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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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도리스 레싱의 책을 처음으로 만나보았다.

 

한 신혼 부부가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아이를 많이 낳을 계획을 세우면서 시작된 이야기는,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약간 지루하게 읽혔다.

나는 이런 형식의 글이 읽기 불편한데, 시간과 사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그냥 한 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 사건인 양 술술 지나가기 때문에 도무지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임신 했다더니 벌써 첫째를 낳았고, 또 임신 했다더니 그새 둘째는 언제 낳았으며, 아니 벌써 다섯째까지 임신한 거야? 이런 식으로 따라가다보면, 나 혼자 이야기 흐름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바보 같이 여겨져서 싫기도 하고, 앞뒤 정황 딱딱 정리되어 줘야 하는 내 성격상 따라가기 힘들 수밖에.

그런데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바뀌며, 나도 딴 생각에 투덜댈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네 명의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35)는 문장이 예사롭지 않은 전조처럼 여겨졌는데, 역시, 다섯째 아이를 낳으며 이제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 다섯째 아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게 됐다.

그냥 단순히, 괴물 같은 아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괴물 같은 아이는 어떤 아이란 말인가?

이 책에서 말하는 '몽고인' 같은 사람인가?(소설속의 그들은 다운증후군에 걸린 사람을 '몽고인'이라고 부르며 무시했다. 다운증후군과 몽고인 둘 모두를 비하하는 표현이었다.)

어른도 감당 못 할 괴력을 지니고, 섬뜻한 살기를 눈에 띄고 있고, 지능마저 낮은, 마치 정글 속에서 자란 야생 아이 같기도 한 다섯째 아이.

이 한 아이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가정의 모습은, 장애아가 있는 가정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했다.(물론 모든 가정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영화 '말아톤'을 보며 참 가슴 아팠던 게 장애아 형을 가진 동생의 방황이었다. 엄마는 형에게만 매달리고 화목한 가정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 비뚤어지던 동생. 이 소설에서는 다섯째 아이의 바로 위 형이 그와 비슷한 방황과 반항을 하게 된다. (다른 형제들도 모두 집을 떠나고 말이다.)

다섯째 아이가 기관으로 보내진 뒤, 가정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지만, 다섯째 아이가 돌아오며 이 가정은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만다.

이 가족을 위기로 몰아가는 다섯째 아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정체가 아직도 몹시 궁금하다.

 

이 책에서는 너무 극단적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장애아가 있는 가정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어주었다.

참 어두운 분위기에, 섬짓하고 꽤 공포스러운 소설이었다.

 

 

_ 그래요, 로바트 부인. 당신은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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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창비시선 293
김근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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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제목이 참 예뻤다.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시집을 펼쳐 읽으며,

머리가 아팠다.

 

내게는 거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 어렵고 힘든 시집이었다.

 

하지만, 단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이 시집으로 고통 받은 내 마음을 충분히 어루만지고 달래주었다.

바로, 표제시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이제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구름떼처럼은 아니지만 제 얼굴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 하나둘 숨어드는 곳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날카롭게 돋아나서 눈을 찔러버리는 것들은 잊고 구름으로 된 의자에 앉아 남모르게 우리는 제 몫의 구름을 조금식 교환하기만 하면 되지요 「구름목장의 결투」나 「황야의 구름」 같은 오래된 영화의 총소리를 굳이 들을 필요는 없어요 구름극장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네모난 영사막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금세 다른 모양으로 몸을 바꾸지요 그럴 때 사람들이 조금씩 흘려놓은 구름 냄새에 취해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건 어때요 오직 이곳에서만 그대와 나인 우리 아직 어둠속으로 흩어져버리기 전인 우리 서로 나눠가진 구름의 입자들만 땀구멍이나 주름 사이에 스멀거리기만 할 우리 아무것도 아닐 그대 혹은 나 지금은 너무 많은 우리 사람들이 쏟아놓은 구름 위를 통통통 튀어다녀보아요 가볍게 천사는 되지 못해도 얼굴이 뭉개진 천사처럼 하얗고 가볍게 이따금 의자를 딸깍거리며 구름처럼 증발해버리는 사람이 있어도 그런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요 구름극장이 아니어도 우리도 모두 그처럼 가볍게 증발해버릴 운명들이니까요 햇빛 따위는 잊어버려도 좋아요 구름에 관한 동시상영 영화들은 그리 길지 않아요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저녁이면 둥실 떠올라 세상에는 아주 없는 것 같은 구름극장 말이에요('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전문)

