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사랑보다 지독하다

노서아 가비 Russian coffee

 

 

한 조선 여인의 커피와 사랑과 사기에 관한 이야기.

여러 말 할 것 없이, 정말 재미있다!

첫 장을 펼치면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달려가게 만든다. 아, 중간에 몇 번 몸을 일으켜야 했다. 커피를 타러 가기 위해.

 

고종에게 매일 커피를 올리던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라 하여, 단순히 한 궁녀의 이야기인가, 생각하고 펼쳐들었다가,

조선 이름보다 '따냐'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게 들리는 '나'와 함께 러시아로 가 대단한 사기꾼 무리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매일 아침 임금에게 노서아 가비를 올리고,

'나'의 99%를 바쳐 사랑을 하기도 했다.(100%가 아니다.)

 

조선 역관의 딸이었던 그녀가 러시아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 그곳에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사기꾼이 된 이야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랑하는 남자(역시 사기꾼), 사랑을 위해 다시 돌아온 조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사랑, 그리고 결국 그녀가 택하는 것.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있게 흘러간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복선을 깨닫는 순간은 그만 머리가 아찔해지고 만다.

그리고 이내 안타까워지는 마음.

나는 노서아 가비보다도, 따냐와 이반의 사랑에 더 마음을 빼앗겼고, 그래서 슬퍼져버리고 말았다.

 

그녀와 이반의 사랑은, 아니 그녀가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얼만큼의 진실과 얼만큼의 거짓이 담겨 있는 것인가.

"아니 후회는 없어. 왕이 날 죽이든 내가 왕을 죽이든, 따냐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같으니까."

정말? 이반, 당신의 따냐를 향한 그 마음은 정말 진심인 거야?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이반의 말이 진심이길, 그러면서 한편은 또 거짓이길 바라는 마음. 결국은 다 슬프다. 

내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아프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

100%를 바쳐 사랑하지 못하는 따냐의 모습이 어쩌면 수많은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어느 것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을 저울질 해봐야 하는 사실이 슬퍼서. 

끝까지 알아낼 수 없었던 이반의 마음이 궁금해서.(어쩌면 알았지만 믿지 않았던 건지도.)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 이야기'를 찾아 펼쳐들었다가, 뜻밖의 사랑 이야기에 흠뻑 젖어버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노서아 가비는, 과연 사랑보다 지독했다.

 

 

아, 내용 외적인 이 책의 매력을 두 가지 꼽자면,

커피는 무엇이다, 정의내린 아름다운 소제목들과 커피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커피 관련 그림들이다.

커피는...

내게 커피는 무엇인가 정의내려보고 싶었지만 좀 그럴싸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서 통과.

그림 그린이는 <커피홀릭's 노트>의 저자 박상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청소년 문학 잡지 『풋,』에 연재될 때 제목 때문에 끌렸던 소설인데 연재 끝나자마자 금방 단행본으로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만나보았다.

 

주인공은 TV 뉴스를 통해 '조승희 사건'을 본 뒤, 자신의 어린 시절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마침 사건 발생 지역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고, 아마도 옛 연인이었을 H가 생각났고, 이내 입 안 가득 A1 소스의 맛이 퍼지듯, 과거 그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주인공은 치아 교정기를 끼고 얼굴에 여드름이 올긋볼긋 난, 성적도 그저그런 '찐따'이다(본인이 자기를 '찐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중학교 때는 우등생이었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 갑자기 열등생이 되어버린 '나'. 만약에 '나'가 계속 우등생이었다면, 그래서 잘난 외고 학생 이야기를 풀어놨더라면 나는 이 소설에 이렇게 공감하며 읽지 못했을 거다.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고, 성적도 별로고, 소심하면서 적당히 뒤끝도 있고, 남학생과는 콜라 한 잔 마시지도 못하는 그런 모습들이 그 나이 때 나의 모습과 많이 겹쳐지면서 진한 공감대를 형성해 주었다.

