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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지극히 일반적인 이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제목,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어떤 독자를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라고 말하는 거지?
표지 그림의 우아한 노부인이 바로 그 주인공 되시겠다. 우아할 뿐만 아니라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기까지 한, 바로 영국 여왕이 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이다.
'여왕'이라는 직위 자체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지만, 책 앞에 모두가 평등한 것이지, 어찌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일까?
그건, 아마도 여왕의 본분 중 하나가 '취미를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취미에는 기호가 끼어들고, 기호는 피해야 했다. 기호에는 배척되는 사람이 있다. 여왕은 기호가 없어야 한다.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스스로 어디에 관심을 쏟아서는 안 된다.'(12) 고로 뚜렷한 기호에 포함되는 '독서'는 여왕으로서는 피해야 할 것이었고, 그런 여왕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책읽기에 빠져들었다는 것이, 그러다가 정사에 시큰둥해졌다는 것이, 역시 일반적인 일은 아닌 거다.
이 책의 초간단 줄거리는 '여왕이 독서에 빠졌다! 큰일났다!'가 되겠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왕과 그 주변의 크고 작은 변화들, 여왕의 책읽기에 특별한 조언자가 되는 인물을 둘러싼 '궁중암투' 등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책에 관해 사유하는 문장들이 이 '일반적인 독자'에게 꽤나 진지하게 사색할 시간을 마련해준다. 책읽기에 대한 여왕과 주변인물의 견해, 책읽기에서 찾아지는 즐거움, 읽는다는 것과 쓰는다는 것의 차이 등이 "그러니까 너는 책 읽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듯이 등장한다.
꽤 얇은 이야기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번 눈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공감가는 문장들을 옮기기도 하는 까닭에 자주 쉬어갔다. 물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오래 쉴 수는 없었지만!
"심심풀이? 책은 심심풀이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네. 책은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다루는 것이야. 심심풀이와는 거리가 멀어. 케빈 경, 짐은 다른 세상을 더 알고 싶을 뿐이야. 짐이 심심풀이를 원했다면 뉴질랜드로 갔겠지." (여왕)
노먼은 그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고, 깨달음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물론 그 즐거움의 일부는 깨달음에서 온다는 것을 노먼도 알고 있었지만, 의무는 그 안에 없었다. (노먼)
여왕과 노먼의 각기 다른 책읽기에 대한 견해를 보며, 나는 등장한 순서대로 여왕의 말에 공감해 밑줄을 그었다가, 다시 노먼의 말에 공감하며 거기에도 밑줄을 그었다. 굳이 '심심풀이'라는 단어를 경계로 해서 본다면, 여왕은 심심풀이보다는 다른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 목적이 있는 책읽기를 주장하고, 노먼은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다. 그 둘을 섞어 놓으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을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한 재미만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만도 아니고. 때로는 심심풀이로, 때로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서. 하지만 아무래도 내게 책읽기란 '심심풀이'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목적이 읽는 책읽기는 책을 '읽는다'라는 행위보다는 뭐랄까 '본다'라는 행위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참고서를 '읽는다'고는 하지 않으니까... 종종, 책을 왜 읽느냐라는 물음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글쎄, 내가 책을 왜 읽지?'라고 고민하면서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답을 궁리하지 못했다. 뭐, 기껏 생각한 정도가 '습관'이라는 것. 흠, '나와 책읽기'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아니아니, 그냥 좋으니까 읽으면 되는 거지 뭐, 굳이 왜 읽는지 정의 내릴 필요는 없는지도!)
책 읽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책이 초연하기 때문이라고 여왕은 생각했다. 문학에는 당당함이 있었다. 책은 독자를 가리지 않으며, 누가 읽든 안 읽든 상관하지 않는다. 여왕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독자는 평등했다. (39)
책은 누구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독자는 누구나 평등하다. (40)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려질 때, 세상은 왜 내게만 이래! 분노가 치솟을 때, '법 앞에 만민 평등'은 얼어죽을, 그 따위 말 개나 물어가라 그래!라고 외치고 싶을 때, 자자, 책 앞으로 갑시다. 책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니까. 책은 당신이 누구든 누구이지 않든(?) 사람 가리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아니니까. 당신이 친하고자 마음만 먹고 한 발짝 다가간다면 그 순간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되니까. 뭐, 이런 캠페인이라도 펼치고 싶어지는, '책 앞에 만민 평등' 문장이다. 속 시원하다.
책에 빠진 여왕으로 인해 비서관이 골머리를 앓고, 여왕이 새로 신임하게 된 조언자는 멀리 '유배' 당하고, 국민들은 '각본'에서 벗어난 여왕의 질문("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나?"와 같은)에 대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여왕의 개는 놀이 시간을 앗아간 책을 미워하기에 이르르지만, 그 무엇도 책에 빠진 여왕을 말리지 못한다. 아니, 그 끝에는 오히려 여왕이 새로이 찾고자 하는 길이 나타난다. '책을 쓰는 일은 자신의 인생을 적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는 것이다'라는 메모가 의미하는 바는, 그렇다, 여왕은 이제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쓰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발견하'기 위해서일까? 그렇다면 여왕이 발견해 내는 여왕 자신의 인생은 어떤 것일지,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의 이야기도 꽤 궁금해지는 그런 대목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작가' 이야기도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이야기만큼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여왕님, 꼭 작가로서 다시 한 번 이 독자 앞에 서주시겠어요, 네?
"책을 읽고 마음에 든 작가가 생겼는데,
그 작가가 쓴 책이 그 한 권만 있는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적어도 열 권은 넘게 있는 거예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