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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생활 방식
장은진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은진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책을 구입한 지는 조금 되었지만, 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한 작가가 쓴 책이지만, 당장 펼쳐보지 않고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은,
책 뒤표지에 실린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너무도 '문제적'인 전위 실험가, 혼자 놀기의 달인 장은진
극단적 감금과 고립, 그 매혹에 숨겨진 절대적 위험의 세계로 흠뻑 빠져드는
발칙한 훔쳐보기가, 지금 시작된다!"
'너무도 문제적인 전위 실험가'라니, 혹시 어렵고도 어려운 실험적인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여운을 깰까봐 걱정이 된 탓이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올해 작가의 새 소설이 나오기 전에 기존 발표작을 다 읽어볼 요량으로 드디어 펼쳐들었다.
아, 그 한 문장이 나와 이 책과의 만남을 지연시켰다니, 그만 억울해졌다!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는 단연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젊은 나이에 서울에 자신의 집을 마련한 '나'와 나의 앞집인 305호에 사는 그녀.
눈부신 외모로 사람들의 일방적인 사랑과 비난을 받으며 끝내 엄청난 고통을 맞이하게 되는 한 사진 작가.
이 책은 이렇게 두 이야기가 갈마들며 진행된다.
처음 내 마음을 단단히 끌어들인 것은 '나'의 앞집에 사는 305호 그녀의 이야기였다. 그녀를 '앨리스'라고 해두자.
지난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현관문을 열지 않고 철저한 은둔 생활을 해 온 앨리스.
그 긴 세월, 어떻게 외출 한 번 않고 홀로 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워지고 있는 나조차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던 앨리스의 생활방식.
그 생활방식이 무척이나 궁금해, 그리고 앨리스가 '숨어' 지낼 수밖에 없는 그 사연이 궁금해, 책장이 날개라도 달린 듯 넘어갔다.
초반에는 잘 읽히지 않던 사진 작가의 이야기 부분도 뒤쪽으로 갈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지며 책장에 날개가 돋는 데 한몫 했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가 없다. 순전히 나를 위한 리뷰 쓰기이지만, 혹시 모를 잠재적인 독자를 위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책이었다니, 더 빨리 만나지 않은 게 아쉽기도 했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이기에 더욱 깊이 와닿는 부분도 많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작년에 계간지를 통해 읽었던 장은진 작가 인터뷰 내용이 떠올랐다.
일 년에 삼십만 원을 가지고 생활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읽으며 어떻게 그렇게 적은 돈으로 살아가느냐에 놀란 것이 아니라,
'일 년에 삼십만 원'이 어떤 생활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공감했다.
'일 년에 삼십만 원'이란 가난한 생활이 아니라, 은둔의 생활을 뜻한다. 홀로 지내는, 어쩌면 외로운 생활을 뜻한다. 언젠가의 내가 그랬고, 요즘의 내가 그런 것과 같은 생활이다. 요즘의 내가...
그러기에 이 소설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앨리스처럼 철저히 '갇혀' 지내는 생활도 내게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주인공의 직업 덕에 등장하는 번역에 관한 글귀라던가, '나'와 '앨리스'의 관계 덕에 등장하는 블로그 이웃에 관한 글귀라던가, 앨리스의 생활방식 덕에 등장하는 외톨이에 관한 글귀라던가, 밑줄 쳐두고 가슴에 새길 만한 문장도 무척 많았다.(블로그 이웃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 것도 참 재미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키친 실험실>을 만나볼 차례이다. 역순으로 읽어가는 그녀의 소설들. 그 세 번째 순서이자, 그녀의 첫 책인 <키친 실험실>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지 무척 기대된다. 그 책의 뒤표지에는 어떤 추천사가 쓰여 있든 두려워하지 않고 당장 읽을테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와 <앨리스의 생활방식>으로 그녀는 내게 충분히 검증된 작가가 되었으니까.
아, 정말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다.
이해는 삶을 지속시킨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절반의 은둔자이거나 잠재된 은둔자다. 그리고 누구나 다 결국은 외톨이다. 나 또한 이런저런 이유들로 며칠 동안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세상은 날로 변해 가고 날로 편해지고 있다. 티브이, 인터넷, 폰뱅킹, 신속 배달. 여자가 말한 포크와 젓가락 기능을 보완해 주는 것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체처럼 반짝반짝 탄생한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세상이 움직인다. 내가 숨는 게 아니라 세상이 나를 감추어 외톨이로 만든다. 오늘날 은둔의 개념은 모호해지고 확장된다. 반드시 어떤 공간에 숨어들지 않더라도 자기 안에 갇혀 마음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은둔자다.(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