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청소년 문학 잡지 『풋,』에 연재될 때 제목 때문에 끌렸던 소설인데 연재 끝나자마자 금방 단행본으로 나와서 기쁜 마음으로 만나보았다.

 

주인공은 TV 뉴스를 통해 '조승희 사건'을 본 뒤, 자신의 어린 시절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마침 사건 발생 지역에 있는 친구가 생각났고, 아마도 옛 연인이었을 H가 생각났고, 이내 입 안 가득 A1 소스의 맛이 퍼지듯, 과거 그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주인공은 치아 교정기를 끼고 얼굴에 여드름이 올긋볼긋 난, 성적도 그저그런 '찐따'이다(본인이 자기를 '찐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중학교 때는 우등생이었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 갑자기 열등생이 되어버린 '나'. 만약에 '나'가 계속 우등생이었다면, 그래서 잘난 외고 학생 이야기를 풀어놨더라면 나는 이 소설에 이렇게 공감하며 읽지 못했을 거다. 자기를 못났다고 생각하고, 성적도 별로고, 소심하면서 적당히 뒤끝도 있고, 남학생과는 콜라 한 잔 마시지도 못하는 그런 모습들이 그 나이 때 나의 모습과 많이 겹쳐지면서 진한 공감대를 형성해 주었다.

 

_ 교과서와 관련없는 딴생각은 고교생에게 금물인데 어쩌자고 내 머릿속은 재활용도 불가능한 잡다한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지 한탄스러웠다. 포클레인으로 갈아엎을 것은 우리집 마당이 아니라 쓸데없이 산만한 생각들로 가득한 내 머리통이었다.(140~141)

 

이런 문장을 그때의 내가 봤다면 당장 내 머리를 갈아엎을 포클레인을 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물론, 지금도 내 머리는 포클레인이 필요하다.) 아, 그 시절에는 그냥 공부만 하면 됐을 것을 어쩌면 그렇게 '잡생각'이 많이도 들었는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영어 문법을 외우는 시간보다 샛길로 빠지느라 더 바쁜 내 머리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렇게 그때의 내 모습을 자꾸 떠올리고 추억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밥을 먹은 후 늘 치아 교정기를 씻던 친구의 모습도 생각나고(친구도 그 치아 교정기가 부끄럽고 싫었을까?),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책상에 엎드려 눈물 뚝뚝 떨구었던 시간들도 생각나고, 하루에 몇 통씩 써대던 편지와 쪽지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라면 나는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남녀공학에서 벌어질 수 있었던 '로맨스'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것.(나는 소설 속에서 '류성혁'이 등장하기만 하면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큰 비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큰 비중을 바랐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왔을 고교시절. 작가는 자신의 그 시절에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는 나의 그 시절을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 봤지만 나의 고교시절에 딱 어울릴 만한 키워드가 떠오르지 않음이 못내 아쉽다. 나는 이렇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무척 부럽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잊혀졌던 추억의 한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할 뿐, 나 홀로는 딱히 떠오르는 추억도 이야기거리도 별로 없는 탓이다. 기억력이 나쁜 건지, 정말 굴곡 없는, 그리하여 딱히 기억할 것도 없는 그런 나날을 보냈던 건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소설의 장면 장면이 내 추억의 문을 노크해주는 것이, 그래서 더욱 반갑고 고맙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1989년 봄부터 시작했다. 그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아마 나보다 더 많은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뉴키즈 온더블럭이나 티비 외화 시리즈 '브이'(윽, 아직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얼굴 껍질 벗기면 튀어나오던 초록색 파충류 피부가! 으윽!)에서는 나도 반가워했지만, 내가 모르는 문화 코드가 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갑자기 내 또래 작가들이 쓴 '성장소설'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내 또래 작가라면 대표적으로 김애란이 있다.) 그러면 더 많은 추억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었던, 하지만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열일곱 살 나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어쩌면 열일곱 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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