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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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에 앞서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글을 읽다가 놀랐다.

'생애 다섯 번째 자살 기도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하다니. 뒤의 작품 해설에는 그의 '자살 시도기'가 조금 더 세세하게 나와 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그는 정말 끊임없이 자살을 기도한다. 도대체 왜인지, 이 책을 읽으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익살로 자신을 무장하고 절대 가면을 벗지 않는 한 남자의 세 장의 사진과 세 편의 수기 이야기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절대로 익살꾼의 가면을 벗지 않는 이 남자 요조의 내면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는 수기는 어딘가 섬뜩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힘겹기도 하고, 그리고 공감이 갔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뜻하지 않은 문장에서 문득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느낌이 묘하다.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느낌. 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내 자신의 모습과 만나며 나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은 책 읽기가 주는 아주 귀중한 선물이다.

 

아아,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詞)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92)

 

내가 감췄기 때문에, 혹은 나는 보여줬지만 상대방이 그렇게 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는 듯이 이어져가는 인간 관계. 나의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나는 얼만큼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있는 것일까. 내가 보여주는 진실을 혹은 거짓을 사람들은 정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일까? 또한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굳이 정말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지금 아는 그만큼으로도 충분하겠지. 서로에게 보여지는 그 만큼으로, 익살꾼이면 익살꾼이게, 쓸쓸하면 쓸쓸하게.

 

이 책을 읽다가 그만, 나도 나를 참 많이 감추며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내가 익살꾼의 가면을 쓴 요조처럼 느껴져 내면이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나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니까. 일기장에도 내 마음을 숨기고 아닌 척, 안 그런 척 쓰는 인간이니까. 내가 아니라고 믿으면 진짜 아닌 줄 알고는, 바보처럼.

 

오전에 이 책을 읽고는 예상하지 못한 심란함에 빠져 있는 오후다.

무기력해졌다. 머릿속은 분주해졌지만, 복잡하고 싶지 않아 그만 둔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야 말로, 인간 실격,이라고 내 자신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아, 그래서 생애 다섯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이유를 알 것 같았느냐면,

글쎄, 이처럼 끊임없이 심오한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긴 했다.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다섯 번이나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져버린 사람의 심정을 내가 어찌.

 

 

_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不信)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27)

 

_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133~134)

 

_  만화가. 아아. 그러나 나는 큰 기쁨도, 큰 슬픔도 못 느끼는 무명 만화가. 나중에 아무리 커다란 비애가 찾아올지라도 상관없다. 거칠고 큰 기쁨을 맛보고 싶다.(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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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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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114)

 

컴퓨터 책상 바로 옆에 있는 책장에 메모지 두 장을 붙여 두었다. 몇 해 전에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김연수 작가의 글을 보고 일기장에 적어두었던 글들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웃고 싶다면 지금 여기에서 웃어야만 한다.'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없다. 우리는 인간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을 택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몸 어딘가에 내가 깨닫지 못 하는 어떤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절대로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과거.

내가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그려봐도, 아무리 행복을 꿈꾸고 달콤함을 기다려도 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보이는 미래.

내가 나 자신과 만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바로 저 둘, 과거와 미래에 있다.

나는 바로 지금 여기, 현재에 있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과거를 떠올려보며 지난 실수들에 아직도 손발을 오그라뜨리거나 이제는 잡을 수도 없는 그때의 행복에 아직도 미소를 짓거나, 혹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은 자신감과 행복으로 충만한 미래를 그려보며, 나를 억지로 거기에 가져다 놓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현실은 시궁창' 같기만 한데 말이다.

그래서 현실의 나를 바라보라고 조언하는 문장들이 보이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지금 여기'.

내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자리 바로 여기인데...

나는 왜 이렇게 과거로만 미래로만 숨어들며 현실을 피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내와 이혼하고 호텔에 머물며 아버지와 불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통장 잔고를 탈탈 털어 탬킨 박사가 추천하는 주식에 투자한 윌헬름.

