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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평점 :
처음에 제목을 봤을 때는 '高度'를 기다리며, 인가 싶어서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높이를 기다린다니, 이상을 좇는다는 뜻일까, 했는데
그러니까 극중에서 '고도'는 표면적으로는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보였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고도라고 했다.
아아, 사람 이름이라니, 그러니까 그냥 '영희를 기다리며'와 다를 바 없이 어떤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 것인가, 하고 조금 김이 샜는데, 비록 제목은 '영희를 기다리며'나 '철수를 기다리며'와 같은 것일지라도, 거기에서 영희나 철수, 그러니까 '고도'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혹은 이상이거나, 혹은 신이거나, 혹은 자유이거나 빵이거나 희망이거나,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져 있다는 해설을 보며 내 머리를 쳤다. 그러면 그렇지, 설마 영희나 철수를 기다리면서 일어난 시시껄렁한 일들을 그려놓은 글이 고전이라 평가받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_ 안되겠는데!
_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오랫동안 속으로 타일러왔지. <블라디미르, 정신차려, 아직 다 해본 건 아니잖아> 하면서 말야. 그래서 싸움을 다시 계속해 왔단 말이야.(9~10)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주고 받는 대화의 많은 부분에 나는 밑줄을 그었다.
비슷한 상황인듯 서로 다른 1막과 2막에서 각기 다른 감동과 깨달음을 얻으며 나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촌철살인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는 이들의 대사를 보며, 역시 고전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역시, 고전 100권 읽기 목표 세우기를 잘 한 것 같다. 반드시 목표 달성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보며 굳혔다!
_ 아프냐?
_ 아프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
_ 이 세상에 고통을 당하는 게 너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거지.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당해 봐야 알 거다.
_ 너도 아팠냐?
_ 아팠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12)
너도 아팠냐?
왜, 나 아픈 것만 알고 남 아픈 거는 생각 안 했을까? 그래서 결국 내 아픔으로 돌려받은 것을. 지금도 나 아픈 줄만 알고 남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 내가 상처 입은 만큼 남에게도 상쳐 입힌 건데. 그런데 궁금은 하다. "네가 내 입장이라면 무슨 소릴 할런지 보고 싶구나." 내가 '네' 입장이라면 들려줄 소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데 말이다.
지금의 내 상황에 비추어서도 생각할거리가 여러모로 많았던 책이다. 역시 한 번 읽고 말 책은 아니다.(아, 역시 고전!)
다음에 읽을 때는 또 어떤 말들에 밑줄을 긋게 될까. 한 문장 한 문장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