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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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유진 오닐이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은 절대로 발표하지 말라고 한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작가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가족사를 낱낱이 밝힌,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글이기 때문이다.

이 희곡 속의 이야기가 실제 작가 가족의 모습이었다면, 사후 25년 간 발표하지 말라고 한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다.

 

한때는 성공한 연극배우였지만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다 가족들에게 신뢰를 잃게 되는 아버지, 마약 중독으로 몇 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하다 나와서도 여전히 약물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 술과 여자나 즐기며 방탕하게 사는 큰 아들, 폐병에 걸려 요양을 가야 하는 병약한 둘째 아들, (여기에 갓난 아기 때 큰 아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들이 두 아들 사이에 하나 더 있었다) 이 네 가족의 이야기가 정말 아슬아슬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가정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지고 망가져 조그만 충격에도 금세라도 무너져내릴 듯 보인다. 그걸 가족들도 알기에 서로 조심하려 노력하며 눈치를 보고 태평한 모습을 가장하지만, 가장은 가장일 뿐, 취중진담이라고 술 기운을 빌려 진담을 쏟아내기도 하고 은연중에 속에 품었던 마음을 끄집어 내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이런 가족의 모습이었으니, 게다가 감추려야 감출 수 없이 자전적 글임이 탄로(?)나므로, 아무리 자신의 많은 부분을 대중 앞에 드러내는 작가라 하더라도 쉽게 세상에 내놓기 어려웠을 듯 하다.

 

남의 불편한 가족사를 들여다보는 마음인들 뭐 편할 수 있었겠나.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아 여러 날을 붙들고 있은 끝에 겨우 마지막 장까지 읽긴 읽었으나, 딱히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그다지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밑줄 그은 문장도 많지 않고.

책의 내용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이 가고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건 유진 오닐이 호텔방에서 태어나 기숙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호텔을 전전하며 살았다는 거다. '호텔'이라면 보통 여행 가서나 한번씩 묵게 되는 그런 장소인데, 요즘 읽는 책들에서는 이처럼 호텔에서 생활하는 등장 인물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바로 얼마 전에 읽은 <오늘을 잡아라>에서도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 엉터리 박사 등이 모두 호텔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시 미국에서 호텔이라는 장소는 지금처럼 타지에 나가면 묵게 되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던 걸까? 오늘날의 고시원 같은 개념인가?(그러니까 고시 공부를 위해 고시생들이 묵는 의미에서의 고시원이 아니라, 싼 가격에 묵을 수 있는 숙박업소로 이용되는 고시원 말이다.)

아무튼, 호텔에서 사는 미국인,의 모습이 무척 궁금하게 여겨진 책이었다.

언제 한번 이에 대해서 검색해봐야겠다.

 

 

_ 그래, 그만두자! 다 그만두고 다 피해 버려! 야망이라곤 없는 인간에겐 편리한 인생 철학이지. 고작 하는 짓이라곤……(25)

 

_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72)

 

_ 꼭 필요한 건데. 그게 있었을 때는 전혀 외롭지도 않고 두려움도 없었어. 영영 잃어버렸음 안 돼. 그런 생각만 해도 난 죽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아무 희망이 없는 거니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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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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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이 무척 섬뜩하다. 평소의 나라면 이 책 절대 읽지 않았을텐데(표지 무서운 책 싫어한다) 뭐에 홀렸는지 이 책을 머리맡에 떡하니 두고 며칠 밤에 걸쳐 읽었다.(책은 계속 뒤집어서 표지가 보이지 않게 하거나 다른 책을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도 엎어 놨음.)

책 내용도 표지 그림과 참 잘 어울린다. 소름끼치고, 끔찍하고, 잔인하고, 무섭다.

 

비행을 일삼는 한 소년이 주인공이다. 패거리와 어울려다니며 길 가는 노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한적한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집에 침입해 소설가인 남자 주인은 늘씬하게 두들겨 패고 여자 주인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윤간한다(이는 작가가 실제로 당한 일이라고 한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을 집으로 끌어들여 약물에 취하게 한 뒤 강간하고, 한 노파의 집에 몰래 침입해 물건을 훔치다 노파를 잔인하게 구타해 숨지게 한다. 주인공은 비록 청소년이지만 이미 전과도 있고 죄질이 심각한지라 교도소에 수감된다. 교도소에 갇혀서도 감방 동기를 사정없이 패 숨지게 한다.