 

내 머릿속으로 '구름에 관한 동시상영 영화'가 지나가며, 나는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 조그맣게 소리내어 이 시를 읽어 보았다.

입에서 구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정말 어딘가에 이런 구름극장이 있다면 나도 함께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시인의 음성으로 이 시를 듣고 싶었다.

(이 날, 시인의 시 낭송에 반해버렸다. 시 낭송하는 음성이 어찌나 멋지던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꼬옥 이 시를 시인의 음성으로 들어보고 싶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구름 사진들을 꺼내어 구름 감상을 하며, 이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참 행복한 밤이었다.

 

비록 시집 전체를 읽는 시간들은 조금 힘겨웠으나.

(전체적으로 먼저 읽은 김민정 시인의 시집과 느낌이 참 비슷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름극장을 꿈꾸며, 품에 꼬오옥 안아주게 되는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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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70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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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은 시동인 '불편'의 멤버이다.

마침 연달아 읽은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의 김근 시인도 역시 '불편'의 멤버이다.

시집을 읽다보니 절로 시동인 이름이 떠올랐다.

 

불편하다해서, 불쾌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쉽게 읽히지 않고, 내 마음에 착착 감기지 않아 어느 정도 읽기에 불편했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불편이었다. 불편 안에도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조금쯤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런 게 언어 유희!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제목들이었다.

일테면 이런 제목들.

 

화두냐 화투냐 / 고비라는 이름의 고비 / 陰毛라는 이름의 陰謀 / 결국, 에는 愛 / 아내라는 이름의 아, 네 / 오빠라는 이름의 오바 / 젖이라는 이름의 좆 / 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 /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의 편 / 강박은 광박처럼 /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적다 보니 재밌어서 거의 다 적었다.)

이런 제목들이 무척 재미있어서, 시 내용보다 제목에 더 시선을 주며 읽게 된 시집이었다.

사실, 기억에 남는 제목은 많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시는 없다.

다만, 피가 낭자했고(여성의 생리혈), 젖이라던가 좆이라던가 하는 단어들도 여러 차례 등장한 느낌이고, 뭔가 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구절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게 인상적이면서도, 그닥 편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처음, 읽은 탓일까.

뭐, 어찌되었든, 처음 본 시인의 시집은 불편했어도, 처음 본 시인의 미모는 굉장했다는 기억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를 처음 느껴본 소감 끝.

 


어느 날 벤자민 고무나무 한 그루

나에게서 나에게로 배달시켰다

고르고 보니

키가 딱 아홉 살 소년만 했다

흔들리고 싶을 때마다

흔들기 위해서였다

흔들고 난 뒤에는

안 흔들렸다 손 흔들기 위해서였다

이게 이심인가 전심인가

몇 날 며칠을 기다리는 동안

마른 이파리들 저 알아서

저 먼저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뒷짐 지고 산책이나 다녀올 일이었다('숲에서 일어난 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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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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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처음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은,

          사랑에 대한 미감을 상실한 것 같은 무미건조한 헛헛함을 자주 느꼈다. 모든 것엔 상미기간이 있는 것이다.(12)

였다.

사랑에 대한 상미기간이 만료된 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문장들로 내 가슴에 만찬을 차려주었던 이 책.

참 많은 문장들에, '공감하기' 버튼을 클릭할 수 없는 대신, 빨간 밑줄들을 그어주었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포만감으로 행복했다.

 

행복하면서 쓸쓸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누경과 기현의 위로 자꾸 내 모습이 겹쳐지는 까닭이었다.

