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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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올해 출간된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감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이 책을 추천받았다.

그 전에도 여기저기서 재밌다며 추천하는 글을 보긴 했지만, '야구 이야기'라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절대 읽을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좀 흔들렸다.

뭐, 축구 몰라도 <아내가 결혼했다> 재밌게 읽었는데,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역시 야구 몰라도 읽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당연하지!

야구 몰라도 읽을 수 있는 책이었고, 야구 몰라도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었고(야구 알면 더 재밌겠더라만...), 야구 몰라도 감동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책이었다.

괜히 야구 이야기라고 멀리 했던 시간들이 아쉬웠다. 이런 책은 진작에 만났어야 했는데.

 

(그런데 정작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아쉬운 것은 내가 야구를 모른다거나 이 책을 늦게 만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책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내가 강추를 하며 지인에게 이 책을 선물해버렸다는 거다.

독후감을 쓰려니 책이 옆에 없어서 밑줄 그은 문장을 옮기지도 못하겠고, 심지어는 등장인물의 이름도 적지 못하겠으니 이거 원...)

 

어린 시절, 삼미슈퍼스타즈의 어린이 팬클럽 회원이 되어 삼미슈퍼스타즈와 함께 울고 웃으며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우리의 주인공.

삼미슈퍼스타즈는 몇 년 못 가 사라졌지만 주인공('나'였던가?)의 인생에 오래도록 그림자를 드리운다.

삼미슈퍼스타즈가 몇 년 못 가 사라졌으므로, 이 책에 삼미슈퍼스타즈가 등장하는 쪽수도 그리 많지 않다.

책 전체의 1/3쯤 될까?

그렇게 해서 전반부는 삼미슈퍼스타즈와 함께한 청춘의 시간들, 후반부는 그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들 이야기인데,

야구의 '야'자도 모르면서, 삼미슈퍼스타즈가 등장하는 전반부가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이건 순전히 박민규 작가의 그 탄복할 만한 글맛 때문인데, 나는 정말 그 전반부는 특히 앞으로 우울 할 때마다 페이지가 너덜거리도록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그 프로그램을 봐도 '이건 뭐야?'라는 표정으로 일관하는, 모 프로그램의 '박명수를 웃겨라'라는 코너는 '원주를 웃겨라'로 바꿔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간혹 하는, 참 웃음에 야박하게 구는 나인데, 이 책 읽으면서는 혼자 미친듯이 참 많이도 웃었다.

책 읽으면서 이렇게 폭소를 터뜨려본 게 얼마만이던가.

아아, 지금 당장이라도 또 펼쳐 읽고 싶다.(할 수 없다, 다시 사야지. 쓰읍...)

 

물론 그런 재미 외에도 후반부에서 느껴지는 감동들도 결코 적지 않았지만,

내게 이 책은 그런 재미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게 그런 폭소를 선물해준 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은 내 책꽂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자격이 충분하다.

아, 행복하다. 이제 앞으로 우울할 때면 이 책을 펼치면 되니까 미처 우울할 시간도 없을 것 같다.(아, 얼른 다시 사야지. 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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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지침서 (양장)
쑤퉁 지음, 김택규 옮김 / 아고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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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처첩성군', '이혼지침서', '등불 세 개'

이렇게 세 편의 중편 소설이 실린 책이다.

 

'처첩성군'은 공리 주연의 영화 '홍등'의 원작 소설인데, 마침 '홍등'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지라,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동시에 영화 필름도 돌리는 경험을 오랜만에 해봤다.(나는 워낙 영화를 잘 안 봐서, 영화화 된 소설이 있다면 소설을 읽을 뿐, 소설과 영화를 다 보는 경우는 참 드물다. 게다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는 경험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사랑과 영혼'이었고.)

책만 읽었다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는데,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읽은 '처첩성군'은 아, 정말이지 대단했다.(이건 영화의 영향이 꽤 큰 것 같기도 하고.)

문장 하나하나에 되살아나는 영화속 장면들. 소설 '처첩성군'은 영화만큼 내게 큰 떨림을 남겨주었다.

아, 그 감흥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아무튼 문장과 영상이 동시에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를 휩쓸어버렸다.

영화와 비교했을 때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 속에서 내게 무척 인상 깊었던 장면이 책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그 장면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설에는 없더라. 별것 아닌 장면이었는데(공리가 다른 형님이 발 마사지 받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도 발 마사지 받고 싶어하는 그런 장면이 있다. 정말 별것 아닌 장면인데, 그게 왜 그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지, 흠.) 그래도 기다리다 못 만나니 바람 맞은 기분이 들었다나 뭐라나.