이런 일련의 폭행 사건이 이야기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평소에 무서운 거, 잔인한 거, 끔찍한 거 안 보는데 어쩌다 내가...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말투가 무척 매력적이어서 중간에 읽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요 조그만 화자가 살짝 건방지고, 살짝 재치있게 내뱉는 말투가 참 재미있었다. 아마 그 덕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은 것 같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국가에서 새로 마련해 시도하는 '갱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내용인데, 그 갱생 프로그램이란 것도 참 잔인하다. 주인공에게 매일 어떤 약을 투입한 뒤 영화관으로 데리고 가 잔인한 폭력 일색인 영상을 보여준다. 눈을 감을 수 없게 집게로 눈꺼풀을 집어 놓은 탓에 보고 싶지 않아도 끝까지 볼 수밖에 없다. 2주간 이런 훈련을 거치고 나서 주인공은 범죄에 심각한 공포를 느끼는 상태가 된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의미인 것이다. 이 갱생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소설 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있고,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것이 논의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범죄자를 도덕적으로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폭력에 공포심을 일으키게 만듦으로써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 하게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범죄자 안의 범죄심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책 속 주인공도 수시로 마음속에 분노가 일면서 다시금 범죄를 향한 마음이 꿈틀거리지만 눈앞에 잔인한 폭력 영상이 펼쳐지고 피가 상상되면 그만 속이 울렁거리며 심한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어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게 진정한 '갱생'이고 '교화'일까?

 

소설에서는 비록 '실패작'임이 드러났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갱생 프로그램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 잔인한 방법이긴 하지만, 워낙 세상이 무서우니... 성범죄자 처벌에 관한 기사에서 이 책을 언급하며 어떤 사례를 들어 놓은 걸 봤는데, 성범죄자가 다시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거세했지만 결국은 또 다시 성범죄를 무더기로 저지르고 잡혔다더라(성범죄자는 거세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던 내게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뉴스였다).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뭔가 본질적인 교화나 교도가 아닌 이런 방법은 먹히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표지만큼이나 무서운 책이었다. 주인공의 말투에 후한 점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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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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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우리 가족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날 줄 알아!'라고 쓰여 있었다.

책 표지 가족들 말이다.

 

동네 어르신들이 빌라 앞 소파에 앉아 수근거리는 이야기를 빌리자면,

쥐 잡아 먹은 거모냥 입술 시뻘겋게 칠하고 다니는 여편네와, 가막소를 수도 읎시 드나든 새끼 밴 도야지 같은 놈과, 북어대가리같이 비쩍 마른 마약쟁이와, 화냥기가 있어서 사내라면 죽고 못 사는 년과, 지 에미 닮아 벌써 싹수가 노란 딸내미가 그 가족 구성원이다.

이들이 좁디 좁은 302호에 모여 함께 살게 되었다. 평균 나이 49세를 기록하며.

아니, 근데 저것들은 낫살이나 처먹고 무슨 웬수가 져서 아직까지 늙은 지 에미 등골을 뽑아먹고 있댜?(49)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구석의 이야기라기에 간단한 흥미거리 말고 뭐가 있겠는가 싶었다. 그래도 천명관 작가의 작품이니 입담 하나는 구성지겠지. 그래 천명관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는 어떤가 구경이나 해볼 요량이었는데, 읽다보니 내가 구경을 하는 건지 그 가족 구성원이 되겠다는 건지...

'이눔의 집구석' 이야기에 공감을 하면 이건 어찌 되는 건가? 알고보니 우리 집도 '이눔의 집구석'과 다를 바 없었더란 말인가?

물론 우리 집은 이 엄청난 아우라를 내뿜는 집안과 많이 다르다. '가막소' 들락거린 자식도 없고 마약쟁인지 알코올중독자인지도 없고 바람피고 남편한테 쫓겨난 딸내미도 없고 담배 피우다 들켜 삼촌에게 '삥 뜯기는' 조카도 없고 왕년에 사랑의 불꽃에 휩싸여 가족들 버리고 도망갔던 엄마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 가족의 어떤 모습들에서 우리 가족의 모습을 찾게 되고, 저 멀리 뒷짐 지고 서 있던 나는 좀 더 그 가족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언니 손전화에는 내가 '이교수님'으로 저장되어 있다. 가끔은 그렇게 나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언니 손전화에 내 이름이 '이교수님'으로 뜨는 걸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들고 남들 앞에서 그런 호칭으로 나를 부를 때면 당장 그 입을 틀어쥐고 싶어진다(아마 이 책 속 '오감독'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교수님'이었으면 그렇게까지 정색할 이유가 뭐가 있으랴. 문제는 내가 일주일에 한 번 강의 나가는 시간 강사일 뿐이라는 거지. 알아주지도 않는 지방 대학의 시간 강사 동생을 두고 "대학 교수님이에요~"라고 말하는 언니와 영화 한 편 찍고 완전 망해 먹어 십 년째 '백수'에다 이제는 알코올중독까지 되어버린 동생을 '오감독'이라고 부르는 오함마의 모습이 겹쳐졌다. 겨우 시간 강사 하는 걸 가지고 교수님 대접을 받고, 달랑 영화 한 편 찍고 망해먹은 걸 가지고 감독님 대접을 받고, 에잇 정말 변변치 못한 집안인 게 닮았다.

