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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천상병 / 답게 / 1995년 11월
평점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귀천')
무척이나 유명한 이 시가 담겨 있는 시집을 만났다.
'귀천'의 전부를 알진 못하더라도 '이 세상 소풍'이라는 표현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죽음 앞에서 많이 쓰이는 표현일 것이다.
나도 여러 죽음 앞에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시고……" 하는 말만 많이 들어보다가 드디어 이 시가 담긴 시집을 만나게 되니 조금쯤은 감개무량(?)한 기분도 들었다.
이 시집에는 천상병 시인의 시집 <새>, <주막에서>,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에서 시인이 직접 가려 뽑은 시들과 당시에 쓴 미발표 시들이 실렸다 한다. 시인이 직접 뽑은 자신의 대표시들을 모았으니, 천상병 시인의 시가 궁금한 사람이나, 나처럼 시를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 만나기에 더 좋은 시집인 것 같다.
시인은 참 조용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말투도 차분하고, 행동도 조용조용할 듯한.
시들을 읽으며 느낌이 그랬다. 장모님의 만수무강을 빌며, 귀여운 인형 이야기를 하며, 세상 떠난 시인의 명복을 빌며, 술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조용한 느낌이었다.(딱 한 편, 시인이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인 시가 기억나는데 예수와 양떼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액자가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뭐, 내게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은 없으므로,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해 볼 뿐이다.
읽을 때는 좋아서 페이지 한 귀퉁이를 접어 놓은 표시가 굉장히 많은데, 막상 시집을 덮고 나서는 머릿속에 강하게 떠오르는 시는 없다.(그래서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읽고 또 읽어야겠다. 그 조용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크게 울리도록.
오늘 종일 비도 내렸으니, 비에 관한 시 한 편.
나뭇잎이 후줄근히 비를 맞는다.
둥치도 맞고 과일도 그러하다.
표면이란 표면은 같은 운명이다.
냇물도 맞으니
이건 손자가 할아버지하고 악수하는 것이다.
동내(洞內) 사람들이 보고 흐뭇할 수밖에……
숲속 부락은 축제나 마찬가지다.
아낙네들은 내일 일을 미리 장만하고
남편들은 아름드리 술 퍼먹기에 바쁘다.('비·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