 

_ 교과서와 관련없는 딴생각은 고교생에게 금물인데 어쩌자고 내 머릿속은 재활용도 불가능한 잡다한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지 한탄스러웠다. 포클레인으로 갈아엎을 것은 우리집 마당이 아니라 쓸데없이 산만한 생각들로 가득한 내 머리통이었다.(140~141)

 

이런 문장을 그때의 내가 봤다면 당장 내 머리를 갈아엎을 포클레인을 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지금도 내 머리는 포클레인이 필요하다.) 아, 그 시절에는 그냥 공부만 하면 됐을 것을 어쩌면 그렇게 '잡생각'이 많이도 들었는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영어 문법을 외우는 시간보다 샛길로 빠지느라 더 바쁜 내 머리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렇게 그때의 내 모습을 자꾸 떠올리고 추억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밥을 먹은 후 늘 치아 교정기를 씻던 친구의 모습도 생각나고(친구도 그 치아 교정기가 부끄럽고 싫었을까?),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책상에 엎드려 눈물 뚝뚝 떨구었던 시간들도 생각나고, 하루에 몇 통씩 써대던 편지와 쪽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라면 나는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남녀공학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로맨스'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것.(나는 소설 속에서 '류성혁'이 등장하기만 하면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큰 비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큰 비중을 바랐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왔을 고교시절. 작가는 자신의 그 시절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나의 그 시절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나의 고교시절에 딱 어울릴 만한 키워드가 떠오르지 않음이 못내 아쉽다. 나는 이렇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무척 부럽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졌던 추억의 한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할 뿐, 나 홀로는 딱히 떠오르는 추억도 이야기거리도 별로 없는 탓이다. 기억력이 나쁜 건지, 정말 굴곡 없는, 그리하여 딱히 기억할 것도 없는 그런 나날을 보냈던 건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소설의 장면 장면이 내 추억의 문을 노크해주는 것이, 그래서 더욱 반갑고 고맙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1989년 봄부터 시작했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나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뉴키즈 온더블럭이나 티비 외화 시리즈 '브이'(윽,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얼굴 껍질 벗기면 튀어나오던 초록색 파충류 피부가! 으윽!)에서는 나도 반가워했지만, 내가 모르는 문화 코드가 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갑자기 내 또래 작가들이 쓴 '성장소설'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내 또래 작가라면 대표적으로 김애란이 있다.) 그러면 더 많은 추억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었던, 하지만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열일곱 살 나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어쩌면 열일곱 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다. 역대 수상작 중에서는 읽어 본 작품이 거의 없고 그나마 '최근'에 읽은 거라고는 『걸프렌즈』 한 권 뿐이라, 내게 익숙한 상은 아니지만 요즘엔 각종 타이틀의 수상작에 끌리는 편이다.

 

제목과 표지 그림에서부터 이 글의 분위기가 조금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나는 '수상작'이라는 단어를 보고(아마도 내가 '수상작'들을 오해하고 있어서) 뭔가 조금은 묵직한 글을 생각하며 책을 펴든 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의 달음질에 조금 당황하기도. 그래도 이내 표지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잡화점을 떠올릴 정도로 다양한 상품을 파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자외선 차단 팔토시와 (사그라들 줄 모르는 열기의) 금나노 칫솔, 모기 퇴치 스티커, 튼튼한 우비 등을 여러 번 본 기억이 있고,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품목만도 일회용 밴드, 옷 먼지 제거 솔, 오이써는 칼(오이 마사지용), 팝송 씨디(이건 좀 고가다), 밤 깎는 칼 등(이 외에도 다수이지만 다 기억은 못 한다)이 있다.

 

언젠가 하루는 수첩을 꺼내서 그날 만나게 되는 물건들의 목록을 적어본 적이 있다. 이런 걸 소설 소재로 써봐도 재밌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물론 내가 되지도 않게 뭘 쓰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소설가 흉내'로 메모만 해 본 거다). 그런데 이 책이 바로 '지하철 잡상인'을 소재로 쓴 글이라는 소개를 보고 두 눈이 번쩍, 당연히 읽고 싶어졌다. 내가 재밌겠다,라고 생각했던 그 이야기가 소설가의 손끝에서 어떤 글로 탄생했을지 무척 궁금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 멜로 배우에 적합하나 본인은 곧 죽어도 개그맨을 하고 싶어하는 철이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토록 바라던 개그계에서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퇴출 당한 '철이'에게 지하철 내 판매를 가르쳐 주는 스승 미스터 리, 말도 못 하고 귀도 들리지 않는 몸으로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수지, 들리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수지의 남동생)효철과 그의 신체 건강한 약혼녀 지효, 철이의 할머니이자 한 외모 하시는 왕년의 배우 조지아 킴 여사. 저마다 톡톡 튀는 '이력'들을 가지고 있는 이 등장인물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잠시 쉬어가거나 지루해 할 틈 없이 술술 흘러간다. 각 인물들의 속사정을 캐는(?) 이야기도 재미있긴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지하철 잡상인들의 일과랄까 시스템이랄까 뭐 그런 거였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조직'이 있으며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등, 지하철 판매의 뒷이야기에 귀가 솔깃. 그러나 조금 아쉽게도 이야기 중반부터는 예상치 못한 러브 라인이 형성되면서 '신종 날잡 바이러스' 이야기는 주춤한다.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것처럼 조금 더 다양하고 조금 더 많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 욕구는 충족되지 않았다.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고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슬쩍 읽고 그냥 덮어버리기에는 자꾸만 가슴 한 구석에 매달리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기에는 자꾸만 수지와 효철 남매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빛을 파는 '미스터 리'의 모습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효철을 사랑하는 지효의 모습이, 그리고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현실 속의 수많은 '철이'의 모습이 자꾸자꾸 내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그들이 자꾸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알랑햔 위선을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반성하는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함께 일었다. 비뚤어진 마음은 버리고, 그들이 팔고자 하는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마음부터 키워야겠다.