 

'나'가 스스로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고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는 때에조차 가족들은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도 우리 집과 닮았다. 겉으로 내색은 안해도 다들 '오감독'이 다시 영화를 찍고 영화 감독으로 성공하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거다. 어머니의 유품으로 '나'의 영화 포스터가 잘 접혀 보관된 채 발견된 것도 그렇고, 급하게 한국을 떠나면서 진지하게 "오감독"이라고 부르는 오함마의 말투에서도 그들이 '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끝내 버리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영화 감독으로 대성하리라 믿고 있는 거겠지. 우리 가족들이 내가 번역가로 대성하리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언젠가 남동생이 '우리 둘째 누나는 통역사예요'라고 말할 때 무척 자랑스럽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도 한때는 통역사였지. 안타깝게도 '나'가 첫 영화 말아먹고 실의에 빠져 허송세월 한 것처럼, 나도 어느 날 맡았던 동시통역 하나 말아먹고 실의에 빠져 다시는 통역 부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말았다. 요샌 통역 안 나가느냐는 가족들에게 이젠 번역만 할 거라고 말해 두었지만, 그때 상실된 자신감은 번역으로도 이어져 나는 어디에도 이력서도 넣지 않고 있다. 그러니 번역 일인들 많을 턱이 없다. 그래도 가족들은 내 이마에 '나 번역 중이야'라고 쓰여 있는 날은 집안 일도 안 시키고 얼른 들어가 일 하라고 배려해 준다. 무슨 대단한 번역이나 하는 줄 알고, 나중에 번역가로 대성할 떡잎인 줄 알고. 아, 정말 '나'와 마주 앉아 술잔 기울이며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나누고 싶어지는구나! 오함마의 동석도 대환영이다.

 

이런저런 장면들에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정말 세상에 어느 가족이든 '평범'한 모습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굳이 '가족'으로 묶어 놓지 않더라도 이 지구에 발 딛고 사는 한 사람 한 사람 누군들 '평범'한 사람이 있으랴? 얼마 전에 친구 셋이 모여 수다 떨다가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A : 내 주위에는 다 희한한 사람밖에 없어(물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있던 나머지 둘도 포함된 거였다).

B : 왜? 나는 정상이지 않아?

A : 너도 독특해

C: 이 세상엔 다 자기만 정상이야.

뭐 결론은 A도 B도 C도 다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는 거고, 또한 A도 B도 C도 다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한 개인도 이럴진대 그들 여럿이 묶여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단위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하기만 하랴. 평범함 속에 '이건 뉴스거리군!' 싶은 희한한 일도 있는 거고, 독특함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거 아닌 듯한 평범함도 있는 거고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한 우리 집에도 가끔은 오함마도 살고 '나'도 살고 미연이도 살고 민경이도 살고 칠순 노모도 살고 그러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의식을 못 했을 뿐,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을 뿐, 어쩌면 내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아 왔을 뿐.

 

어쨌든 나는 이 책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 보고 그 동안 잊고 있던 우리 가족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어서다. 평범한 추억이든 독특한 추억이든.(아니, 평범과 독특은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내 시점인가 다른 누군가의 시점인가.)

오랜만에 가족들 둘러 앉아 도란도란 지난 추억을 꺼내 펼쳐놓고 싶다. 이들 가족처럼 같은 추억인데도 누군가에겐 아름다웠고 누군가에겐 힘겨웠던 그런 장면이 우리 가족에게도 있다.

"난 그때가 제일 좋았는데?"

"난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면 끔찍할 것 같아!"

희한한 일이지만 그렇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서로 다른 추억을 가진 가족이라는 이름. 서로의 마음 속에 또 어떤 장면들이 서로 다른 색깔로 칠해져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 이야기가 다채로워지려면 지금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우리 집 아들내미가 반드시 동석해야 한다. 녀석의 휴가를 목 빼고 기다려본다.

