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사진, 강성은 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0년 12월
품절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hotoreview/photo_709840144624517.jpg)
이 겨울, 뜻밖의 선물을, 우주 저편에서 보내온 것 같은 선물을 받았다.
기다렸지만 기대하지는 못 했던,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못 했던, 故 이석주 작가의 사진집 『너 혼자 올 수 있니』.
이석주 작가가 생전 마지막 여행지였던 홋카이도와 아키타에서 찍은 설경에 강성은 시인이 글을 붙이고 박상순의 시 '너 혼자'에서 제목을 따 이 세상에 탄생하게된 사진집이다. 혼자서는 올 수 없어, 작가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관심과 도움을 받아 태어나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오는 책이다.
이석주 작가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작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투병 생활을 하던 중에 방송을 통해 전해진 작가의 이야기라든가, 그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어 자주 방문했던 작가의 블로그에서 본 사진과 글 등을 통해, 내게 남아 있는 모습들이 있는 것인데, 그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 하나는 바로 눈[雪]이다. 작가가 눈을 참 좋아했던가? 사진집 『눈이 오는 날』을 다시 펼쳐 본다. 프롤로그에 작가의 눈에 대한 단상이 적혀 있다.
난 눈을 좋아한다. 지금 막 하늘에서 내리는 눈 속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내 눈 위에 닿아 흐르는 눈(雪)물을 좋아한다. 내 눈(眼)이 눈(雪)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눈의 인사는 참 따뜻하다. 어느새 어깨 위까지 내려와 날 감싸주는 배려까지 보인다. 난 그런 눈이 참 좋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사실, 『너 혼자 올 수 있니』를 받아들고 그 안의 사진을 감상하며 책상 한켠에 잠들어 있던 『눈이 오는 날』을 다시 꺼내어 펼친 건, 작가가 직접 쓴 글을 읽고싶어서이기도 했다. 『너 혼자 올 수 있니』는 작가의 사진집이기는 하지만, 직접 글을 붙이진 못 했다. 그의 삶은, 그가 생애 마지막 설경을 담는 것까지만을 허락했기에. 이에 시인 강성은이 그만의 감성이 담긴 글을 지어 사진집의 여백들을 채워주었지만, 신예 시인의 글을 만나게 되는 반가움과 기쁨도 작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전에 멀리서나마 그를 응원하고 그의 건강을 기도했던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사진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모두 전했을 테지만. 아니, 어쩌면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아무말도 하지 않아도, 그냥 사진이면, 되었을지도. 그 사진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이 읽히고, 서로의 마음이 전해진다면 더욱 좋을 테고.
내가 바라보는 눈과 지금의 내 마음을 찍어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맘과 다르게 왜곡되는 말과 행동 대신, 마음이 고스란히 보여질 수 있는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면 내가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 같았고,
사진을 보면서 외로워 보인다고 말해주면 내 외로움을 알아봐주는 것 같았다.
마음을 알아달라고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조용히 그 사람의 눈(眼)이 내 마음을 알아보는 것에 난 감동했다. _ 『눈이 오는 날』 중에서
그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작가의 마음이 이 책, 『너 혼자 올 수 있니』 속의 많은 사진들로 남았다. 이제 우리가 사진을 바라보며 '참 아름답다' 혹은 '외로워 보여'라고 말해도 '그래, 그게 바로 내 마음이야'라고 말해줄 작가가 곁에 없어 사진과 나, 오롯한 둘 만의 대화가 되었지만, 내가 어떤 눈으로 사진을 보고 어떤 감상을 남기든, 우주 저편의 그가 다 미소지으며 고개 끄덕여줄 것 같다. 그래, 맞다고, 바로 그 마음이라고.
당신이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던 것
당신이 보여주고 싶었는데
보여주지 못했던 것
당신이 껴안고 싶었는데
껴안지 못했던 것
그러나 나는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껴안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우리 영혼이 닿아 있어
모든 것이 투명합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99쪽
책 속 사진들은 참 따스하기만 하다. 분명 2월의 홋카이도는 무척이나 추웠을 텐데, 분분히 흩날려 머리에 뺨에 손등에 와 닿는 눈송이는 차가웠을 텐데, 겨우내 녹지 않고 쌓여 있는 눈들은 발끝을 시리게 만들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꽁꽁 얼어붙은 날씨나 차가운 눈송이 모두 그의 마음 필터를 통과한 뒤에는 은은하고 따스한 기운으로 화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이 그처럼 따스했던 것일까? 여행지 숙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알약 마저도, 조금 더 희망차 보이고, 그로 인해 모든 걸 떨쳐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듯한데 말이다... 차가운 눈을 사랑했지만, 눈송이가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도록 따스한 심장을 가진 이였을 것이다. 이 사진들을 찍은 이는...
이제 작가가 남긴 사진들을 더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이 사진집이 더욱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겨울을 몹시 싫어하는 나이지만, 내가 그래도 겨울을 추억할 수 있고 겨울에 애틋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건,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이 세상을 살았던, 그리하여 이 겨울의 찬기마저도 훈훈한 따스함과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긴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어느 한 사람의 사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폭설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종종 그의 사진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니까. 사진의 힘이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꿔놓기도 하는 거니까.
그가 있는 우주 저편은, 눈이 자주 내리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아무리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뜨거운 심장이 그와 함께이니까.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그는 영원히 그가 사랑하는 사진과 함께이리라. 오늘도 가만히 사진집을 펼쳐 그의 사진들과 대화를 나눠본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 기차가 달려요. 그대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가 보아요...
사람들이 내게 말했다.
어쩌다 슬픈 이야기를 하려 하면
괜찮아 다들 슬픔은 있어
어쩌다 아픈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다 나을 수 있어
어쩌다 외로운 이야기를 하면
괜찮아 누구나 혼자야. 라고 말했지
그럼 난 그냥 웃었지
어쩌다 너에게 슬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아픔이 올 때
어쩌다 너에게 외로움이 올 때
그때 넌 정말 괜찮았니?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9쪽, 이석주 블로그 글 (http://blog.naver.com/soar0108)
시들지 않는 건 없지만
영원할 순 없지만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시간은 지속된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279쪽
기억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 갑니다. _ 『너 혼자 올 수 있니』, 123쪽
그리고, 이석주 작가가 내 심장에 남긴 한 마디.
"인생에, 나중은 없더라구요."
이석주 작가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고, 군 전역 후 1년간 사진작가 조선희의 스튜디오에 출근하며 사진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 2007년부터 홍대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사진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9년 간암 투병을 선고받은 뒤에도 지치지 않는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여러 사진전들을 기획 전시했다. 충남 당진에 마련한 갤러리 겸 작업실 ‘호련’에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는 그의 이야기는 2009년 2월 KBS 다큐멘터리 <사미인곡>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2009년 9월 MBC <생방송 오늘 아침>에도 ‘말기 암 사진작가 아들의 어머니 전상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폐암까지 전이된 몸을 이끌고 홀로 겨울 홋카이도와 아키타 여행을 다녀온 후 눈(雪)에 관한 사진전을 준비하던 2010년 4월, 만 스물여덟의 나이에 하늘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