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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의 표정을 담는 건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나도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사진 애호가 중 한 명이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처음에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게 되었을 때는 동네 산책을 나가도 꼭 사진기를 가지고 다니며 조그만 LCD 창으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보는 법을 배웠다. 내 두눈에만 의지하여 볼 때는 늘 보던 풍경, 늘 보던 사물에 지나지 않던 세상이었는데, 카메라 렌즈는 마치 세상을 보는 현미경 같았다. 전에는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작고 소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들꽃(꽃마리를 아시는지?), 풀숲에 떨어진 새의 깃털, 비온 후 영롱한 물방울을 잔뜩 매단 거미줄, 파도에 휩쓸려 다가왔다 사라지는 작은 유리병, 겨울철 연못을 기하학적 무늬로 수놓는 연꽃 줄기, 나무 계단에 피어난 알록달록 버섯…… 모두가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기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그러니까 내 관심 밖에 있던 세상이었다. 늘 바로 앞의 땅만 보며 바삐 걷던 나는 이후로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여유로운 걸음을 걷는 법도, 함께 배웠다. 세상은, 아름다운 피사체로 가득했다.
그렇게 사진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동시에 또 한 가지 작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그건 바로 내가 지나치게 소심하다는 것. 옆에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땅바닥에 붙어 들꽃을 찍기에는, 낯선 고장의 시장에 들러 파는 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신기한 토산품을 찍기에는(강원도의 한 수산 시장에서 거대한 문어 한 마리 찍다가 아주머니의 강원도 사투리 욕설을 듣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길거리에 놀고 있는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을 찍기에는 나는 너무 소심하다는 점이었다. 사진 찍기는 혼자 즐길 수 있는 동시에 피사체와의 교감을 피할 수 없는 행위였다. 사람과의 교감이 무척 서툰 나는 고작 사람 없는 한적한 곳을 거닐며 사진을 찍거나, 사람 외의 피사체를 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가 쫄지 않고(?) 사람을 찍는 경우는 우리 가족을 찍거나,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해 작가의 얼굴을 찍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나의 일방적인 사진 찍기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사진 찍기를 거의 해보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얼굴'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내게 크나큰 두근거림을 안겨준 책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가가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세계, 금지의 세계를 조세현 작가의 카메라를 통해 들여다 보게 된다는 설렘과 떨림이랄까. 소심한 나는 앞으로도 결코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타인의 얼굴, 낯선 이의 표정을 이 책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흥분과 부러움이랄까. 그런 두근거림으로 첫 장을 열고 가슴 가득 차오르는 따뜻함으로 마지막 장을 덮은 이 책. 사진 속에는 사진 찍는 이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지만, 나는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며 사진 밖에서 셔터를 누르고 있는 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향해 보내는 그들의 무한한 신뢰와 따뜻한 눈빛이 카메라 렌즈 너머에 있는 사진 찍는 사람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 사진을 찍지 않다보니 자연히 사람 사진을 보는 경우도 드문데, 이 책 가득한 사람 사진을 보며, 사람의 표정이라는 건 한 권의 책 만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밑에 아무런 글도 실리지 않은 사진 한 장 한 장을 오랜 시간 들여다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구멍 가게 앞에서 찍힌 오누이와 바로 옆 쪽에 조그맣게 실린 한 노인의 뒷모습이었다.
책 뒤쪽에 실린 제목은 각각 '빨간 슬리퍼'와 '사제'였지만, 나는 그 사진들로 '미래'와 '과거'라는 이야기를 읽었다(나의 제목 짓는 솜씨는 늘 그렇게 창조성 없고 단순하므로, 흠흠). 어쩌면 그 구멍 가게 주인의 아들딸일지도 모르는 두 아이 앞에는 그 노인이 살아온 것만큼 혹은 그보다 더 긴긴 시간들이 펼쳐질 것이고, 구부정한 뒷모습을 보이며 뒷짐 지고 걸어가는 노인의 뒤에는 그 아이들 만한 나이로 한참을 거슬러가는 시간들이 감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득 앞으로 살아가게 될 그 아이들의 시간과 이미 한참을 지나온 노인의 과거를 생각해보며 그 두 장의 사진과 약간의 여백 사이에서 혼자 긴긴 이야기를 읽었다. 이 사진들뿐이 아니라, 수많은 사진들이, 수많은 표정들이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의 표정을 담는 것 뿐 아니라 사람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만 이 책 속에 실린 사진 속 주인공들에게 정이 들어버렸다.
언젠가 중국 시안을 여행할 일이 생기면 이 책을 챙겨가고 싶다.
시장을 거닐며, 마을 골목을 거닐며,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는 거다. "니 런쓰 쩌 거 런 마?(이 사람 알아요?)" 몇 명 쯤은 이 책 속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린 서로를 무척 반가워하며(나는 이 책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서, 그는 자신의 사진이 실린 책을 들고 있는 나를 만나서) 정말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그들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아 오게 될지도. 그리하여 나만의 '얼굴' 책을 만들게 될지도. 그리고 굳이 낯선 이와의 교감을 서툴게 시도하지 않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과도 카메라로 또 다른 교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앞으로 가족들의 사진도 많이 찍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전에 먼저, 초점 맞추고 셔터 누르는 게 전부인 내 사진 찍기 실력(이랄 것도 없는 '실력')을 향상시키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도 들지만!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에 대해 느낄 수 있게 해 준 이 책에 나도 내 진심을 가득 담은 표정 하나 보여주고 싶다.
글로는 보여주기 힘드니 이 책에 실린 사진 중 한 장 고르자면 '야채 장수'란 제목이 붙은 이 흑백 사진으로 고르겠다.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그렇게 행복하고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일이라는 내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