 

모든 가정의 이마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집이 한 독특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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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2010-04-18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든 가정의 이마에는... 정말 그럴 거 같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한 독특' 안 하는 집안이 있을라구요.^^

원주 2010-04-19 02:05   좋아요 0 | URL
어제는 전에 함께 공부하던 언니를 만나 수다 떨다 보니 서로의 가정사가 나오고 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가정사도 나오고.... 그러는데 제 머릿속에는 자꾸 이 책이 생각났어요. 역시, 마냥 평범하고 마냥 평탄한 집은 없구나, 하는 생각에요..^^;;
 
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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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 년 동안 나는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 허파에 시퍼렇게 피멍이 들도록 속울음을 참으며 겨우 살았다.(23)

 

사랑하는 아들이 짧은 유서만을 남긴채 훌쩍 떠나버린 후, 아버지는 삼 년 동안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거다. 얼마나 속울음을 울면 '허파에 시퍼렇게 피멍이' 든다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 허파뿐 아니라 아버지의 속은 온통 시커멓게 타버렸을 거다. 그리고 삼 년의 세월을 견뎌낸 후, 아버지는 옆구리에 생긴 절벽을 넘기로 한다. 마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몸으로만 넘을 수 있는 절벽이었다. 아버지는 고비 사막에서 생의 고비를 넘고자 했고, 소설로 그 모든 걸 녹여내었다. 이는 소설 속 이야기이기도 하고, 정도상 작가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거기에 있었고 다만 닿을 수 없었다. 살아오면서 내가 손을 내밀어 잡으려던 모든 것이 신기루였을까. 그토록 간절하게 잡으려 했으나 잡을 수 없었던 신기루들. 잠시 내 곁에 머물던 오아시스 같은 행복들, 혹은 내가 머물렀던 행복을 생각하니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27)

 

인터넷에 연재할 때도 챙겨보았던 소설이었다. 소설이 연재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작가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이 소설로만 보일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은 가끔은 독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약이 되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후자였다. '약'이 되었다는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이후 소설 속 아버지의 마음이 무척이나 사실적이고 더욱더 애절하게 다가와 소설의 한 문장도 허투로 보아넘겨지지 않고 소설 속의 어느 한 감정도 공허하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온전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재글을 만나던 어느 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속에 아주 커다란, 하지만 야트막한 봉분을 가진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무덤은 온통 까만천으로 뒤덮여 있었고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무덤 위에 있었다. 여자는 터지는 울음을 참지도 못한 채 작은 소반에 차려진 밥을 힘겹게 꾸역꾸역 입에 넣고 있었고, 남자는 그 옆에 서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며 "이제는 보내줘야해"라고 말을 했다. 남자는, 그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정도상 작가의 얼굴이었다. 내가 작가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도 없는데 감히 주제넘게 이런 꿈이라니, 싶은 마음에 어이 없기도 했지만, 꿈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연재글을 읽던 당시에도, 이렇게 책으로 다시 읽게 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생의 한 고비를 간신히 넘으면 또 만나게 되는 고비, 어쩌면 나는 그 고비를 건너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고비의 한복판에서 나는 물었다.(49)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아들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아기 낙타의 탄생, 유목민 아기의 탄생, 춤추는 별의 탄생이라는 세 번의 탄생을 통해 '온갖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독자는 소설속의 '온갖 상처'만을 너무 들여다 보려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위의 꿈을 꾸고, 아직까지 떠올리고 있는 것도 그 흔적이 아닐까). 너무 깊은 아픔에 빠져들어버렸다. 그래도 지속되는 삶이라는 게 있다는 걸 잊고 말이다. 이제야 드는 생각은, 이 책은 작가 마음속의 슬픔을 만천하게 알리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읽는 이에게 어떤 동정이나 슬픔의 마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쓴 글도 아니다. 삶이란 고비를 넘는 것과 같다는 것, 고비를 넘고 또 고비를 하나 넘고 또 다른 고비를 하나 넘으며 그렇게 끝도 없는 고비를 넘으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항상 '고비의 한복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말마따나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다가도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살아지는 것이 아니던가', 삶이라는 건.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혼돈이 별로 탄생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65)

 

작가는 그 안의 많은 상처와 고통의 시간으로 단련한 혼돈을 『낙타』라는 별로, 춤추는 별 하나로 탄생시켰다. 그 혼돈이 얼마나 깊고 어두웠을지 짐작이 가기에, 아니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기에 이 춤추는 별의 탄생 앞에 더욱더 경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읽고 쉽게 느끼고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때론 울음을 삼키느라 힘겹기도 했지만, 먼 옛날 흉노족의 화가가 한 점 한 점 정성스레 쪼아 그린 암각화처럼 작가가 한 자 한 자 그의 내공을 다해 그려낸 문장들 앞에 때론 숨이 막히고 때론 감동하고 때론 삶을 배웠다. 수많은 문장들에 밑줄을 긋느라 자주 손을 멈추었다.

