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의 용의자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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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과 영화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슬럼독 밀리어네어(Q&A)』의 저자 비카스 스와루프의 신작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진작 사다가 책꽂이에 꽂아 놓고 여태 읽지 않았는데(주변에서 그렇게 재밌다고 강추를 하는데도 다른 책 읽느라 밀려버렸다!) 같은 저자의 새책은 나오자마자 잽싸게 읽어보았다.

 

요즘 나는 '재밌는 책'이 아니면 잘 읽어내질 못한다. 새벽 1시나 넘어야 겨우 책을 잡을 수 있는데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지친 머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꿈나라로 들어가시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그런 '잠의 공격'을 가장 강력하게 막아 버텨낸 책이다. 요즘 책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감기는 내 눈꺼풀을 가장 오랫동안 버티게 해준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다!! 완전 재미있다!!!(재미있지 않았으면 이 두께의 책을 결코 금세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제목 그대로 여섯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일단, 용의자가 있으니 사건이 있는 건 당연지사. 용의자가 여섯 명이나 나타난 그 사건은 일명 '비키 라이 피살 사건'이다. (인류에게 복되게도) 피살당한 비키 라이는 권력과 재력을 등에 업고 나쁜 짓을 일삼는 인간 말종이다. 루비 질이라는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그는 (당연하게도―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던가!) 무혐의로 풀려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가, 그 파티 현장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된다.(그가 천국으로 갔으리라고는 절대 상상 할 수 없다.) 그가 피살되자마자 현장은 봉쇄되고 그 자리에서 총을 가지고 있던 여섯 명이 비키 라이 살해 용의자로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여섯 명의 용의자 한 명 한 명을 집중 조명해 그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중심 사건보다 더욱 흥미로운 이 여섯 명 개개인의 이야기는 그 종착역이 모두 비키 라이가 연 축하 파티장이다. 아무런 연관도 없어보이는 이 여섯 명이 그들의 삶 어느 부분부분들에서 조금씩 얽히고설켜 있다가 결국에는 운명적인 그 장소에 모두 모이는 순간, 잠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나를 발견했다. 이제 드디어 범인이 밝혀지려는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그 긴장감과 재미와 흥분을 어찌 설명할까!

 

물론 이 책에는 단순히 이야기로서의 재미만 있는 건 아니다. 카스트 제도로 유명한 인도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이라는 게 어떻게 다른 건지가 그 유머 뒤로 아프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비카스 스와루프는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람'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가 느끼기에는) 생생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인정많고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내심 그의 인간성까지 넘겨짚어보았다. 그러고보니 인도 여행기는 많이 읽었지만 인도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 것이었다. 여행기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인도인이 소설 속에 묘사해 놓은 인도의 사회상을 맛볼 수 있음도 이 소설의 큰 매력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강추'했는지 알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이라면 망설임 없이 읽어봐야지!(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생각한다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얼마나 더 재밌을까!! 흥분된다.) 이제 더이상 다른 책에게 양보할 것 없이 다음 책으로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펼쳐 들어야겠다. 내게는 지금 '재밌는 책'이 절실히 필요하니까! 나와 같은 이유이든 다른 어떤 이유이든, 아니면 아무 이유 없든, 여하튼 재밌는 책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적극 권할테다. 이 책은 내가 '강추'한다!

 

그래서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살해 당한 비키 라이의 아버지? 인도 뭇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섹시 여배우 샤브남 삭세나? 비키 라이의 여동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 휴대전화 도둑 문나 모바일? 간디의 영혼이 몸에 들어온 모한 쿠마르? 신성한 돌을 찾기 위해 인도로 날아온 소안다만제도의 원시인 에케티? 펜팔로 만나 결혼을 약속한 인도 여인을 만나러 온 미국인 래리 페이지?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누가 비키 라이를 죽인 진짜 살해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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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살인에도 카스트제도가 적용된다. 가난한 인력거꾼의 피살 사건은 하나의 통계 수치에 불과하며 신문 한 귀퉁이에 묻혀버릴 뿐이다. 헤드라인을 장시하는 건 유명 인사의 피살 사건이다. 왜냐하면 살해된 부자와 유명 인사 이야기는 희귀 상품이기 때문이다. 코카인을 과용하거나 재수 없는 사고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별 다섯 개짜리 삶을 살면서 혈통과 재산을 잔뜩 불린 다음, 인생의 황혼 녘에 가서야 별 다섯 개짜리 화려한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다.(11쪽)

 

 

  "미친놈, 결국 진실을 기억해냈군. 내손의 별명이 갈고리다. 용의자들로부터 사실을 긁어내는 솜씨가 죽이거든."

