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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얼마 전 나온 창비 세계문학, 무척 매력적이다.
창비 세계문학이 다른 세계문학전집과 가장 다른점은 9개 국가/지역 별로 단편들만을 모았다는 점이다.
단 9권만으로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국가/지역의 많은 작가와 작품 들을 만나볼 수 있어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그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가장 관심가는 책은 중국 편이었는데, 평소에 거의 접해보지 못한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도 무척 궁금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았다.
모두 열아홉 작가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아는 이름이라고는 마르께스뿐인데다(게다가 마르께스도 아직 그 작품은 만나보지 못했다)
평소에 거의 접해보지 못한 지역의 소설인 탓인지 그 느낌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 의미를 알기 어려운 글도 많고 글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해 힘들게 읽은 글도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에 접하기 힘든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소설을 만났다는 데서는 여전히 행복한 책읽기였다.
열아홉 편의 글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삐오 바로하의 '마리 벨차',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 마리아 루이사 봄발의 '나무', 후안 호세 아레올라의 '전철수',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이었다.
첫 문장부터 마음을 사로잡으며 큰 기대를 갖게 했던 '마리 벨차'는 안타깝게도 3쪽 짜리의 아주 짧은 소설이었다.(이렇게 아주 짧은 소설이 이 소설 말고도 몇 편 더 있다.) 이런 문장의, 이런 분위기의 글, 참 마음에 든다. 삐오 바로하라는 이름을 기억해뒀다가 그의 글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겠다.
'씨앗으로 돌아가는 여행'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리게도 했는데,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한 세계 전체가 마치 영화 필름을 되감는 영상처럼 뒤로 돌려진다. 주인공은 다시 배 속 태아가 되고, 방의 양털 양탄자는 양으로 돌아가고, 나무로 만든 가구는 밀림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엉터리 철도 체계로 인해 겪게 되는 일이 마치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는 우리네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듯한 소설 '전철수'는 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긋게 만들었다. 정해진 노선 따위 상관하지 않고 아무 데로나 달려가며 제멋대로 승객들을 내려 놓기도 하고, 기차가 언제 올지는 알 수도 없고, 차창 밖으로는 환영을 만들어 승객들을 유혹하기도 하는 이상한 철도 이야기가, 어쩐지 우리의 인생처럼 여겨졌다. 작품 해설에는 '멕시코 정부의 관료주의와 철도체계의 비효율성에 대한 통렬한 풍자'나 '방향성을 상실한 국가현실의 끔찍하고 유쾌한 캐리커처'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뭐 어떻게 읽든 그건 '독자의 몫'이니까, 나는 이 소설에서 인생을 읽었다고 생각한다.
"그 기차가 저를 T로 데려다줄까요?"
"그런데 왜 당신은 꼭 T로 가야 한다고 고집하는 거요? 기차에 올라탈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에 말이오. 일단 기차에 오르고 나면, 실제로 당신 인생의 행로가 정해지지 않겠소. 그 방향이 T가 아닌들 그게 무슨 대수겠소?"
"실은 T로 가는 정식 열차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리로 가야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_ '전철수' 중에서
스페인·라틴아메리카 편으로 만나본 창비 세계문학, 기대했던 것만큼 매력적이었다. 표지도 무척 예쁘고 말이다.(그런데 종이가 좀 얇은 거 같다. 손 벨까봐 겁나던데, 벌써 한 번 베였다.)
다른 국가의 책들도 한 권 한 권 모두 만나봐야겠다. 다음으로는 중국 편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