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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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나에게도 '삶이 주는 선물' 같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삶을 즐기지도 사랑하지도 못 하는 나에게도, 삶이 선물이라는 걸 주다니, 그럴 때는 삶이라는 게 아주 팍팍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가끔은 관대하기도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가을에 만나는 김연수 작가의 책은, 바로 (아주 가끔이나마)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눈물나게 반가운 존재다.

다른 계절도 아닌 가을에, 그것도 삼 년 연속 김연수 작가의 책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이지, '선물' 아니면 '축복'이겠지!

 

이는, 가을을 유난히 못 견뎌하는 나의 습성(?) 때문이기도 한데, 내가 사랑하는 계절 여름이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여름을 만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기나긴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가을만 되면 온몸의 기운이 쫘악 빠져나가는 내가, 김연수 작가의 책 덕분에 가을을 기다리고 가을을 행복하게 보내게 되는 것이다. 올해에도 가을을 기다린 단 하나의 이유는, 김연수 작가의 새 소설집이 가을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역시 내게는 선물, 아니면 축복!

 

핑크빛 아름다운 이 소설집에는 모두 아홉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해, 이미 만나본 적 있는 소설도 여럿 있었지만,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온 후에 읽는 느낌은 첫만남처럼 새롭고 신선하기만 했다. 게다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아홉 소설 읽어 '안 재밌는' 소설 없었다. 가장 좋았던 어느 한 편을 꼽기가 힘들 정도로, 이번 단편집은 아홉 편 모두가 어찌나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던지. 나는 9월의 절반 정도를 이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보냈다. (이 책을 받아들고 두 번 읽었는데, 처음에는 궁금하여 단숨에, 그 다음에는 한 편 한 편 조금 더 공을 들인 데이트를.) 이 '여자친구'는 참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분홍빛 입술로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들에, 나는 아직 내년 여름을 만나려면 한없이 지루한 세 계절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기로 해 버렸다. 여름이 아직 멀었으면 어때, 내게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있는데.

 

책 읽기가 무척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책이 내 안에서 불러 일으키는 추억,을 만나게 될 때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 안에 그런 추억들이 숨어 있는 줄 몰랐다. 그 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자카란다나무의 추억이었다.

 

보랏빛 자카란다 꽃이 만개한 앞에서 사진을 찍어 내게 선물을 했던 이가 있었다. 사진 뒤에는, 꼭 자카란다 꽃이 피면 이렇게 사진 찍어서 하나 보내달라는 메모와 함께 작별 인사가 적혀 있었는데, 십 년 전의 추억이 담겨 있는 그 사진을 케이케이 덕분에 떠올리고는 앨범을 뒤적여 찾아냈다. 아, 이렇게 보랏빛이 찬란한 나무였지, 자카란다는. 결국 나는 자카란다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지 못했고, 이후로 '자카란다'라는 단어를 떠올려보지도 못 한 채 십 년을 보냈지만, 케이케이의 집 근처에 있던 그 자카란다나무는 나를 십 년 전 추억 속으로 이끌어주었다. '나'는 자카란다나무 아래에서 케이케이를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나는 자카란다나무 사진을 보며, 그녀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해본다. 그리고 다시 그곳에 가서 자카란다나무를 볼 수 있기를……

 

그리고 마치 서른의 내게 주는 특별 선물인 것만 같았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나의 서른에 이런 소설을 선물해주는 김연수 작가를 어찌 아니 사랑할 수 있겠는가, 라며 굳이 끼워맞추자면 그렇게 끼워맞춰서라도 또 하나의 행복을 맛보고야 만다. 이 소설에 담겨 있는 김연수 작가의 '쓸데없는 눈물'이 결코 쓸데없지 않다는 것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없을지 몰라도, 이 지구 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움직인 게 바로 내 마음이라는 것을 보며 느꼈다.

 

나의 하루 1440개의 조각이 어딘지 모르게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다. 이제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김연수 작가가 꾿빠이, 이상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정말 그는 소설가를 그만 두었을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제 그의 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김연수 작가의 '여자친구'는 참 아름답다! 그치?

 

 

_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그 여자친구를 찾아가서 시인이 당신을 무척 사랑했노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예요.(79)

 

_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우리의 꿈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뤄지지 않은 소망들은 모두 그처럼 대단한 것들이었다.(95)

 

_ 이렇게 거대한 도시에 사는 한, 하루에 두 번씩 평생 택시를 탄다고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같은 택시를 탈 수 없는데, 그런데도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107)

 

_ 좋은 술과 후회 없는 인생이란 그런 풍토에서 빚어지는 것. 술과 인생은 무더운 여름날 꺼내놓은 생선과 같으니, 그 즉시 음미하지 않으면 상해버리고 만다.(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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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날아온 맛있는 편지
정세영 글.그림.사진 / 이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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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잠깐, '스페인'이란 글자만 보면 넋을 놓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스페인에 설렐 일은 없어졌지만, 그때의 '버릇'은 오래가는지 여전히 '스페인'이란 글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었다.

