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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의 용의자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책과 영화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슬럼독 밀리어네어(Q&A)』의 저자 비카스 스와루프의 신작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진작 사다가 책꽂이에 꽂아 놓고 여태 읽지 않았는데(주변에서 그렇게 재밌다고 강추를 하는데도 다른 책 읽느라 밀려버렸다!) 같은 저자의 새책은 나오자마자 잽싸게 읽어보았다.
요즘 나는 '재밌는 책'이 아니면 잘 읽어내질 못한다. 새벽 1시나 넘어야 겨우 책을 잡을 수 있는데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지친 머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꿈나라로 들어가시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그런 '잠의 공격'을 가장 강력하게 막아 버텨낸 책이다. 요즘 책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감기는 내 눈꺼풀을 가장 오랫동안 버티게 해준 이 책, 정말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다!! 완전 재미있다!!!(재미있지 않았으면 이 두께의 책을 결코 금세 읽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제목 그대로 여섯 명의 용의자가 등장한다. 일단, 용의자가 있으니 사건이 있는 건 당연지사. 용의자가 여섯 명이나 나타난 그 사건은 일명 '비키 라이 피살 사건'이다. (인류에게 복되게도) 피살당한 비키 라이는 권력과 재력을 등에 업고 나쁜 짓을 일삼는 인간 말종이다. 루비 질이라는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그는 (당연하게도―유전무죄 무전유죄 아니던가!) 무혐의로 풀려났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가, 그 파티 현장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지옥행 열차를 타게 된다.(그가 천국으로 갔으리라고는 절대 상상 할 수 없다.) 그가 피살되자마자 현장은 봉쇄되고 그 자리에서 총을 가지고 있던 여섯 명이 비키 라이 살해 용의자로 붙잡히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여섯 명의 용의자 한 명 한 명을 집중 조명해 그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중심 사건보다 더욱 흥미로운 이 여섯 명 개개인의 이야기는 그 종착역이 모두 비키 라이가 연 축하 파티장이다. 아무런 연관도 없어보이는 이 여섯 명이 그들의 삶 어느 부분부분들에서 조금씩 얽히고설켜 있다가 결국에는 운명적인 그 장소에 모두 모이는 순간, 잠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인 나를 발견했다. 이제 드디어 범인이 밝혀지려는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그 긴장감과 재미와 흥분을 어찌 설명할까!
물론 이 책에는 단순히 이야기로서의 재미만 있는 건 아니다. 카스트 제도로 유명한 인도에서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이라는 게 어떻게 다른 건지가 그 유머 뒤로 아프게 그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비카스 스와루프는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상류층 사람'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가 느끼기에는) 생생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인정많고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하고 내심 그의 인간성까지 넘겨짚어보았다. 그러고보니 인도 여행기는 많이 읽었지만 인도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 것이었다. 여행기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인도인이 소설 속에 묘사해 놓은 인도의 사회상을 맛볼 수 있음도 이 소설의 큰 매력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니,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강추'했는지 알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의 책이라면 망설임 없이 읽어봐야지!(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을 생각한다면,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얼마나 더 재밌을까!! 흥분된다.) 이제 더이상 다른 책에게 양보할 것 없이 다음 책으로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펼쳐 들어야겠다. 내게는 지금 '재밌는 책'이 절실히 필요하니까! 나와 같은 이유이든 다른 어떤 이유이든, 아니면 아무 이유 없든, 여하튼 재밌는 책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적극 권할테다. 이 책은 내가 '강추'한다!
그래서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살해 당한 비키 라이의 아버지? 인도 뭇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섹시 여배우 샤브남 삭세나? 비키 라이의 여동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 휴대전화 도둑 문나 모바일? 간디의 영혼이 몸에 들어온 모한 쿠마르? 신성한 돌을 찾기 위해 인도로 날아온 소안다만제도의 원시인 에케티? 펜팔로 만나 결혼을 약속한 인도 여인을 만나러 온 미국인 래리 페이지?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누가 비키 라이를 죽인 진짜 살해범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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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살인에도 카스트제도가 적용된다. 가난한 인력거꾼의 피살 사건은 하나의 통계 수치에 불과하며 신문 한 귀퉁이에 묻혀버릴 뿐이다. 헤드라인을 장시하는 건 유명 인사의 피살 사건이다. 왜냐하면 살해된 부자와 유명 인사 이야기는 희귀 상품이기 때문이다. 코카인을 과용하거나 재수 없는 사고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별 다섯 개짜리 삶을 살면서 혈통과 재산을 잔뜩 불린 다음, 인생의 황혼 녘에 가서야 별 다섯 개짜리 화려한 죽음을 맞이하는 법이다.(11쪽)
"미친놈, 결국 진실을 기억해냈군. 내손의 별명이 갈고리다. 용의자들로부터 사실을 긁어내는 솜씨가 죽이거든."
에케티가 뺨을 어루만졌다. "사람 때리는 걸 좋아하시나요?"
판데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매가 없으면 범인도 없어.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일할 수밖에 없지. 그러다가 결국 구장 씹는 것처럼 개똥 같은 습관이 되고 마는 거야."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때린다는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점을 감추기 위해서다. 우린 기껏해야 약자와 가난한 자만 건드리거든. 보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형사가 의외의 고백을 했다.(414쪽)
"인생이 다 그런 거야. 모퉁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난 청소부 아들에 불과한걸요."
"그래서? 조니 워커는 버스 운전사였지. 라지 쿠마르는 하급 관리였고, 메무드는 택시 운전사였어. 행운의 여신이 노크할 땐 문만 보지, 그 문 뒤에 누가 있는지까지 챙기진 않아."(5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