 

지하철 안에 얼마나 많은 '철이'가 있으며,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물건이 팔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인돌과 함께 놀았다 문학동네 시집 43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를 웃긴 꽃』의 윤희상 시인의 첫 시집이다.

『소를 웃긴 꽃』은 연초에, 기축년 소띠의 해에 무척 잘 어울리는 시집이라고 여기저기에 추천을 했을 만큼 내가 무척 좋아하는 시집 중 한 권이 되었는데, 시인의 다른 시들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거의 1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만나보게 되었다.

 

시인의 외가가 밀양인가? 무척 반가운 시를 만났다.

 

아빠가 나주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엄마가 밀양 사람이라서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배와 밀양 감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 너는 좋겠구나 //

나주 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나주 배를 가지고 오셨구나 / 밀양 외할아버지가 / 너를 만나러 오시면서 / 밀양 감을 가지고 오셨구나 //

나주 배와 / 밀양 감을 먹고 / 예쁜 똥을 싸면 / 먼 뒷날 똥 끝에서 자운영 꽃이 핀단다 //

너는 좋겠구나 / 자운영 꽃을 볼 수 있어서 //

온 들판에 / 자운영 꽃이 피면 / 너는 좋겠구나

('너는 좋겠구나')

 

친가가 밀양이고, 청소년기를 밀양에서 보낸지라, 지나가다 '밀양'이란 글자만 봐도 반갑다. 그러니 이 시를 읽다가 급 반색을 하며 얼마나 좋아했던지. 밀양 감, 참 맛있었는데. 얼음골 사과도. 나주 배와 밀양 감을 먹고 '예쁜' 똥을 싸면 자운영 꽃이 핀다니! 올 봄 마당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자운영 꽃이 떠오르며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내년에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자운영 꽃을 보면, 나는 이 시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나주 배'와 '밀양 감'이 떠오르면 다행(?)이겠지만, 왠지 '예쁜 똥'이 먼저 떠올라 재밌어 할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10여 년 전에 읽었던 책을 / 다시 읽다가 그때 내가 / 밑줄을 그어놓은 글을 우연히 본다 / 그런데, 내가 왜 / 그 글 밑에 줄을 그어놓았는지 / 모르겠다 ('세월도, 마음도 흐른다')

 

10년은 커녕 지난해, 아니 몇 달 전에 읽은 책만 뒤적여봐도 세월이, 내 마음이 흐른 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많다. 한 자 한 자 공책에 정성스레 옮겨 적었던 글을 보면서, 그땐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이리 정성스럽게 적어 놨던가 의아하기도 하고, 반대로 아무 흔적도 남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지금 내 마음에 파바박 와 닿는 글귀를 보며 그때는 어찌 이런 글을 그냥 지나쳤을까, 놓칠새라 얼른 밑줄을 그어놓기도 하고. 이 시집을 나중에 다시 들춰보면 또 세월의 흐름을, 마음의 흐름을 느끼게 되겠지? 하지만 10년 뒤에 봐도 이 시에는 여전히 밑줄을 그을 것 같다.