그의 하루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는데, 내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 한 것인지, 사실 그의 이 구구절절한 하루 중 어디를 꽉 잡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현실에 처해 비참하고 서글퍼지느니 차라리 나를 과거나 미래의 아름다웠던 혹은 아름다울 것 같은 시간으로 살짝 옮겨 놓으면 안 될까? 정신 건강을 위해서.

밑줄 그은 문장은 굉장히 많았지만, 책 내용 자체가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다.

윌헬름을 알거지로 만들지만 또 윌헬름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탬킨 박사는 약간 돌팔이이자 사기꾼 같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나는 탬킨 박사가 등장 인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작품 해설에는 끝내 돌팔이 사기꾼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나는 지금도 그 박사는 결코 돌팔이도 사기꾼도 아니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책 속 그의 대사는 가슴 속에 새기고 싶은 문장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의 환자들도 그런 말을 들으며 치유 받지 않았을까?

 

가슴에 와 닿는 문장들이 많은 책이라, 나중에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때의 나는 오늘을 잡으며 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_ 시간을 낭비했다. 그 시간들은 이제 단념해야 한다. 그밖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134)

 

_도대체 위아래 어느 쪽으로 봐도 거꾸로 보이는, 트럼프 카드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109)

 

_ 여기, 내 가슴, 자네 가슴, 모든 사람들의 가슴 할 것 없이 사람의 가슴속에는 영혼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야. 수많은 영혼이 있지. 그렇지만 그중에서 중요한 영혼이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진짜 영혼과 가짜 영혼이야.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뭔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그러곤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느끼지. '만약 자네가 사랑할 수 없다면 도대체 자네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 말 알아듣겠는가?(120)

 

_ 사람의 가치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21)

 

_ 잘 가거라, 청춘이여! 오, 잘 가거라, 경이로웠지만 어리석게 허송세월한 나날들이여! 나는 그때 얼마나 철없는 멍텅구리였던가. 지금도 그렇지만.(52)

 

_ 그 사람은 미쳤지만 동시에 제정신일 수도 있어요. 요즘 세상에서는 뭐가 미쳤고 뭐가 제정신인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요.(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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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도감 - 꽃과 채소로 가득 찬 뜰 만들기 체험 도감 시리즈 5
사토우치 아이 지음, 김창원 옮김, 사노 히로히코 외 그림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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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마당 한구석에 내버려두었던 화분에 웬 싹이 올라와 있는 것을 며칠 전에야 발견했다.

진한 자줏빛 싹들이 제법 예쁜 모습으로 실하게 올라왔다.

싹의 모양만으로도 작년에 그 화분에 자라던 아이가 누구인지 알겠다.

작년 봄, 하동 쌍계사에 벚꽃놀이 갔다가 데려온 금낭화이다. 금낭화가 다년생이라는 걸 몰랐기에 그 '빈 화분'에서 이렇게 반가운 새생명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게다가, 내 기억에 의하면 작년에 심은 건 두 포기였는데, 올해는 화분 여기저기에 퍼져서 네다섯 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반가움이 배가 된다.

 

아, 이제 봄이 온다.

2주 전쯤에는 '봄이 왔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으나, 올 겨울은 봄을 지나치게 샘내며 쉬이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이제나저제나 어두컴컴한 집 안 구석에 움츠리고 있는 화분들을 다시 마당에 내놓아 줄까 눈치만 보는 마음에 조바심이 인다. 마당에 내놓고 시원하게 물줄기 뿌려주려고 기다리다가 지쳐 옹색하게 컵에다 물을 받아 조심조심 뿌려주고 만다.

봄을 향한 기다림은 정말 길고도 길다. 그 긴긴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이 책을 읽었다. '꽃과 채소로 가득 찬 뜰 만들기'를 알려주는 책, 『원예도감』.

