 기호에는 배척되는 사람이 있다. 여왕은 기호가 없어야 한다.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스스로 어디에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된다.'(12) 고로 뚜렷한 기호에 포함되는 '독서'는 여왕으로서는 피해야 할 것이었고, 그런 여왕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책읽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러다가 정사에 시큰둥해졌다는 것이, 역시 일반적인 일은 아닌 거다.

 

이 책의 초간단 줄거리는 '여왕이 독서에 빠졌다! 큰일났다!'가 되겠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왕과 그 주변의 크고 작은 변화들, 여왕의 책읽기에 특별한 조언자가 되는 인물을 둘러싼 '궁중암투' 등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책에 관해 사유하는 문장들이 이 '일반적인 독자'에게 꽤나 진지하게 사색할 시간을 마련해준다. 책읽기에 대한 여왕과 주변인물의 견해, 책읽기에서 찾아지는 즐거움, 읽는다는 것과 쓰는다는 것의 차이 등이 "그러니까 너는 책 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듯이 등장한다.

꽤 얇은 이야기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번 눈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공감가는 문장들을 옮기기도 하는 까닭에 자주 쉬어갔다. 물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오래 쉴 수는 없었지만!

 

"심심풀이? 책은 심심풀이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네. 책은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다루는 것이야.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어. 케빈 경, 짐은 다른 세상을 더 알고 싶을 뿐이야. 짐이 심심풀이를 원했다면 뉴질랜드로 갔겠지." (여왕)

 

노먼은 그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고, 깨달음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물론 그 즐거움의 일부는 깨달음에서 온다는 것을 노먼도 알고 있었지만, 의무는 그 안에 없었다. (노먼)

 

여왕과 노먼의 각기 다른 책읽기에 대한 견해를 보며, 나는 등장한 순서대로 여왕의 말에 공감해 밑줄을 그었다가, 다시 노먼의 말에 공감하며 거기에도 밑줄을 그었다. 굳이 '심심풀이'라는 단어를 경계로 해서 본다면, 여왕은 심심풀이보다는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 목적이 있는 책읽기를 주장하고, 노먼은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다. 그 둘을 섞어 놓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재미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만도 아니고. 때로는 심심풀이로, 때로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 책읽기란 '심심풀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목적이 읽는 책읽기는 책을 '읽는다'라는 행위보다는 뭐랄까 '본다'라는 행위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참고서를 '읽는다'고는 하지 않으니까... 종종, 책을 왜 읽느냐라는 물음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글쎄, 내가 책을 왜 읽지?'라고 고민하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답을 궁리하지 못했다. 뭐, 기껏 생각한 정도가 '습관'이라는 것. 흠, '나와 책읽기'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아니아니, 그냥 좋으니까 읽으면 되는 거지 뭐, 굳이 왜 읽는지 정의 내릴 필요는 없는지도!)

 

책 읽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책이 초연하기 때문이라고 여왕은 생각했다. 문학에는 당당함이 있었다. 책은 독자를 가리지 않으며, 누가 읽든 안 읽든 상관하지 않는다. 여왕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독자는 평등했다. (39)

 

책은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독자는 누구나 평등하다. (40)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려질 때, 세상은 왜 내게만 이래! 분노가 치솟을 때, '법 앞에 만민 평등'은 얼어죽을, 그 따위 말 개나 물어가라 그래!라고 외치고 싶을 때, 자자, 책 앞으로 갑시다. 책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니까. 책은 당신이 누구든 누구이지 않든(?) 사람 가리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니까. 당신이 친하고자 마음만 먹고 한 발짝 다가간다면 그 순간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되니까. 뭐, 이런 캠페인이라도 펼치고 싶어지는, '책 앞에 만민 평등' 문장이다. 속 시원하다.

 

책에 빠진 여왕으로 인해 비서관이 골머리를 앓고, 여왕이 새로 신임하게 된 조언자는 멀리 '유배' 당하고, 국민들은 '각본'에서 벗어난 여왕의 질문("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나?"와 같은)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여왕의 개는 놀이 시간을 앗아간 책을 미워하기에 이르르지만, 그 무엇도 책에 빠진 여왕을 말리지 못한다. 아니, 그 끝에는 오히려 여왕이 새로이 찾고자 하는 길이 나타난다.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의 인생을 적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메모가 의미하는 바는, 그렇다, 여왕은 이제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쓰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여왕이 발견해 내는 여왕 자신의 인생은 어떤 것일지,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도 꽤 궁금해지는 그런 대목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 이야기도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이야기만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여왕님, 꼭 작가로서 다시 한 번 이 독자 앞에 서주시겠어요, 네?


"책을 읽고 마음에 든 작가가 생겼는데,

그 작가가 쓴 책이 그 한 권만 있는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적어도 열 권은 넘게 있는 거예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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