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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
정양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지난해에 선물 받은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데 괜히 눈시울이 붉어져서 막상 펼쳐보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뒀더랬다.
내 마음이 어쩐지 이 시집 제목 같았다. 아니, 나는 길을 잃고 싶은 게 아니라, '길을 잃을 때가 많았다'라고 해야겠지만.
2010년의 2월이 막 시작된 한 밤에, 이 시집을 펼쳤다.
나는 길을 잃어서 힘들고 괴로운데, 왜 길을 잃고 싶어하는지, 시인의 마음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시집을 읽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애초에 나를 이리로 끌어들인 제목이 뭐였는지, 내가 이 시집에서 읽고 싶은 게 뭐였는지, 그런 건 이미 까맣게 잊어버리고,
시인의 손에 이끌려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앞에, 혹은 옛날 드라마가 방영되는 티브이 앞에 앉은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시집 읽다가 이렇게 큰 소리로 웃어보기도 처음이었다.
시집 읽고 남들에게 전래 동화 들려주듯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처음이었다.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고
내일 새보그 맹경 좀 가따 와야 쓰것다 일러놓고
이튿날 새벽 판쇠를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아침밥상 물린 뒤에야 라이방 걸친 판쇠가 나타나더랍니다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맹경 가따가 오는 기리고마니라우
맹경은 머더러 가떠라냐?
어저끄 가따 오라고 혀짜너유?
가따가 오란다고 그냥 빈소느로 가씨야?
아 글씨 가따가 오라고 혀짜너유?
그렁게 맹경은 가서 뭐시라고 현느냐 그 마리여?
가따가 오라고 혀서 와따고 혀찌라우
그렁게 머시라고 허시대?
그냥 우슴시나 인절미 한 소쿠리 주시던디요
아치믄 머건냐?
인절미 머금서 와꾸마니라우
그 인절미를 니가 다 머거씨야?
먹다봉게 그렇게 되야꾸만이라우('판쇠의 쓸개' 부분)
앞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웃음이 이 시에서 그만 폭발해서 혼자 푸하하 웃고는 연거푸 두 번을 읽었다.
그러고는 잘 외워서 다음날 아빠 엄마 앞에서 한 번, 동생 앞에서 한 번, "옛날에 판쇠라는 머슴이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판쇠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 시집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이 이렇게 내 안에서 전래동화처럼 바뀌어 우리 가족들 귀로 전해졌다.
읽기는 분명 시를 읽었는데, 구수하고 정감있고 감칠맛나는 옛날 이야기를 들은 기분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시집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1부는 이런 분위기이고, 2부는 분위기가 차분하게 바뀌며 시인의 일상사가 그려진 시가 많이 실려 있다.
사실, 1부가 너무 강렬한 나머지 2부의 인상은 크게 남아 있지 않다. 다시 읽을 때는 2부에 조금 더 마음을 두고 읽어봐야지.
이 시집을 막 펼쳤을 때는, 우울하고 또 우울한, 한없이 우울한 그런 기분이었는데,
이 시집을 덮을 때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이었다.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주인영감 잡수실 멧돼지 쓸개 낼름 해치우고 쫓겨난, 쓸개 빠진 판쇠 이야기를 생각하면 큭큭 웃음이 새어나온다.
한없이 우울한 길을 걷고 있던 나를 냉큼 샛길로 채어가준 고마운 시집.
이렇게 잃는 길이라면, 나도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