 

나처럼 마당 가득 초록이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한 긴 기다림에 애태우는 사람들, 나처럼 늘 무언가를 기르지만 아직 어설프기한 한 사람들, 나처럼 '그린 핑거(식물을 잘 키우는 도사라는 뜻)'를 꿈꾸는 사람들, 나처럼 늘 가슴 한 구석에 꽃과 채소로 가득한 뜰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 나처럼…… 그러니까, 무언가를 가꾸기 좋아하거나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내가 활동하는 야생화 카페에 극찬을 하며 추천했던 책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이 책에는 『원예가의 열두 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다)와 함께 내가 가장 아끼는 '초록 책'이 될 것이다.

 

보통 실용서를 볼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골라 읽으며 내게 필요한 지식만 습득하는 책 읽기를 하게 되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부분도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여느 소설책 못지 않게 재미있기까지 해, 밤이 늦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못 했다.

책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장에서는 문학 속의 정원 이야기를 들려주며 바로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1년에 적지 않은 책을 읽는 편이지만, 내가 만난 책 중에서는 정원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은 책이 별로 없다. 가장 최근의 기억으로는,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올 겨울에 모 인터넷 사이트 연재로 읽은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무수국이나 백일홍이나 테이블야자 등과 같은 식물들이 자주 등장해 반갑고 향긋한 마음으로 읽었던 게 전부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해주는, 정원 이야기가 등장하는 책들이 무척 반가웠다. 스잔 힐의 『정원의 작은 길』, 필리퍼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프랜시스 버넷의 『비밀의 화원』, 크리스티나 비외르크의 『모네의 정원에서』,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 장 앙리 파브르의 『파브르 곤충기』, 어니스트 에반톰슨 시튼의 『시튼 동물기』, 엘리스 피터스의 『수도사의 두건』, 카렐 차페크의 『초록숲 정원에서 온 편지』 등이 이에 소개된 책들인데 이 목록을 잘 옮겨두었다가 '정원'을 주제로 한 책 읽기를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 먹어본다. 생각만해도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문학적으로 처음을 열어 준 뒤, 이제 우리가 뜰을 가꾸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내용들을 친절히 알려준다. 여러 정원의 형식, 원예에 필요한 도구, 정원 흙과 거름 만드는 방법, 씨나 알뿌리를 심는 시기와 방법, 식물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식물 늘리기, 그렇게 가꾼 뜰에서 얻은 것들로 만들수 있는 것들 등을 마치 아이에게 알려주듯이 친절하고 조곤조곤하게 전해준다. 아마도 실제로 어린 독자들도 염두에 두고 쓴 책인 듯, 책 내용 곳곳에 마당 한 켠을 쓰기 위해 부모님께 허락을 받으라던가 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물론 전적으로 어린이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은 전혀 아니다. 그만큼 쉽고 친절하게 알려준다는 이야기다.)

그 동안 내가 식물을 가꾸며 늘 어려워했던 부분인, 흙 만드는 법, 씨 뿌리는 시기, 해충 없애는 법, 각 식물의 특성 등에 대해서 이 책에서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올 듯 올 듯 오지 않는 봄을 향한 긴긴 기다림을 달래기 위해 집어든 책인데,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더 세게 불타오르고, 계속되는 강추위와 황사 소식이 야속하기만 하다. 언제쯤에나 나의 화분들을 마당으로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올해는 또 어떤 꽃들을 심어 내 마당과 마음을 향긋하게 가꿔볼까, 겨울 동안 잊고 있던 화분들에서 금낭화처럼 깜짝 선물을 만날 수 있으려나, 아아,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 마음에 온통 봄, 봄, 봄, 봄, 봄을 향한 외침뿐이다.