        인생이 고독할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구 흘러가버릴 거라고 했다.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고 했다.(15)

이 말을 들은 이는 기현이었던가, 나였던가?

기현의 손금을 봐 준 어떤 이가 기현에게 한 말이었고, 나의 사주를 봐 준 어떤 이가 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천성적으로 고독하다고 했던가? 평생 외로울 거라고 했던가?

천성적이든, 평생이든,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어쨌든, 혼자라는 거지.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는 거지. 기현처럼, 나도.

한 시인이 자신은 슬프게 태어난 사람이라 했지. 남들보다 슬픔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라고. 나도 그래요. 나는 고독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에요.

 

          ……,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다. ……,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 말했다.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 말했다. ……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말했다.(35)

……, 어떤 남자는 누경을, ……, 나는 나를, 이렇게 말했다.

이어지는 문장에 함께 밑줄을 그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만큼은, 35쪽의 그 문장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누경이 내가 되고 내가 누경이 되는 것 같은, 소름이 끼치는 일체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때의 나는 얼굴에 그 단 하나의 표정, 무뚝뚝함만을 남긴 채 잊혀져가고 있을 때였다. 나에게, 나의 가족에게.(타인은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삶에 낙심한 사람은 매일, 매시간 가파르게 늙는다(35)는 것을. 그 단 하나의 표정은 나를 빠른 속도로 늙게 만들었고, 내 안에 고독의 함량을 높여만 갔다. 고독이 침잠한 내 방 안에 갇힌 나는,

          세상과 사이가 나쁜 사람 같아 보여요. 등을 돌리고 사는 사람 같기도 하구요.(43)

 

책을 읽으며 주인공의 모습에, 그의 천성에, 그와 세상과의 경계에, 일상의 사소한 부분에 이렇게 많은 공감을 느끼는 책도 오랜만인 것 같다.(어쩌면 처음인지도.)

심지어는 일 년 내내 병원과 마트와 목욕탕과 도서관만 오간 누경의 모습과, 지난 한 달 여의 내 모습마저도 아프도록 닮아 있었다.

한 달 내내 집과 동생네 집과 어린이집, 이렇게 세 개의 집만을 오간 건 나였다. 누경처럼 나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타인에게 위로를 구하지도 않고 고통을 순순히 겪어내기로 했다. 나의 시간도 뭉텅뭉텅 흘러갔고, 나는 지금, 백기를 들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나온 척.

          벽처럼 지낸 그것도 삶이라 할 수 있을까.(205)

 

나의 모습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읽는다는 것은 참 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외의 위로가 되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고독에도 동지가 있는 편이 낫다. 혼자 고독한 것보다, 누경과 기현과 함께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조금쯤 든든하기도 했다.

누경과 서강주와 같은 사랑을 해보지 못 했고, 누경 앞의 기현 같은 모습이었던 적도 없는 나는, 이 책의 반만 읽어낸 걸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이 초대해 준 풀밭 위의 식사,는 지금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만찬이었다.

나는 '고독'이라는 초대장 하나로 그들의 식사에 멋지게 함께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엇을 원해?"

  "나의 고유한 리듬."

누경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암호 같았다. 내 고유한 리듬…… 그 리듬이 어떻게 생겨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자신에게 맞추어 살기로 하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정해져 있는 법이 있는가. 천성이란 게 있다면, 천성대로 게으르고 천성대로 외롭고, 천성대로 불행하고 천성대로 가난하고 천성대로 만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천성대로 고독한 것도.(82)

 

천성대로 고독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후식으로 즐기며, 그렇게 나와 그들의, 풀밭 위의 식사가 끝났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풀 냄새 가득한 식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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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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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앞 부분을 조금 읽다가 덮어둔 <1984>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조지 오웰의 다른 책 <동물농장>을 펼쳐들었다.

이 책도 완독하지 못 하면 어쩌나, 그래도 이번에는 고전 100권 읽기를 위해 반드시 완독하고 말리라 다짐을 하고 책을 펼쳤는데,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 동안 어렵고 지루할 거란 생각에 이 책을 피해왔던 게 민망하게도, 책은 빠르게, 재미있게 술술 읽혔다.

