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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64)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 로먼과 과거에 그가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온 두 아들 비프와 해피, 그리고 늘 곁에서 그를 지켜주는 아내 린다.
1940년 대 미국의 한 소시민 가정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읽는다.
내 자식은 뭔가 다를 거라는, 자식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자긍심은 윌리 로먼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가져봤을 모습이 아닐까?(그게 환상이 아닌 경우도 있을테고, 그런 환상이 일찍이 깨져버린 경우도 있을테고,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씩 기대에 어긋나는 자식의 모습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로 과거로 찾아 들어가는 윌리 로먼의 모습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아들(비프)의 편지를 받으면 무척 기뻐하다가, 아들이 집에 올 때쯤 되면 초조해지다가, 아들과 마주하면 어이없게도 화를 내고 말다툼이나 하게 되지만, 혼자 있을 때도 계속 비프에게 말을 걸며 끊임없이 비프, 비프, 비프를 찾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왜 이렇게 애잔하게 느껴지던지. 아버지의 꿈이었던 비프는 지금 '깡통' 같은 모습일 뿐인데.
당신은 요즘 애들이 어떤지를 몰라. 요즘 젊은 것들이란, 깡통이야. 잘하는 일이라곤 빈둥거리는 것밖에 없다니까.(77~78)
'요즘 애들 버릇없어'는 수천년 전의 벽화에서도 발견되는 말이라고 하더니, 예나 지금이나, '요즘 애들' '요즘 젊은 것들' 인정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나보다. 그렇다면 버릇이 없거나, 깡통 같은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젊은이일 때 누려볼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조금 마음이 편할까? 젊으니까, 아직 멋모를 때니까, 앞으로 잘하면 되는 때니까.
아버지는 끝내 깡통 같은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함께 식사하자는 말에 구름 위라도 걷는 듯 붕 떠 있던 아버지를 식당에 혼자 버려두고, 아가씨들과 즐기기 위해 나가버린 그 철 없는 아들들을 위해. 홀로 남겨진 식당에서 윌리가 무슨 심정으로 씨앗을 찾는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이후 집에 돌아와 씨앗을 심는 윌리의 모습은, 짧은 장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 같다.
윌리 : 당근…… 1센티미터씩 띄워서. 30센티미터씩 열을 짓고. (간격을 잰다.) 30센티미터.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다시 간격을 잰다.) 상추. (봉투 겉면을 읽고 내려놓는다.) 30센티미터…… (벤이 오른편에 나타나 천천히 다가오자 동작을 멈춘다.) 상당한 액수거든. 으흠, 으흠. 훌륭해. 훌륭해. 마누라가 너무 고생을 했어요, 형님. 마누라가 고생이 너무 심했다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남자가 세상에 난 그대로 맨몸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요. 남자라면 뭔가를 세상에 더하고 가야죠. 형님은 그렇게 못하죠. 형님은 못해요. (벤이 마치 끼어들 것처럼 가까이 온다.) 자, 이제 생각해 봐요. 너무 빨리 대답하지 말고. 20000달러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요. 보세요, 형님. 저와 함께 이 문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생각해 보자고요. 전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고 마누라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아시겠어요?(151~152)
30센티미터씩 열을 지어 씨앗을 심은 것처럼, 시간의 열을 지어 꼬박꼬박 부은 보험료가, 빳빳한 놈으로 최소 20000달러가 보장이 되어 있다. 마누라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아들은 미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씨앗을 심는다. 씨앗을 심으며 계속 20000달러를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떠난다.
슬프다.
여운이 참 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