'처첩성군'을 읽고 나니 '홍등'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김연수 작가가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서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에 '안 노래하면 안 삽니다[生]'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DVD 플레이어가 지금 딱 그 상황이다. 안 틀어주면 안 삽니다. 생각난 김에 DVD 플레이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보고 '홍등'을 다시 감상해야겠다.

 

'이혼지침서'는 글쎄 뭐랄까, '묻지마 이혼'이란 표현이 있다면 그렇게 표현해주고 싶다.(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지 뭐.)

이혼하려고 마음 먹으니, 그 뒤로 줄줄줄 이혼 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혼과 사랑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그렇지 않나? 일단은 반하고 본다. 그 뒤로 줄줄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생각되는 매력들이 속속 쏟아져나온다.

우리의 주인공도 일단 '이혼 할래'라는 마음을 먹고 보니, 이젠 아내의 모든 것이 다 혐오스러워진다. 그 부분의 대화가 (미안하게도) 배꼽빠지게 우스웠다.


  "혐오스러워서 그래. 혐오스러운 느낌이 하루하루 심해져서 결국 증오가 되었어. 어떨 때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불을 켜고 코까지 골며 달게 자는 당신을 보면 너무 꼴사나와 보여. 그럴 때는 진짜 권총이 있었으면 해. 진짜 권총이 있으면 아마 당신 얼굴에 겨누고 쏠 거야."

  "당신의 살의 따위는 안 무서워. 코 고는 것 말고 또 뭐가 혐오스럽지?"

  "여름에 당신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가 혐오스러워."

  "또 혐오스러운 건?"

  "밥 먹고 나서 이 쑤시는 동작, 밥 먹을 때 쩝쩝거리는 소리."

  "그리고?"

  "당신 새집 같은 파마 머리, 또 밤늦도록 틀어대는 홍콩 연속극하고 저 개떡 같은 <비앙카>."

  "계속 말해봐."

  "책하고 신문 절대 안 보는 거하고, 맨날 나한테 사랑이나 나랏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또 없어? 계속해봐."

  "당신이 옆집하고 잘 지내는 척하는 것도 싫어. 복도에서 방금 시시덕거려놓고, 문을 닫고 나면 그 사람 조상까지 욕을 해대면서 말이야. 당신은 저속하고 위선적인 여자야."

  "몽땅 헛소리야."

  주윈이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혼하고 싶어서 나를 형편없이 깔아뭉개는군. 그러면 결혼할 때 나한테 한 달콤한 말과 맹세는 전부 거짓말이었어? 다 나를 속이려는 수작이었냐고?"

아, 이런 대화를 읽고 어떻게 배꼽을 쥐지 않을 수 있는지.

사랑에 빠지는 데 이유가 없듯이, 이혼하는 데도 정말 이유가 없나보다. 일단 이혼하고 싶으면 이런저런 이유들이 줄줄줄 쏟아져 나오니 그 중에 아무거나 하나 갖다 붙이면 될지도.

물론 그렇지 않은 헤어짐도 있다는 거 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런 '묻지마 이혼' 이야기가 이렇게 우습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일 뿐.

아, 사실 '묻지마 이혼'은 아니다. 원래는 양보에게 여자친구가 생겨서 시작된 거 아니었나?

어쨌든, 이후 눈물겨운 그의 이혼 시도가 정말 배꼽을 뺀다.

 

'등불 세 개'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강렬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지만, 얼핏 차오원쉬엔의 성장 소설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피난을 떠난 마을에 남겨진 바보 소년과 강가에서 등불 세 개를 밝히는 소녀의 이야기는

앞의 두 소설로 붕 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며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그렇다고 조용한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웃기면서도 코 끝 찡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눈물 두어 방울 떨구게 만들었던 이야기.

앞의 두 편에 비해 감상이 짧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자, 이제는 까먹기 전에 '안 틀어주면 안 삽니다' 상태에 빠졌을 DVD 플레이어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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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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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김중혁 작가의 낭독회에 다녀오는 길에 드디어 이 책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드디어 리뷰를 쓴다, 참, 게.으.르.다.)

 

두 번째 소설집 <악기들의 도서관>을 조금 어렵게(?) 읽었던지라 내심 겁이 나서 쉽게 펼쳐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작가를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에 들떠서인지,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었던 때 이후로 작가에 대한 애정도가 급 상승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책인 건지, 어쨌든 속으로 내내 아, 아, 하는 감탄사를 터뜨리며 정신없이 빠져들어 읽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하철에서 안 내리고 계속 책을 읽고 싶었지만, 어차피 순환선도 아니었고, 나는 이 멋진 책을 쓴 작가를 만나러 가야 했으므로 잠시 덮어두면서도 얼른 마저 읽고 싶어 조바심쳤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직업이었다.

