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지침서 (양장)
쑤퉁 지음, 김택규 옮김 / 아고라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처첩성군', '이혼지침서', '등불 세 개'

이렇게 세 편의 중편 소설이 실린 책이다.

 

'처첩성군'은 공리 주연의 영화 '홍등'의 원작 소설인데, 마침 '홍등'이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지라, 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동시에 영화 필름도 돌리는 경험을 오랜만에 해봤다.(나는 워낙 영화를 잘 안 봐서, 영화화 된 소설이 있다면 소설을 읽을 뿐, 소설과 영화를 다 보는 경우는 참 드물다. 게다가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는 경험은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 유명한 '사랑과 영혼'이었고.)

책만 읽었다면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는데,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읽은 '처첩성군'은 아, 정말이지 대단했다.(이건 영화의 영향이 꽤 큰 것 같기도 하고.)

문장 하나하나에 되살아나는 영화속 장면들. 소설 '처첩성군'은 영화만큼 내게 큰 떨림을 남겨주었다.

아, 그 감흥은 뭐라고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아무튼 문장과 영상이 동시에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를 휩쓸어버렸다.

영화와 비교했을 때 아쉬운 점이라면 영화 속에서 내게 무척 인상 깊었던 장면이 책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나 저제나 그 장면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설에는 없더라. 별것 아닌 장면이었는데(공리가 다른 형님이 발 마사지 받는 소리를 들으며 자기도 발 마사지 받고 싶어하는 그런 장면이 있다. 정말 별것 아닌 장면인데, 그게 왜 그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지, 흠.) 그래도 기다리다 못 만나니 바람 맞은 기분이 들었다나 뭐라나.

'처첩성군'을 읽고 나니 '홍등'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김연수 작가가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서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은 피아노에 '안 노래하면 안 삽니다[生]'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의 DVD 플레이어가 지금 딱 그 상황이다. 안 틀어주면 안 삽니다. 생각난 김에 DVD 플레이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보고 '홍등'을 다시 감상해야겠다.

 

'이혼지침서'는 글쎄 뭐랄까, '묻지마 이혼'이란 표현이 있다면 그렇게 표현해주고 싶다.(없으면 내가 만들면 되지 뭐.)

이혼하려고 마음 먹으니, 그 뒤로 줄줄줄 이혼 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혼과 사랑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도 그렇지 않나? 일단은 반하고 본다. 그 뒤로 줄줄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생각되는 매력들이 속속 쏟아져나온다.

우리의 주인공도 일단 '이혼 할래'라는 마음을 먹고 보니, 이젠 아내의 모든 것이 다 혐오스러워진다. 그 부분의 대화가 (미안하게도) 배꼽빠지게 우스웠다.


  "혐오스러워서 그래. 혐오스러운 느낌이 하루하루 심해져서 결국 증오가 되었어. 어떨 때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불을 켜고 코까지 골며 달게 자는 당신을 보면 너무 꼴사나와 보여. 그럴 때는 진짜 권총이 있었으면 해. 진짜 권총이 있으면 아마 당신 얼굴에 겨누고 쏠 거야."

  "당신의 살의 따위는 안 무서워. 코 고는 것 말고 또 뭐가 혐오스럽지?"

  "여름에 당신 겨드랑이에서 나는 냄새가 혐오스러워."

  "또 혐오스러운 건?"

  "밥 먹고 나서 이 쑤시는 동작, 밥 먹을 때 쩝쩝거리는 소리."

  "그리고?"

  "당신 새집 같은 파마 머리, 또 밤늦도록 틀어대는 홍콩 연속극하고 저 개떡 같은 <비앙카>."

  "계속 말해봐."

  "책하고 신문 절대 안 보는 거하고, 맨날 나한테 사랑이나 나랏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거."

  "또 없어? 계속해봐."

  "당신이 옆집하고 잘 지내는 척하는 것도 싫어. 복도에서 방금 시시덕거려놓고, 문을 닫고 나면 그 사람 조상까지 욕을 해대면서 말이야. 당신은 저속하고 위선적인 여자야."

  "몽땅 헛소리야."

  주윈이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혼하고 싶어서 나를 형편없이 깔아뭉개는군. 그러면 결혼할 때 나한테 한 달콤한 말과 맹세는 전부 거짓말이었어? 다 나를 속이려는 수작이었냐고?"

아, 이런 대화를 읽고 어떻게 배꼽을 쥐지 않을 수 있는지.

사랑에 빠지는 데 이유가 없듯이, 이혼하는 데도 정말 이유가 없나보다. 일단 이혼하고 싶으면 이런저런 이유들이 줄줄줄 쏟아져 나오니 그 중에 아무거나 하나 갖다 붙이면 될지도.

물론 그렇지 않은 헤어짐도 있다는 거 안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런 '묻지마 이혼' 이야기가 이렇게 우습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일 뿐.

아, 사실 '묻지마 이혼'은 아니다. 원래는 양보에게 여자친구가 생겨서 시작된 거 아니었나?

어쨌든, 이후 눈물겨운 그의 이혼 시도가 정말 배꼽을 뺀다.

 

'등불 세 개'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강렬한 느낌을 받지는 못했지만, 얼핏 차오원쉬엔의 성장 소설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야기였다.

모두가 피난을 떠난 마을에 남겨진 바보 소년과 강가에서 등불 세 개를 밝히는 소녀의 이야기는

앞의 두 소설로 붕 떠 있는 마음을 가라앉혀 주며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그렇다고 조용한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웃기면서도 코 끝 찡하게 만드는, 그러다가 눈물 두어 방울 떨구게 만들었던 이야기.

앞의 두 편에 비해 감상이 짧기는 하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게 읽었다.

 

자, 이제는 까먹기 전에 '안 틀어주면 안 삽니다' 상태에 빠졌을 DVD 플레이어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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