 

먹어본 건 많이 없어도 세계 요리에는 항상 많은 관심이 가서, 언젠간 저 요리들을 먹어보러 꼭 여행을 떠나리!라는 다짐도 하곤 하는 나.

스페인 요리 역시 내겐 낯선데, 이 책을 통해 열세 가지 스페인 요리를 만나볼 수 있다니, 읽기도 전부터 맛있다.

 

책 제본이 무척 독특했다. 제목에 '편지'라는 단어가 들어가더니, 정말 그에 딱 어울리는 제본이다.

마치 엽서 박스처럼 생긴 이 책의 앞면은 위에 올린 사진과 같고, 뒷면은 바로 주소를 적어서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맛있는 편지'가 보내고 싶어지면 이 책을 사서 그대로 주소만 적어 보내면 되겠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나는 이 작고 예쁜 책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제목의 모든 단어가 나를 사로잡은 셈이다.

스페인, 요리, 편지.

 

이 책을 쓴 정세영 씨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사진과 요리를 배워 한국에서 '알바이신'이라는 스페인 레스토랑을 경영하고 있다 한다.

'간단하고 맛있으면 된다'는 저자의 요리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이 책에는,

'간단하고 맛있는' 열세 가지 음식의 소개, 레시피, 그리고 음식에 대한 추억 한 자락이 담겨 있다.

 

먼저 낯선 스페인 음식에 대한 소개를 들은 후에, 바로 저자의 독특한 레시피를 만나게 되는데,

이 '요리책'의 최대 특징이자 장점이라면, 절대 거들먹거리지 않는 레시피를 싣고 있다는 것!

명색이 '레스토랑 경영자'인데, 절대 어깨에 힘주고 어려운 용어와 정확한 계량으로 요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쉽고 간단하게 따라할 수 있도록,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굉장히 재미있게 설명해준다.

 

제일 처음에 나온 요리는 '해물 빠에야' 였는데, 이런 문장들을 만나고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욕재계한 재료에 칼질 / 오징어는 껍질을 벗겨 누드로 / 여러분 성격대로 자릅니다 / 바지락과 홍합을 모셔오세요 / 바지락과 홍합이 하품할 때까지 끓입니다 / 마늘의 양 역시 여러분 개성에 따릅니다 / 레몬을 예쁘게 잘라 성격대로 토핑하세요

 

아, 이런 깜찍하고 참신한 레시피라니!!

요리책을 펼쳐놓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책에 적힌 대로, 감자는 큰 거 하나, 양파는 중간 거 두 개, 기름은 몇 스푼, 아 그런데 이거 100g은 어떻게 확인하지? 재료 준비에서부터 '정석대로' 하기 위해 상당한 애를 먹고, 재료의 분량이 잘못되면 실패할까봐 조마조마하곤 했는데, 이 책은 뭐든지 '여러분 개성'에 맡긴다. 그러니까, 나처럼 '개성 없는' 사람은 처음에 뭘 얼만큼 넣어야 할지 몰라 상당히 고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몇 스푼, 몇 그램 따지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일단 요만큼 넣어보자! 내 마음껏 요리할 수 있으니 속 편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초대한 '귀찮은 단계는 다 뛰어넘고 가장 심플하지만 가장 맛난 요리의 세계'에 홀딱 반해버렸다!

 

이 책에 나오는 요리는 정말 다 집에서 쉽게 해먹을 수 있을 듯 하다.

구하기 어려운 재료를 준비하라고도 하지 않고, 값비싼 조리 기구도 필요 없다.

그저 이 '심플한' 안달루시아 요리를 맛보고 싶다는 애정과, '이까이꺼 나도 할 수 있겠군!'이라는 자신감만 있으면 준비 완료!

 

이렇게 마음에 쏘옥 드는 레시피와 함께 실려 있는 짧막한 에세이들은 때론 코믹하고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진지했다.

굶주림과 '누드' 때문에 고생한 소풍 이야기를 읽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1965년 생인 저자와의 재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딱 하나 남은 1965년산 셰리주를 열어 환영해 주는 '스페인 처녀' 이야기에서는

그만 감동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정말 행복하고 맛있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과 그림을 모두 직접 쓰고 찍고 그린 저자의 다재다능함이 무척 부럽기도 하고,

그런 재주를 맘껏 발휘하여 이처럼 사랑스러운 책을 만들어 주었음에 무척 고맙기도 했다.

언젠가 저자가 경영한다는 스페인 레스토랑에 가서, 저자가 소개해 준 음식들을 맛보고 싶다.