  에케티가 뺨을 어루만졌다. "사람 때리는 걸 좋아하시나요?"

  판데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매가 없으면 범인도 없어.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지. 그러다가 결국 구장 씹는 것처럼 개똥 같은 습관이 되고 마는 거야."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때린다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다. 우린 기껏해야 약자와 가난한 자만 건드리거든. 보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형사가 의외의 고백을 했다.(414쪽)

 

 

  "인생이 다 그런 거야. 모퉁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난 청소부 아들에 불과한걸요."

  "그래서? 조니 워커는 버스 운전사였지. 라지 쿠마르는 하급 관리였고, 메무드는 택시 운전사였어. 행운의 여신이 노크할 땐 문만 보지, 그 문 뒤에 누가 있는지까지 챙기진 않아."(5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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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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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김탁환 님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소설이 아니다. 먼저 읽은 책은 『뒤적뒤적 끼적끼적 : 김탁환의 독서열전』, 이번에는 『천년습작』이다. 앞의 책은 제목에서 보여주듯이 김탁환 작가의 책읽기를 엿볼 수 있는 책이었고, 이번에 만난 책 은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김탁환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에 관한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질 읽기와 쓰기 분야에서 김탁환 작가의 책을 각각 한 권씩 만나다니, 행복한 인연이다.

 

이 강의는 총 16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마다 강의를 하기 위한 (저자가 과거에 읽었던) 대표적인 작품이 있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작가의 특강은 진행된다. 지금까지 글쓰기에 관한 책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은 내가 본 몇 안 되는 책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형식으로 글쓰기를 알려준다. 일단 '이렇게 쓰라, 저렇게 쓰라'하는 가르침은 없다. 마치 앞서 읽은 『김탁환의 독서열전』 속편인 듯, 작가가 읽은 책 이야기가 가득 펼쳐진다. 하지만 거기에 바로 '작가가 되기 위한 길'이 숨어 있다는 것.

 

어찌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습작에 열심인 이들로부터 종종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득해집니다. 아, 어쩌다가 나는 작가가 되었을까. 수많은 답이 가능하겠지만, 그중에서 저는 제가 읽은 책들이, 또 그 책들을 질투하며 베껴 쓴 시간들이 저를 작가로 만들어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중략…… 이 강의를 위해 다시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꺼내 손바닥으로 쓸어보았습니다. 삐뚤삐뚤 그어놓은 많은 밑줄이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이 밑줄들이 만든 긴 흐름의 끝에 제가 서 있는 것이겠지요. 작가란 이렇듯 항상 밑줄 긋는 자이면서 밑줄 긋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족속일 겁니다.(16~17쪽)

 

이 책 속에는 바로 그 '항상 밑줄 긋는 자'인 저자의 모습, '밑줄 긋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저자의 열정이 담겨 있고, 우리는 이를 통해 '어찌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저마다의 방향으로 찾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수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작가에 대해 '밑줄 긋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족속'이라는 정의를 괜히 내린 것이 아님을 알겠다. 그렇게 수많은 문장을 밑줄을 그으며 저자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 글쓰기 이야기를 따라가고, 작가의 방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소설의 영원한 짝꿍인 영화 이야기도 듣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강의 시간이 된다. 정말 가슴 벅찬 종강시간이다. 이 마지막 강의는 구구절절 모두 옮겨 적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김탁환 작가가 강사로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는 우리가 이 강의를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중요하다. 한 번이라도 글쓰기에 뜻을 품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나처럼 막연히 글쓰기에 어떠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이 강의를 꼭 들어볼 것을 권한다. 정말 따듯한 글쓰기 특강이다.

 

인간은 누구나 '백년학생(百年學生)'입니다. 글쓰기에 뜻을 둔 이라면 '천년습작(千年習作)'을 각오해야겠지요. 좋은 글 한편 품고 문 두드릴 그날까지 맛난 술 익히며 기다리겠습니다. 2009년 봄날 꽃 진 자리에서 김탁환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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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사랑한다 - 최병성의 생명 편지
최병성 지음 / 좋은생각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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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봄날, 엄마랑 근처 산에 산책을 갔다. 계단 틈에 꽃마리가 가득 피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어머! 꽃마리네!"

반색을 하며 허리를 굽히는 나를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뭐가 있다고 그래?"

지금 우리 발밑에 아주 작고 예쁜 꽃이 피어 있으며, 이 아이 이름은 '꽃마리'라고 내가 엄마에게 알려주었다.

함께 허리를 숙여 돌계단 틈을 쳐다본 엄마도 그제서야 어쩜 이렇게 작고 예쁜 꽃이 다 피었느냐며 좋아하셨다.