 

 

_ "옛부터 '반나절은 일하고, 반나절은 바라본다.'는 말이 있는데 원예 일은 바라보는 일이 아주 중요하지. 보고 있으면 식물이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거든. 요즘 사람들은 정원사가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게으름 피운다고 못마땅해 하겠지만."(210)

 

_ 실패를 하면 그 원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실패를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는 우리가 식물을 이해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262)

 

_ 뜰을 만들고 꾸미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꽃과 채소들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우리가 하지만 그 뒤 식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랍니다. 마치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부모 없이 아이는 생기지 않지만 일단 태어난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개척해야 하고 부모는 옆에서 그들이 자라는 것을 돌볼 뿐이듯 말이죠.(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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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굴기 중국역사기행
최대균 지음 / 푸른향기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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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접하던 것과는 좀 다른 여행서를 만났다.

이 책은 역사를 가르쳐온 전직 교사가 배낭 하나 메고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빈 경험을 기록한 역사 기행서이다.

'역사를 알면 도시가 보인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역사와 도시가 잘 어우러진 책이다.

 

중국어를 전공했으면서도 중국 역사에 참 무지하고 무관심한지라 가끔은 스스로가 한심하고, 남 보기에도 부끄럽고 그렇다.

'역사'라면 십 리 밖으로 줄행랑을 치면서도 '역사'라는 단어가 제목에 떡 하니 들어간 이 책을 읽겠노라고 집어들게 된 건, 앞으로 더 이상 무지와 무관심으로 무장하고 버틸 수만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책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중국 역사를 알려 줄지는 모르겠지만(많이 알려준다고 또 내가 다 받아들일 수도 없지만), 적어도 역사에 대한 관심은 불러일으키길 기대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를 향한 경탄의 마음이 끊이질 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역사를 알면 도시가 보인다'고, 역사를 아는 저자와 역사를 모르는 내가 본 도시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나는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습성 탓에, 중국에 얼마간 머무르는 동안에도 많은 곳을 다니지는 않았다. 그나마 얼마 다니지 않은 곳도, 대도시 몇 곳을 제외하고는 지명 조차도 기억하지 못 한다. 기껏해야 몇 장의 사진과 함께 간 이들과의 추억 정도를 기억 할 뿐.

그래서 이 책에서 만나게 된 도시들 중 내가 그 느낌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저자가 들려주는 중국 이야기가 나의 중국 이야기와 얼마나 다른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예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기억하는 데 있어서도, 나는 기껏해야 자금성이랄까, 이화원이랄까, 천단공원 같은 몇몇 유명한 명승고적의 외관만 떠오를 뿐, 그에 담겨 있는 역사적인 모습은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베이징 여행 시에 동행한 중국인 친구에게 간략한 설명을 들었어도 당시는 내 중국어 실력이란 게 역사적인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었거니와, 무엇보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베이징 이야기는 명, 청이 교체되던 역사적인 시기의 장면이라던가, 명나라 숭정제가 망국을 눈 앞에 두고 나무에 목을 메고 죽었다던가, 완공된 이화원에서 환갑잔치를 열던 서태후가 산동반도에 상륙한 일본해군 소식을 듣고는 하필 이런 때 오느냐고 역정을 냈다던가, 조선에서 끌려온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천단의 제사의식에 참여했다던가 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베이징 거리를 거닐며, 베이징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관광하며 전혀 떠올려보지도 못 했던 역사 이야기들이다.

 

역사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에게 가르쳐온 경험들을 살려 글로 녹여낸 것일까, 이야기는 쉽고도 매력적이다. 부담스럽지 않게 역사 이야기를 즐기며 중국의 유명한 고적지들을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서귀포 지명의 유래라던가, 증산도의 기원과 같이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아하, 그렇구나!' 하고 곁다리로 알게 되는 지식들도 꽤 재미있었다.

또 한 가지 눈에 띄었던 점은 저자의 성격이 꼼꼼한 것인지, 어디에서 어디까지는 얼마에 무엇을 타고 몇 시간을 달렸다, 어디에서는 어느 정도 수준의 호텔에 얼마를 주고 묵었다, 조식이 제공되지 않는다, 어디의 입장료는 얼마이고 케이블카는 얼마이다 등등을 꽤 세심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실제 여행 계획을 짤 때 경비 면에서 참고할 만한 꽤 실용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됐다.