 

처음도 끝도 / 길 위에 있으니, / 처음도 끝도 길이다 //

길 위의 코스모스 / 길 위의 사루비아 / 길 위의 맨드라미 //

그러니, / '길을 놓치지 말 것' ('길에서, 아들에게')

 

길을 놓치려 하고 있는 내 마음에 조용히 던져주는 조언. 어떤 글인가를 만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게,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이 시집도 나의 스승으로, 이 시집과의 만남도 소중한 인연으로 가슴 속에 간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이 스며드는 아침 - 제13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양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학 스타 번역가 김난주 님의 번역, 유서 깊은 아쿠타가와상 139회 수상작. 이 두 가지를 빼고는 이 소설은 '중국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양이는 중국 하얼빈 출신으로, 아버지가 문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아픈 과거가 있으며, 후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 중국인이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학 작가로 데뷔했지만, 그가 쓴 이 소설은 다만 일본어로 씌여졌다 뿐, 중국인이 중국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쓴 중국 소설인 것이다.

 

올해는 '톈안먼 사건(천안문 사건)'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끌렸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천안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통해 민주화 운동에 대해 논할 깜냥이 내게는 없다. 그러므로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얼마 전 공선옥 작가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었을 때의 슬픔이 떠올랐고,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비슷한 사건을 소설로 어떻게 풀어내었는지 궁금했다.

 

한 마을의 절친한 친구 씨에 즈챵과 량 하오위엔은 나란히 친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꿈으로 가득 찬 대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생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민주화가 뭔데?" 또는 "난 자본주의가 뭔지,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는 또 뭔지 전혀 모르겠는데." 모든 게 희미하기만 하던 그들의 가슴에도 민주화를 향한 불길이 일어나게 된다. "반부패, 반부정!"을 부르짖으며 언젠가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한다는 것에 가슴 깊이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인 5월 말 이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모여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여기까지 읽고는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5월 말이다. 곧 6월이 올 것이고, 곧 그 현장이 재현될 것이다. 책장을 계속 넘기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의외였다. 한껏 긴장감을 고조시킨 뒤, 소설은 예기치 못하게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베이징을 떠나 자신들의 학교로 돌아갔고, 한창 잠에 취해있던 새벽녘에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교수에게서 이 한 마디를 들을 뿐이다. "장갑 부대가 천안문 광장을 장악했다."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 소설은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다. 혹시나 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책을 끝까지 읽어나갔지만 역시 거기까지였다. 처음에는 황당했다. 왜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갑자기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말을 하는 건지 당황스러우면서 그만 김이 새버렸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멍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며칠 씩이나 걸려서야!)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그만 가슴이 서늘해졌다. 천안문 광장,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지 않았다고 해서 누가 감히 그들을 방관자 혹은 제3자 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들 모두 어떤 입장에서건 모두 그 역사를 함께 겪은 '주인공'이고 모두가 '피해자'일 것을.

 

학교로 돌아온 그들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한다. 하지만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시러 갔다가, 그들과 합석한 어른들이 학생 운동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많았다며 푸념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울분이 치밀어 올라 싸움판을 벌이고 만다. 그 일로 둘은 퇴학 처분을 받고, 량 하오위엔은 일본인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고, 씨에 즈챵은 공방을 차린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는 씨에 즈챵과 달리 량 하오위엔은 일본에서도 여러 경로를 통해 조국을 위한 '운동'을 하지만, 그의 '동지'들 마음속에는 '조국'이 아니라 다른 '속셈'이 있음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누구는 비자를 얻기 위해, 누구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그들은 애국심을 이용할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친 일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이후 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릴 큰 일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먹고 사는 데 방해가 되는 일, 또는 훗날 개인의 영리를 위해 이용되는 일 정도밖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이 책을 보며 절실히 깨달았다. 그들에게 왜 조국의 민주화 앞에서 사사로이 생업 따위나 운운하느냐고, 어째서 조국을 위한 일에 자신의 사업 따위나 끌어들이느냐고 뭐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역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적인 장면'이었을 뿐임을 부정할 수없는 것이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도 1989년 6월 4일, 뜨거웠던 그날의 천안문 광장이 아니라, 그 역사가 지난간 후의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볼 따름이다. 가슴 깊이 조국을 향한 짝사랑을, 아픈 상처를 입고 사는 사람들. 반면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들도. 그 뜨거웠던 순간이 역사가 되어버린 뒤,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 책 내용과 상관없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책값이 영 비싼 것 같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겠다. 쪽수에 비례해서 가격을 매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170쪽의 얇은 책에 12,000원은 어쩐지 좀 비싼 느낌이다. (몸값 높은)스타 번역가의 번역이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이 없는 게 더더욱 아쉬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