 

 

_ 자, 1965년산 셰리주가 포도주 저장고에 딱 한 병 남아 있었다니, 오늘 이걸 마시면서 우리 기적같은 재회를 기념하자.

  이제 우리 집에는 1965년산 셰리주가 한 병도 남지 않겠지만, 마지막 병을 너와 함께 비웠다는 기억만은 영원히 남지 않겠니?(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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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
신예희 글.그림.사진 / 시그마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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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배고프면 화가 난다.(화,라기 보다는 기분이 좀 가라앉는다고 해두자.)

요즘은 덜 하지만,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이 내가 슬슬 언짢아지는 기색을 보이면 일단 밥부터 먹자고 식당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배고프면 화가 난다’는 것 외에 더 어떤 공통점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여튼 엄청난 반가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궁금한 것은 무조건 입에 넣고 보는 그녀, 지은이 신예희가 들려주는 음식 여행!

책을 읽다가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 책 아주 못쓰겠구만!!’하면서 성을 냈다.

정말이지, 가만히 방에 앉아서 보기에는 정말 너무너무 괴로운 책이었다.

책 속에는 온통 맛있는 음식 천지였으며, 그 음식 맛을 나타내는 그녀의 글은, 글자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달달하고 향긋했으며, 사진들은 당장 뜯어먹고 싶도록 예쁘게 찍혀있었다.(마카오식 에그타르트, 정말 사진을 오려서 한입에 꿀꺽 하고 싶었다!)

내가 이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 그 나라에 있지 않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고 슬펐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지에서도 맥도널드나 피자헛같은 ‘검증되고’ 친숙한 곳을 찾아가 끼니를 때우려는 사람이 있고, 현지 음식점을 기웃거리며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음식들을 먹으려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이고, 지은이도 당연히 후자이다.

중국에 가서는 같은 테이블의 한국인 모두가 거부한 ‘왕번데기’를 용감하게 먹기도 했고(이 왕번데기가 뭔지 아는 사람은 나랑 안 놀려고 할지도!), 왕푸징 거리에서 만난 전갈 꼬치 앞에서 용기를 내어보기도 했다(용기만 냈다). 하지만 정작 먹어본 현지 음식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안타깝게도 나와 함께 여행한 친구들은 대부분 여행지에서도 맥도널드를 찾는 쪽이었다. 역시, 여행은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과!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 참 많이도 날아다녔다.

날아가며 먹는 기내식부터 시작해서 홍콩&마카오, 스페인, 터키, 태국, 일본에서 만난 먹을거리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준다.

홍콩에서 만난 애프터눈 티는 '영국식으로다가 우아하게 애프터눈 티 한잔'을 '죽기 전에 꼭 해볼 일' 목록에 적어 넣게 했으며, 갑자기 튀어나온 '샹차이' 사진에 흠칫 놀라 몸을 떨기도 했고(이 책에는 그 이름이 '코리앤더'라고 나와서 미처 마음의 준비를 못 했다!), 상상만 해도 뒷골이 당기는 달달한 스페인 초콜라떼가 먹고 싶어 애꿎은 초콜릿만 열심히 먹어댔으며, 터키의 커피집 카흐베하네에서 공주병에 걸려보고 싶기도 했고, 태국의 열대과일들이 눈에 밟혀 사진을 보며 '이건 무슨 맛' '저건 무슨 맛' 입맛을 쩝쩝 다셨다.

 

모든 여행자의 가슴에는 나름대로의 꿈과 목표가 있다.

나도 이런 여행도 해보고 싶고 저런 여행도 해보고 싶은데, 언젠가 꼭 한번은 이렇게 음식만을 위한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책을 덮었어도, 눈앞에는 책속에서 본 맛있는 음식들이 어른어른 떠다닌다.

당장 떠나지 못할 나에게는 정말 잔인한 책이다!

아, 정말 달달하고 맛있고 향긋하고 행복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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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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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박민규 작가의 장편소설이었다.

단편소설도, 2009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절'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으므로,

나는 이 책이 박민규 작가와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라는 생각에, 약간은 설레고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처음에는 무언가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들며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조금 두께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여러 날을 투자하여 읽어야 해, 힘들었다.

하지만 뒷부분에 가서는 다른 이유로 힘들었다.

그녀의 편지가, 그녀의 슬픔과 괴로움이, 그녀와 그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를 힘들고 아프게 했다.

그리고 밤을 새 나머지 부분을 다 읽게 만들었다.

 

슬프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자꾸 내 모습을 떠올렸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으로 심하게 시달렸던 사춘기 시절, 외출 해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도 싫었던 어느 여름날...

 

그녀의 편지에서,

'진정한 고통은 그것이었어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 누구도 날 사랑해 주지 않을 거란 절망감...'