 

감성적인 에세이 형식의 여행서를 좋아해서, 여행서라면 주로 그런 책들만 봐왔지만, 이번에 맛본 역사 기행서가 꽤 매력적이라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계속해서 이런 책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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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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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64)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 로먼과 과거에 그가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온 두 아들 비프와 해피, 그리고 늘 곁에서 그를 지켜주는 아내 린다.

1940년 대 미국의 한 소시민 가정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읽는다.

내 자식은 뭔가 다를 거라는, 자식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긍심은 윌리 로먼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가져봤을 모습이 아닐까?(그게 환상이 아닌 경우도 있을테고, 그런 환상이 일찍이 깨져버린 경우도 있을테고,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씩 기대에 어긋나는 자식의 모습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로 과거로 찾아 들어가는 윌리 로먼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아들(비프)의 편지를 받으면 무척 기뻐하다가, 아들이 집에 올 때쯤 되면 초조해지다가, 아들과 마주하면 어이없게도 화를 내고 말다툼이나 하게 되지만, 혼자 있을 때도 계속 비프에게 말을 걸며 끊임없이 비프, 비프, 비프를 찾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왜 이렇게 애잔하게 느껴지던지. 아버지의 꿈이었던 비프는 지금 '깡통' 같은 모습일 뿐인데.

 

당신은 요즘 애들이 어떤지를 몰라. 요즘 젊은 것들이란, 깡통이야. 잘하는 일이라곤 빈둥거리는 것밖에 없다니까.(77~78)

 

'요즘 애들 버릇없어'는 수천년 전의 벽화에서도 발견되는 말이라고 하더니, 예나 지금이나, '요즘 애들' '요즘 젊은 것들' 인정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렇다면 버릇이 없거나, 깡통 같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일 때 누려볼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조금 마음이 편할까? 젊으니까, 아직 멋모를 때니까, 앞으로 잘하면 되는 때니까.

 

아버지는 끝내 깡통 같은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함께 식사하자는 말에 구름 위라도 걷는 듯 붕 떠 있던 아버지를 식당에 혼자 버려두고, 아가씨들과 즐기기 위해 나가버린 그 철 없는 아들들을 위해. 홀로 남겨진 식당에서 윌리가 무슨 심정으로 씨앗을 찾는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이후 집에 돌아와 씨앗을 심는 윌리의 모습은, 짧은 장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 같다.

 

윌리 : 당근…… 1센티미터씩 띄워서. 30센티미터씩 열을 짓고. (간격을 잰다.) 30센티미터.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다시 간격을 잰다.) 상추. (봉투 겉면을 읽고 내려놓는다.) 30센티미터…… (벤이 오른편에 나타나 천천히 다가오자 동작을 멈춘다.) 상당한 액수거든. 으흠, 으흠. 훌륭해. 훌륭해. 마누라가 너무 고생을 했어요, 형님. 마누라가 고생이 너무 심했다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남자가 세상에 난 그대로 맨몸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남자라면 뭔가를 세상에 더하고 가야죠. 형님은 그렇게 못하죠. 형님은 못해요. (벤이 마치 끼어들 것처럼 가까이 온다.) 자, 이제 생각해 봐요. 너무 빨리 대답하지 말고. 20000달러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보세요, 형님. 저와 함께 이 문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해 보자고요. 전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마누라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아시겠어요?(151~152)

 

30센티미터씩 열을 지어 씨앗을 심은 것처럼, 시간의 열을 지어 꼬박꼬박 부은 보험료가, 빳빳한 놈으로 최소 20000달러가 보장이 되어 있다. 마누라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아들은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씨앗을 심는다. 씨앗을 심으며 계속 20000달러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떠난다.

 

슬프다.

여운이 참 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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