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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이 책에 처음으로 밑줄을 그은 문장은,
사랑에 대한 미감을 상실한 것 같은 무미건조한 헛헛함을 자주 느꼈다. 모든 것엔 상미기간이 있는 것이다.(12)
였다.
사랑에 대한 상미기간이 만료된 나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문장들로 내 가슴에 만찬을 차려주었던 이 책.
참 많은 문장들에, '공감하기' 버튼을 클릭할 수 없는 대신, 빨간 밑줄들을 그어주었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포만감으로 행복했다.
행복하면서 쓸쓸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누경과 기현의 위로 자꾸 내 모습이 겹쳐지는 까닭이었다.
인생이 고독할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이 마구 흘러가버릴 거라고 했다.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고 했다.(15)
이 말을 들은 이는 기현이었던가, 나였던가?
기현의 손금을 봐 준 어떤 이가 기현에게 한 말이었고, 나의 사주를 봐 준 어떤 이가 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천성적으로 고독하다고 했던가? 평생 외로울 거라고 했던가?
천성적이든, 평생이든, 고독이든, 외로움이든, 어쨌든, 혼자라는 거지. 아무것도 곁에 머무는 것이 없을 거라는 거지. 기현처럼, 나도.
한 시인이 자신은 슬프게 태어난 사람이라 했지. 남들보다 슬픔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라고. 나도 그래요. 나는 고독의 함량이 높은 사람이에요.
……,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다. ……,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 말했다. ……,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 말했다. ……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말했다.(35)
……, 어떤 남자는 누경을, ……, 나는 나를, 이렇게 말했다.
이어지는 문장에 함께 밑줄을 그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만큼은, 35쪽의 그 문장들 속으로 걸어들어가, 누경이 내가 되고 내가 누경이 되는 것 같은, 소름이 끼치는 일체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때의 나는 얼굴에 그 단 하나의 표정, 무뚝뚝함만을 남긴 채 잊혀져가고 있을 때였다. 나에게, 나의 가족에게.(타인은 만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삶에 낙심한 사람은 매일, 매시간 가파르게 늙는다(35)는 것을. 그 단 하나의 표정은 나를 빠른 속도로 늙게 만들었고, 내 안에 고독의 함량을 높여만 갔다. 고독이 침잠한 내 방 안에 갇힌 나는,
세상과 사이가 나쁜 사람 같아 보여요. 등을 돌리고 사는 사람 같기도 하구요.(43)
책을 읽으며 주인공의 모습에, 그의 천성에, 그와 세상과의 경계에, 일상의 사소한 부분에 이렇게 많은 공감을 느끼는 책도 오랜만인 것 같다.(어쩌면 처음인지도.)
심지어는 일 년 내내 병원과 마트와 목욕탕과 도서관만 오간 누경의 모습과, 지난 한 달 여의 내 모습마저도 아프도록 닮아 있었다.
한 달 내내 집과 동생네 집과 어린이집, 이렇게 세 개의 집만을 오간 건 나였다. 누경처럼 나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타인에게 위로를 구하지도 않고 고통을 순순히 겪어내기로 했다. 나의 시간도 뭉텅뭉텅 흘러갔고, 나는 지금, 백기를 들고, 다시 세상으로 걸어나온 척.
벽처럼 지낸 그것도 삶이라 할 수 있을까.(205)
나의 모습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읽는다는 것은 참 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외의 위로가 되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고독에도 동지가 있는 편이 낫다. 혼자 고독한 것보다, 누경과 기현과 함께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조금쯤 든든하기도 했다.
누경과 서강주와 같은 사랑을 해보지 못 했고, 누경 앞의 기현 같은 모습이었던 적도 없는 나는, 이 책의 반만 읽어낸 걸지도 모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이 초대해 준 풀밭 위의 식사,는 지금의 내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만찬이었다.
나는 '고독'이라는 초대장 하나로 그들의 식사에 멋지게 함께 할 수 있었다.
"대체 무엇을 원해?"
"나의 고유한 리듬."
누경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암호 같았다. 내 고유한 리듬…… 그 리듬이 어떻게 생겨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다만 자신에게 맞추어 살기로 하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꼭 어떻게 살아야만 한다고 정해져 있는 법이 있는가. 천성이란 게 있다면, 천성대로 게으르고 천성대로 외롭고, 천성대로 불행하고 천성대로 가난하고 천성대로 만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천성대로 고독한 것도.(82)
천성대로 고독한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후식으로 즐기며, 그렇게 나와 그들의, 풀밭 위의 식사가 끝났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풀 냄새 가득한 식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