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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건, 작년에 한 지인이 '완소' 책이라고 추천해서였다. 단지 '완소책'까지만 듣고 다른 정보는 별달리 찾아보지 않았기에 기억속에 희미하게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한 책카페의 독서토론 모임 도서로 지정되면서, 이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내가 이미 읽은 한국 소설 한 권과, 이 책이 2월달 토론 도서였기에, 일단 구입했다.(역시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책 뒷표지의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이 책이 나에게도 '완소×100'쯤 될 책이라는 예감이!(그 예감은 아주 정확했다!)
나는 소설을 그냥 소설로 보지 못한다. 이 책과 함께 2월 토론 도서로 지정된 <위험한 독서>에 나온 내용을 빌리자면 이렇다.
'초보적인 독자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중 하나는 책의 주인공과 저자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독서법의 폐해는 정답을 찾기 위해 교사의 눈치를 보는 학생처럼 저자의 권위에 짓눌린 나머지 책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경험인가, 저것은 작가의 상상인가. 독서량이 그리 많지 않은 당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을 의식하느라 정작 자신을 읽어내지 못했다.'(김경욱, <위험한 독서> 22쪽)
딱 내 얘기가 아닌가! 나는 이 글귀에 밑줄을 백 번이라도 긋고 싶을 만큼 깊이 동감했다.(결국은 아직 '초보적인 독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한편으론 씁쓸함도.)
내 딱한 처지를 정확히 짚어주는 글을 하나 더.
'즉 소설은 정보가 아닌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지산 씨는 성암사니, 스님네들의 생활이니 하면서 제게 사실의 묘사인가라는 질문을 하시는데요, 소설은 소설의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하고는 무관합니다. 이 문제는 작가의 성실성과도 상관이 없구요. ... 소설은 공유할 만한 정보도 아니며 뉴스도 아닙니다. 다만 현실을 작가를 통하여 반영하는 것입니다. ...소설을 자꾸만 현실에 종속시키지 말란 말입니다.'(김연수,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346~347쪽)
'초보적인 독자'인 나는 소설의 주인공에 작가를 오버랩 시키느라, 또는 소설 속의 내용이 사실인가, 작가가 충분한 조사 없이 '엉터리로' 쓴 것은 아닌가, 고민하느라 소설을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고 만다. (고백하건데, 몇 년 전에 한 역사 소설을 펴낸 작가가 그 주인공과 연관된 대단히 중요한 곳을 가보지도 않고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그 책 읽기를 거부한 적이 있다! 부끄럽다.)
<소설처럼>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얘기가 너무 길었는데, 내가 어떤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을 뭐라고 분류하면 좋을지 도움을 받고자 '네이버책'에서 책 정보를 찾아보니, '책 홈 > 분야별 책찾기 > 언론/미디어/광고 > 문헌정보학 > 독서의 기술'에 있다. ('독서의 기술'이라는 분야가 따로 있는 줄 몰랐다.) 분류명 그대로, 이 책은 '독서의 기술'을 일러주는 책이다. '기술'을 알려주는 책은 책인데,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소설인지, 산문인지 그런 형식을 빌려 줄줄줄 늘어놓는다. '책 읽기'에 관한 내용을.
''읽다'라는 동사에는 명령법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사랑하다'라든가 '꿈꾸다' 같은 동사들처럼, '읽다'는 명령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15쪽)
"사랑해라!" "꿈을 가져라!"라고 명령할 수 없듯이, "책을 읽어라!"라는 명령문도 통하지 않는다. 거부 반응을 심하게 일으키니까. 책은 누군가 읽으라고 해서 억지로 읽히는 게 아니니까. 이 책이 '독서의 기술'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이러저러 해라,라고 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연금술사의 탄생'에서는 아이들이 어떠어떠한 경로를 거쳐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고, 책을 좋아하게 되며, 다시 책을 싫어하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맛깔스런 입담으로 들려주고 있다.(어찌나 재미나게 들려주는지, 이 작가의 책을 꼭 더 읽어보리라 다짐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기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61~61쪽)
다음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에서는 제목 그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지만, 역시 강압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떠어떠한 이유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의 공통된 생각은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한 책읽기를 할 것인지 등을, 들려준다.(편안하게 읽는 한 편의 수필 같다. 나는 이 책의 분류가 '에세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더러는 책은 전혀 읽지 않지만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러워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부모들도 있다. 또 소설은 읽지 않되, 실용서나 수필집, 전문 서적, 전기며 역사책은 읽는다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눈을 번뜩여가며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책을 탐독하는 부모들도 있다. '세월의 검증보다 더 정확한 비평은 없다'라는 신조 아래 고전만을 섭렵한다는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중년에 이르러 읽었던 책들을 다시금 펼쳐 읽는 부모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알고자 주로 최신간을 읽는다는 부모들도 있다.
어쨌든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모두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정말, 사람마다 책 읽는 이유도 다양하다!)
그 다음엔, '읽을거리를 주어라'이다. 여기에는 책 읽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책 읽어주는 선생님'이 등장한다. "책 읽어줄 나이는 지났다"고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잠자코 들으라며 선생님이 읽어준 책은 <향수>이다. 여기까지면 된다. 아이들은 이미 소설의 다음 내용이나, 깜빡 조느라 못 들은 내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고, 안 읽고 못배길테니까. 이후에 아이들 입에서는 이런 책 제목들이 줄줄이 나온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백 년 동안의 고독> <자기 앞의 생> <반쪼가리의 자작> <지킬 박사와 하이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그렇다고 무슨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 같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기까지 교사가 한 일이라곤 거의 없다. ... 단지 아이들은 책이 무엇이며,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잊고 있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이를테면 소설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소설은 '소설처럼' 읽혀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소설 읽기란 무엇보다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갈구를 채우는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어떻게 읽든......_침해할 수 없는 독자의 권리'이다. '독자의 권리'라니, 그런 권리가 있는 줄 몰랐다. 여기에서 말하는 10가지 '독자의 권리'란 이렇다. '1. 책을 읽지 않을 권리 2. 건너뛰며 읽을 권리 3.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4. 책을 다시 읽을 권리 5.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6. 보바리즘을 누릴 권리 7.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8.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9. 소리내서 읽을 권리 10.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보기만 해도 정말 황홀한 '독자의 권리'가 아닌가! 이 책에서 가장 내 심장을 강하게 뛰게 한 부분이자, 모든 내용을 한 글자라도 놓칠 새라, 머리에 새겨 놓을 듯이 집중해서 읽기도 한 부분이다. 차마 어느 부분부분 떼어내 옮기기도 힘들다. (책 후반을 아주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을 지경이니까!)
이 책을 덮을 때 즈음, 내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 넘쳐났다. 책에 대한 사랑,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한 사랑, 책을 읽어주는 행위에 대한 사랑,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훌륭한 책들을 만들어내는 모든 이들에 대한 사랑. 나와 책과의 사이를 한층 더 가깝게 해주는 너무나도 멋진 책이었다. 그런데 다소 엉뚱한 쪽으로 결론을 지으며 마무리해야겠다. 내내 유쾌하게 이 책을 읽다가 그만 눈물이 핑 돌아버린 한 구절이 있었다.
'...책이란 더도 덜도 아닌 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닭만큼 덧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소비되지 못한 닭이 반품되듯, '팔리지 않는' 책은 즉시 종이 재생 공장으로 보내져, 한번 읽혀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187쪽)
세상에, 이런 비참하고 슬픈 죽음이라니! 이 세상에 '팔리지 못한 닭'처럼 종이 재생 공장으로 반품되는 책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책들은 소중하니까요." (물론, 닭들도 다 팔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