'무용지물 박물관'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의 진행자가 나오고,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는 개념발명가가 나오며(개념발명가,가 뭔지는 글을 다 읽고 나서도 잘 모르겠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에는 '해수면 오차 측정과 침수 지역 예상 및 지도 제작 전문 연구소'에 근무하는 오차 측량원이 나온다.

이런 직업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작가가 상상해낸 건지, 만약 후자라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하고 독특한 직업들을 상상해 내는지 궁금했다.

운 좋게도 그날 낭독회에서 작가가 자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직업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부분이 상상속의 직업이라고 하면서, 직업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발명품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는데, 바로 그런 상상들이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나는 것 같았다.)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인터넷 라디오'의 진행자는 물론 실재하겠지만, 나는 이 직업이 무엇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그건 '메이비의 무용지물 박물관'의 소장품을 설명하는 부분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 메이비의 목소리를 따라 잠수함을 상상하는 모습에서 나도 눈을 감고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나는 눈을 감고는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 책을 읽을 수 없으면 메이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눈을 뜨고 글자를 읽으며 잠수함을 상상해봤다.

나도 메이비의 설명과는 다른, 내가 아는 어떤 잠수함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실제로 이런 라디오 방송이 있다면, 나도 진행자의 목소리를 따라 세계를 그리는 연습을 해보고 싶었다.

 

김중혁 작가의 홈페이지 이름으로 자주 클릭했던 <펭귄뉴스>를 드디어 읽게 되어 기쁘고,

작가의 신작 소설을 기다리는 동안 야곰야곰 <악기들의 도서관>과 함께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날 낭독회에서는 작가의 미발표 신작 소설 일부를 들려주었는데, 아, 정말 기대되는 소설이었다.

2년 동안 750매밖에 안 썼다면서, 애가 타서 어떻게 기다리라고 맛보기를 보여줬는지, 야속하다.

김중혁 작가는 얼른 신작 소설을 내놓으시라!! (으응...? 이건 무슨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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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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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쓴 산문집을 좋아한다.

나에게 그 매력을 처음 알게 해 준 책은 함민복 시인의 <미안한 마음>이었다.

시인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글을 보고 있노라니 산문시를 읽는 기분도 들었고,

글을 통해 느껴지는 시인의 따듯한 마음이 내 마음에도 온기를 가득 퍼뜨려주었더랬다.

그 여운과 감동이 참 오래도록 남아, 이후 시인이 쓴 산문집을 종종 찾아 읽곤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최영미 시인이다.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내 마음대로 이 책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따뜻하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글들이 가득한 책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 혹은 기대 혹은 바람과 다른 글들을 맞닥뜨린 데서 오는 당혹감에 처음에는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마냥 편안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이건 책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시인'과 '산문집'이라는 두 단어만 가지고 내 멋대로 책을 짐작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일 뿐.

이 책은 2000년에 발간 되었다가 절판 된 책을 개정판으로 펴 낸 것인데, 2000년에 발간된 책은 '사회평론'으로 분류되어 있는 걸 봤다.

산문집보다는 사회평론이라는 분류가 더욱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의 2부는 2000년에 출간되었던 책에 실렸던 부분이고, 1부는 개정판에 새로 실린 부분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여러 신문 지면 등에 발표했던 것들이다.(글의 출처를 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의 느낌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갈지도.)

특별히 어떤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주제로 쓴 글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그 점이 이 책의 제목과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일기가 그런 것이니까.

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내일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일기장이니까.

1993년의 최영미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1999년의 최영미 시인은 어떤 것들에 끌리고 있었는지, 2006년의 최영미 시인은(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는지, 이 '일기장'이 우리 앞에 펼쳐보인다.

그리고 우연히 그녀의 일기를 엿보게 된 나는, 일기장의 글들을 통해 한 송이 장미 같은 최영미 시인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장미,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온몸 가득 가시를 달고 자신을 보호하는 장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전혀 알지도 못 하는 한 시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름답고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마음은 여리고 상처도 많이 받는, 그리고 그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시를 세우는 한 인간의 모습에,

나는 처음에는 불편하다가, 그 안에서 점점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서 끝내는 공감하고 만, 그리고 그녀를 향한 안쓰러움인 듯 가장하여 사실은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와는 또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고보니 올해 최영미 시인의 책을 많이 만난 편이다. 그녀는 이 단어를 끄집어내는 걸 원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서른'이어서일까? 한때 '서른'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그녀의 글들이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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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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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표정을 담는 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나도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진 애호가 중 한 명이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처음에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을 때는 동네 산책을 나가도 꼭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조그만 LCD 창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보는 법을 배웠다. 내 두눈에만 의지하여 볼 때는 늘 보던 풍경, 늘 보던 사물에 지나지 않던 세상이었는데, 카메라 렌즈는 마치 세상을 보는 현미경 같았다. 전에는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작고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들꽃(꽃마리를 아시는지?), 풀숲에 떨어진 새의 깃털, 비온 후 영롱한 물방울을 잔뜩 매단 거미줄, 파도에 휩쓸려 다가왔다 사라지는 작은 유리병, 겨울철 연못을 기하학적 무늬로 수놓는 연꽃 줄기, 나무 계단에 피어난 알록달록 버섯…… 모두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그러니까 내 관심 밖에 있던 세상이었다. 늘 바로 앞의 땅만 보며 바삐 걷던 나는 이후로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여유로운 걸음을 걷는 법도, 함께 배웠다. 세상은, 아름다운 피사체로 가득했다.