꽃마리는 아주 작은 꽃이다. 그 존재를 알고 의식해서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하지만 그 존재를 알고 나면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한 하늘색과 가운데 노란색 동그라미가 아주 귀여운 꽃이다.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알면 사랑한다'!

 

이 책은, 받아들자마자 품에 꼬옥 품었을 만큼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요즘 가장 예쁜 '짝꿍 색'이라 생각하는 초록과 노랑이 돋보이는 사진이 이 책의 띠지라는 점도 무척 사랑스러웠다.

표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을 한가득 담은 책이다.

환경운동가이자 생태교육가인 지은이 최병성 님이 숲속 생활에서 보고 느낀 점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글들이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지은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자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계절마다 때론 현란하게 때론 소박하게 자기만의 색채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숲.

봄은 진달래, 여름은 초록, 가을은 단풍, 겨울은 헐벗음이라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내 머릿속 숲의 이미지를 다채롭게 바꿔 놓아 준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서 지은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내어준다.

 

아주 작은 꽃을 보기 위해 바닥에 납짝 엎드리면서는, 이렇게 시선을 낮추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남을, 씨앗이 작은 싹을 틔우고 싹이 자라 꽃이 되고 나무가 되는 모습에서는, 우리 모두의 '씨앗' 안에는 이렇게 거대한 세계가 숨어 있음을, 늘 익숙하게 보아오던 것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나서는, 색다른 시각에서 보면 매일 같다고 생각하던 일상도 더 이상 똑같지 않음을…….

자연은 이토록 위대한 스승이다. 그 안에서 가르침을 찾는 자에게는 말이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고 깨닫지 못했던 나의 닫힌 마음과 어두운 눈길을 이 책이 활짝 열어주었다.

이 책 제목 '알면 사랑한다'가 정말 얼마나 훌륭한 가르침인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가슴 깊이 깨달았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 자연도 사람도 우리 사는 이 세계도.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 작은 도토리 한 톨 안에 커다란 상수리나무가 숨겨져 있듯이, 내 안에는 어떤 모양의 우람한 나무가 감춰져 있을까요? 새싹이 하루하루 쉬지 않고 자라듯, 나도 오늘을 참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리라 다짐합니다. 뜨거운 태양과 거친 비바람이 불어온다 할지라도 말입니다.(16쪽)

 

- 하루하루가 반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을 찾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상이 지루한 이유는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습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우리네 눈과 마음 때문입니다. 눈높이를 조금만 달리하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 곁에 기다리던 새롭고 즐거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지요.(130쪽)

 

- 씨앗에게는 자신이 뿌리 내릴 곳을 선택할 능력이 없습니다. 옥토이든 거친 자갈밭이든 한번 뿌리 내리면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다른 곳을 넘보거나 신세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에겐 그곳이 최고의 자리인 것입니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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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말이지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6
멕 로소프 지음, 박윤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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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말이지…… 끔찍한 운명을 패해 달아날 수 있다면?"

 

어느 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동생이 창문 밖으로 떨어질 뻔 한 걸 구하면서 데이비드 케이스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자칫 잘못했으면 동생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서 '운명'이라는 놈의 존재가 갑자기 엄청난 두려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만약에 그때 2초만 늦었더라면, 동생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2초. 매일의 평범한 삶과 총체적 파멸 사이에 가로놓인 건 이 2초 뿐이었다.'(10쪽)

2초라는 짧디짧은 시간으로 생사가 갈리는 현장을 겪고 보니, '끔찍한 운명'이 가져다 주는 공포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그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래서 데이비드 케이스는 운명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한다. 먼저 이름을 바꾼다. 데이비드 케이스는 이제 저스틴 케이스가 된다. Justin Case. Just In Case.

 

  내 소개를 하겠다.

  내 이름은 키스메트Kismet, 터키어다. 페르시아어로는 키스마트qismat, 아라비아어로는 키스마qisma인데, '나누다, 할당하다'라는 뜻의 카사마qasama에서 파생되었으며, '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비슷한 말로는 우연, 신의 섭리, 운명이 있다.

  운명.(28쪽)

 

운명. 저스틴이 맞서고자 하는 상대다. 책의 중간중간에 굵은 글씨체로 등장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자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저스틴을 비웃는다. 아주 잠깐의 등장이지만, 이 '운명'이 내는 목소리는 조금 섬뜩하다. '운명'이라는 게 어떤 실체가 되어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나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에 불쾌함과 두려움이 함께 치밀어 올랐다.