'세상에서 가장 큰 비웃음을 사는 일이 무언지 아세요? 아름다워지겠다고 발버둥치는 못생긴 여자의 '노력'이랍니다. 다 쓰러져가는 철거민의 단칸방을 허물고 불태우듯... 세상은 못생긴 여자의 발버둥을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저는 분명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입니다.'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눈물 방울을 툭 떨구며 청승을 떨어야했던 건, 나도 '세상이 만들어낸 장애인'이란 생각으로 이 가혹한 세상을 힘들어 한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슬프게도!

 

이 책을 통해, 지난 어느 여름 날, 내 가슴에 남겨졌던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슬픈 과거를 떠올리게 한 책이었고, '스무 살'을 추억하게 한 책이었으며, '생활'이 아닌 '삶'을 갈망하게 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꽤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여러 날에 걸려 힘들게 읽었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나는 지금 이 책이 무척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다시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며칠 후 참석하게 될 작가와의 만남이 무척 기대된다!

 

 

_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손을 더 꼭 쥔 채, 그저 나는 걷기만 했다. 스무 살은... 그런 나이였다.(11)

 

_ 아무 일 없이, 아무 일 없는 듯 돌아오던 새벽의 골목길에서

  그리고 인간은

  실패작과 성공작을 떠나, 다만 <작품>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 형은 작품이에요... 그리고 나도 작품이에요. 인간은...작품이에요.(152)

 

_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193)

 

_ 추억이란 이런 것이다. 결국 인간의 추억은

  열어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물이 담겨 있는 녹슨 상자와 같은 것이다.(346)

 

_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기적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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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나요? 내 첫사랑들 - 외로움도 안나푸르나에서는 사랑이다
이종국 지음 / 두리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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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행서, 라기 보다는 사람과 사랑이 가득 담긴 에세이집의 느낌이다.

방송 다큐멘터리 PD인 지은이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찾은 네팔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그들에게 안부를 묻는 책, 그들의 안부가 담긴 책.

그래서인지 책 속의 글자들은 다 조금씩 촉촉해 보인다.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나, 톡 건드리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글자들.

 

지은이는 네팔에서 운명적인 여인 디빠를 만나고, 이후 그녀를 위해 몇 차례 더 네팔을 찾아간다.

디빠를 향한 지은이의 마음과, 가까이 닿을 듯 멀어질 듯 한 서로의 마음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함께 두근두근한다.

하나의 심장으로 여러 번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 남자와,

하나의 심장으로는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네팔 여자.

서로 다른 사랑의 가치관을 보며, 특히 내 심장의 주인공은 평생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 네팔 여인의 사랑관 앞에서,

나도 잠시, '사랑'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한 사랑이 끝나면 다른 사랑이 찾아오고, 그렇게 새로운 사랑을 이어간다는 한국 남자의 말도,

어떻게 한 생애에서 여러 번의 사랑이 가능하느냐며 마음의 순결을 강조하던 네팔 여자의 말도,

다 수긍이 가니, 사랑이란 것은,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는 것만으로도 참 머리가 아프고 묘한 존재다, 라는 생각만 하고 말았다.

 

이 책에는 디빠 외에도, 네팔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가 가르치고 함께 사진전도 열었던 네팔의 아이들, 그를 형이라고 하며 깊고 진한 형제애를 나눠 준 라마, 디빠를 향한 그의 마음을 개방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여준 디빠의 아버지 어디꺼리 씨, 이 모든 일들이 생기도록 인연의 장을 열어 준 한국인 부부 '버선띠'과 '빌 바둘'...

그들과 함께한 네팔 이야기가 차분하고 담담한, 그러면서도 미처 감추지 못한 강한 그리움이 배어나는 문장들로 내 가슴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다.

버선띠와 빌 바둘은 아직도 누군가를 위해 봉사 하며 위하는 삶을 살고 있겠지?

디빠는 그녀 평생 단 한 번 있을 사랑의 대상을 만났을까?(그게 지은이가 되길 나도 함께 바랐는데...)

아이들은 그에게서 배운 영어와 사진을 잊지 않았겠지? 그 경험을 자양분으로 해서 더 밝고 씩씩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되길.

네팔에 가면, 멋진 가이드 청년 라마를 만날 수 있을까? 나중에 네팔에 갈 일이 있으면 꼭 그에게 가이드를 받아야지.

 

그런데 제목에 자꾸 시선이 머문다.

잘 있나요? 내 '첫사랑들'...

첫사랑들...

'첫'은 늘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첫사랑' 뒤에 붙은 복수형 접미사 '들'이 계속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혹시, 디빠와 서로 엇갈렸던 그 사랑관 때문에 지은 제목일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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