 

그렇게 사진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동시에 또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그건 바로 내가 지나치게 소심하다는 것. 옆에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땅바닥에 붙어 들꽃을 찍기에는, 낯선 고장의 시장에 들러 파는 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신기한 토산품을 찍기에는(강원도의 한 수산 시장에서 거대한 문어 한 마리 찍다가 아주머니의 강원도 사투리 욕설을 듣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길거리에 놀고 있는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찍기에는 나는 너무 소심하다는 점이었다. 사진 찍기는 혼자 즐길 수 있는 동시에 피사체와의 교감을 피할 수 없는 행위였다. 사람과의 교감이 무척 서툰 나는 고작 사람 없는 한적한 곳을 거닐며 사진을 찍거나, 사람 외의 피사체를 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가 쫄지 않고(?) 사람을 찍는 경우는 우리 가족을 찍거나,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해 작가의 얼굴을 찍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사진 찍기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사진 찍기를 거의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얼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내게 크나큰 두근거림을 안겨준 책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세계, 금지의 세계를 조세현 작가의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 보게 된다는 설렘과 떨림이랄까. 소심한 나는 앞으로도 결코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얼굴, 낯선 이의 표정을 이 책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흥분과 부러움이랄까. 그런 두근거림으로 첫 장을 열고 가슴 가득 차오르는 따뜻함으로 마지막 장을 덮은 이 책. 사진 속에는 사진 찍는 이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지만, 나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며 사진 밖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는 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향해 보내는 그들의 무한한 신뢰와 따뜻한 눈빛이 카메라 렌즈 너머에 있는 사진 찍는 사람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찍지 않다보니 자연히 사람 사진을 보는 경우도 드문데, 이 책 가득한 사람 사진을 보며, 사람의 표정이라는 건 한 권의 책 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밑에 아무런 글도 실리지 않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구멍 가게 앞에서 찍힌 오누이와 바로 옆 쪽에 조그맣게 실린 한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책 뒤쪽에 실린 제목은 각각 '빨간 슬리퍼'와 '사제'였지만, 나는 그 사진들로 '미래'와 '과거'라는 이야기를 읽었다(나의 제목 짓는 솜씨는 늘 그렇게 창조성 없고 단순하므로, 흠흠). 어쩌면 그 구멍 가게 주인의 아들딸일지도 모르는 두 아이 앞에는 그 노인이 살아온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긴긴 시간들이 펼쳐질 것이고,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이며 뒷짐 지고 걸어가는 노인의 뒤에는 그 아이들 만한 나이로 한참을 거슬러가는 시간들이 감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앞으로 살아가게 될 그 아이들의 시간과 이미 한참을 지나온 노인의 과거를 생각해보며 그 두 장의 사진과 약간의 여백 사이에서 혼자 긴긴 이야기를 읽었다. 이 사진들뿐이 아니라, 수많은 사진들이, 수많은 표정들이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의 표정을 담는 것 뿐 아니라 사람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만 이 책 속에 실린 사진 속 주인공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언젠가 중국 시안을 여행할 일이 생기면 이 책을 챙겨가고 싶다.

시장을 거닐며, 마을 골목을 거닐며,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는 거다. "니 런쓰 쩌 거 런 마?(이 사람 알아요?)" 몇 명 쯤은 이 책 속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린 서로를 무척 반가워하며(나는 이 책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서, 그는 자신의 사진이 실린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만나서) 정말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아 오게 될지도. 그리하여 나만의 '얼굴' 책을 만들게 될지도. 그리고 굳이 낯선 이와의 교감을 서툴게 시도하지 않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과도 카메라로 또 다른 교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앞으로 가족들의 사진도 많이 찍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전에 먼저, 초점 맞추고 셔터 누르는 게 전부인 내 사진 찍기 실력(이랄 것도 없는 '실력')을 향상시키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도 들지만!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에 대해 느낄 수 있게 해 준 이 책에 나도 내 진심을 가득 담은 표정 하나 보여주고 싶다.

글로는 보여주기 힘드니 이 책에 실린 사진 중 한 장 고르자면 '야채 장수'란 제목이 붙은 이 흑백 사진으로 고르겠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그렇게 행복하고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일이라는 내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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