 

평소에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적잖이 생각하고 있는 나이기에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꾸고 외향을 바꾼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운명일까?(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가끔 "운명에 맞서라!"라는 말을 보는데, 운명은 어떻게 해야 맞설 수 있는 것일까?

 

  운명은 그저 원인과 결과가 가득한, 매 순간 하나가 다른 수많은 것들을 건드려, 무수히 많은 행위들을 촉발시키는, 무수한 도미노 현상들로 가득한 운동장일 뿐이야.(296~297쪽)

 

그렇다면 우리 앞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어느 순간에 도미노의 어떤 패가 쓰러질지도 알 수 없다.

괜히 운명을 피해 조심조심 돌아가려다가 휘잉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이 날려 옆에 있는 패를 쓰러뜨릴지도.

그게, 내가 쓰러뜨리도록 되어 있던 패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물론 더 좋을 수도 있겠고.)

어차피 복불복인가?

그렇다면, 얼마전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의 말씀대로 운명을 깨우며 쿵쾅쿵쾅 걸으련다.

네놈 따위 겁나지 않는다고, 어디 날 잡으려거든 마음껏 잡아보라고 쿵쾅쿵광!

 

이름을 바꾸고, 외면을 바꾸고, 운명을 피해 달아나는 저스틴과 함께 '도주'하며, 나도 다시 한 번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의 생명체가 번데기 상태를 벗어날 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점이, 충분히 성숙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것도 그렇다고 과거의 모습을 탈피한 것도 아닌 시점이 있다. 날개는 아직 끈적끈적하게 접혀 있으며, 빛깔도 감춰져 있다. 에메랄드색이나 군청색을 띠게 될지, 아니면 진흙빛을 띠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를 미치도록 황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소리 없는 기나긴 기다림의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만개하기를 기다리는 그 조마조마한 순간.(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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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예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고종석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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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이다.

영화로 <연인>을 만나보았을 뿐, 그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얀에게.

그냥.

하늘은 텅 비어 있다.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여러 해째다.

내가 아직 이름 짓지 않은 어떤 남자.

내가 사랑하는 어떤 남자.

나를 떠날 어떤 남자.

그 나머지는, 내 앞뒤의 일이든, 내 전후의 일이든, 나와 무관하다.

나는 널 사랑해.(21쪽)

이 책은 뒤라스가 그녀의 연인 얀에게 바치는 연서(戀書)이자,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며 쓴 유서(遺書)인 듯 하다.

책 곳곳에서 느껴지는 사랑을 향한 열정은 이 책을 쓸 당시의 그녀의 나이마저 잊게 만든다.(이 책은 그녀가 여든한 살 때 씌여진 것이라 한다.)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책을 한 번 읽고 나서(이 책은 보름 정도의 시간을 두고 두 번 읽었다.) 마침 문학 라디오에 나온 한 작가를 통해 뒤라스를 다시 만나볼 수 있었다. 그 작가는 뒤라스를 사랑해서 프랑스까지 날아갔고, 뒤라스에 몰두해서 뒤라스만 읽었다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중에 뒤라스의 연인 얀에 관한 이야기도 잠깐 나왔다. 뒤라스가 '나를 떠날 어떤 남자'라고 했던 그 남자, 얀은 뒤라스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를 추억하는 글들을 쓰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뒤라스만 보였다. 한 남자를 향한 뒤라스의 열렬한 사랑만 보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중에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이제는 얀이 느껴졌다. 짧은 편지를 써서 뒤라스를 짜증나게 만들었던 얀이지만, 이 글들의 뒤에 숨어 있는 얀의 뒤라스를 향한 사랑이 느껴졌다. 뒤라스의 죽음 이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녀를 추억하는 글을 쓰고 있는 얀의 마음을 떠올려서인지 글들이 하나하나 더욱 깊게 가슴을 울린다.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너무 일찍 죽지 않도록 힘써볼게요.

내가 해야 할 건 그것뿐이에요.(42쪽)

 

뒤라스는 여든둘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얀을 사랑했을 것이다.(일 년 새에 사랑이 식지 않았다면.) 너무 일찍 죽지 않도록 힘써보겠다는 약속이 어느정도 지켜진 것 같다. 생애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을 멋지게 해내고 떠난 그녀, 그리고 그녀의 사랑, 무척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사랑과 삶을 엿볼 수 있는 이 책을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너처럼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내가 아쉬워하는 그 무엇이지.(77쪽)

 

삶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아무도 그걸 모르지. 살려고 애써야 해.
죽음 속으로 뛰어들어선 안 돼.

이게 다야.

이게 내가 해야 할 모든 말이야.(70쪽)

이게 다예요. 이 한 마디가 주는 깊은 울림이 좋다. 그래요, 이게 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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