잠깐 맛이나 볼까 하고 펴든 책을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나서, 내가 그 동안 무슨 근거로 이 책을 어렵고 지루한 책일 거라 여겼나 생각해봤다.

답은 금방 나왔다. '고전'이라는 타이틀 때문이었을 거다.

 

아마 중학생 시절에 만난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완독하지 못 하고 좌절을 맛보게 한 몇 권의 책 때문에 나도 무조건 '고전은 어렵다'라는 아주 짙은 색안경을 끼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후, 웬만해서는 '고전'이라 이름 붙은 책은 잘 읽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고전 읽기를 하면서 그 색안경을 조금씩 벗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겠구나. 목표 100권 중 이제 겨우 일곱 권 읽었을 뿐이니까). 어렵고 지루한 책을 고전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 다만 그 문학적 가치에 의해 붙은 이름이겠지. 어렵든 쉽든, 지루하든 재미있든 상관 없이 말이다. 어렵고 지루한 책이 싫다면 조금쯤은 쉽고 재미있는 책을 골라 읽으며 고전에 대한 선입견도 깨고 고전과 가까워지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이 책도 그러기에 좋은 책이다.

 

한 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동물들에 의한 반란. 의식이 깨인 동물을 중심으로 이기적인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들이 농장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가는 내용이, 동물들의 시각으로 쓰여 있다. 우선 사람이 아닌 동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비록 한 동물 농장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그곳의 모든 일상이 어떤 사회 체제, 어떤 나라, 어떤 지도자를 떠올리게 하여 마치 글의 주인공이 돼지나 암탉이 아니라 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느껴져 무척 생생했다.(작가가 실제로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를 과녁으로 쓴 글이니 말이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웃으면서도 뭔가 찜찜하고 (누구에게인진 모르겠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회에 다양한 구성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동물 농장에도 그와 다를바 없는 구성원들이 등장한다. 나는 그 중에 어떤 동물에 속할까, 생각해보았다. 우두머리 돼지는 절대 아닐 거고, 철저히 세뇌 되어 열심히 구호를 외치는 양떼도 아닐 거고, 나라도 조금 더 열심히! 라고 외치는 복서도 아닐 거고, 그렇다고 일신의 편안을 위해 물질에 정신을 파는 몰리는 되고 싶지 않고(아니라고는 못 하고?), 독재자 돼지를 지키는 충실한 개떼도 아닐 거고, 이렇게 저렇게 따지다 보니, 내가 얼마나 이 사회에 있으나마나한 존재인가가 느껴져 비참했다. 세상에 있는 세 부류 인간, 꼭 필요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있으나마나한 사람 중에 제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어렸을 때 이 얘기 듣고 반발했었지.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보다야 있으나마나한 사람이 낫지 않겠느냐고. 그런데 커서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만 있으면 사회가 발전이 없겠더라) 문득 나의 보잘 것 없음을, 떠올리게 되었다나. 뭐 책이야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독자들 읽기 나름이니까, 나는 이 책에서 엉뚱하게도, 조금 더 존재감 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두 주먹을 불끈(까지는 아니고).

 

고전은 어렵고 지루해, 라는 편견을 깨주는 책을 연달아 두 권 읽었더니, 이제 두려움이 조금 가신다.

앞으로 만나게 될 책들에 대해서도 기대가 크다. 이제는 조금 어렵고 지루한 책 만나도 바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 같다. 고전 읽기가 점점 즐거워진다.

(다음 책들 리뷰 쓸 때도 이 소리가 나와야 할텐데.)

 

아, 이 책에서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두 편도 만나볼 수 있는데, 그 중 '나는 왜 쓰는가'에서 한 부분 옮기며 마무리.

 

_ 책을 쓴다는 것은 마치 길고 고통스런 투병 과정처럼 끔찍하고 피곤한 작업이다. 저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마귀에 씌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피곤한 작업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마귀는 어린 아기가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지를 때의 그 본능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읽을 만한 책도 쓸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도 같다.(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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