 

세상의 모든 양은 한번 죽으면 다시 살아 초원을 밟지 못하나니. 어제의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오늘의 대지를 밟아라!(156)

 

죽어버린 아들을 사막 모래속에 묻고도 어미는 역시 새끼를 잃은 낙타의 등에 올라타 떠나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그렇게 어제의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오늘을 걸어가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내 삶의 고비를 낙타의 걸음으로 넘는 방법을 조금쯤은 배운 것 같다. 더 이상 혼돈에만 머무르지 않고 춤추는 별을 탄생시킬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규와 아버지의 여행을 투명 낙타처럼 따라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규의 인사처럼, 저도 여행 즐거웠습니다.

 

 

_ 마음으로 절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절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몸이었다.(14)

 

_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타인 혹은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상처를 준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내가 준 상처 때문에 나는 언제나 아팠다.(49)

 

_ 추억이란 과거의 어느 순간을 왜곡하고 미화하여 편집된, 새로운 기억이었다. 나는 자주 추억에 속았다.(66)

 

_ 언어가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득한 순간들이 많았다.(92)

 

_ "나는 그냥이라는 말이 참 좋더라. 특별한 이유는 아니면서 그것만큼 확실한 이유도 세상에 없는 거 같아."(164)

 

_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쓸쓸해지기도 하는 존재였다.(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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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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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가 자신이 사신으로 방문했던 도시들을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했을 때 칸이 그의 말을 모두 믿은 것은 아니었다'

라는 문장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이 책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나온다. 바로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해주는 도시들이다.

모두 우리의 지도에서 찾을 수 있는 도시들이 아닌, '보이지 않는 도시들'.

 

도시와 기억, 도시와 욕망, 도시와 기호들, 도시와 교환, 도시와 이름, 도시와 눈들, 도시와 죽은 자들, 도시와 하늘, 섬세한 도시들, 지속되는 도시들, 숨겨진 도시들……

여러 성격에 따라 수많은 도시가 묘사되지만, 어쩌면 그 모든 도시들은 하나일 수도 있고, 같은 도시의 다른 이름, 다른 도시의 같은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처음에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요즘 계속 읽어오던 소설들과는 확실이 무언가 다른 느낌, 다른 구성의 글이어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 시작 전에 배경이 되는 도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하고 얼만가를 더 읽어 갔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이 아니라 이 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수많은 도시들임을 깨닫고서야 나는 비로소 '정상궤도'에 진입해 다음 이야기를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주인공'들의 매력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도시들에 대한 묘사와 묘사를 이루고 있는 문장들이 모두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책을 읽는 중에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이 책의 제목에 빨간 밑줄을 긋고 별표를 잔뜩 그려두었다.

꼭 다시 읽어 볼 책,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계속계속 읽어보고 싶은 책,이라고.

 

책을 얼마 읽기도 전에 지인들에게 '강추' 문자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이 있다.

이 책이 바로 그랬다. 나의 온 마음과 정신이 이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무척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 기쁘고 또 기쁘다.

 

 

_ 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 있습니다.(18)

 

_ 사실 제노비아를 행복한 도시로 분류해야 할지 불행한 도시로 분류해야 할지 결정하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그런식으로 도시들을 둘로 나누기보다는, 여러 해가 흐르고 변화를 거듭해도 욕망에 자신들의 형태를 부여하기를 계속하는 도시와, 욕망에 지워져버리거나 욕망을 지워버리는 도시, 이렇게 두 종류고 나누는 편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48)

 

_ 젬루데 시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형태가 바뀝니다. 만일 도시를 지나가면서 휘파람을 불다가 얼굴을 들면, 폐하계서는 아래에서 위로 도시를 보실 수 있습니다. 창턱, 바람에 날리는 커튼, 뻗어 나오는 분수의 물줄기가 보일 겁니다. 만일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고 걸어간다면, 폐하의 시선은 땅바닥과 개울, 하수구 뚜껑, 생선 비늘, 종이 쓰레기 들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84)

 

_ 기억 속의 이미지들은 한번 말로 고정되고 나면 지워지고 맙니다. 저는 어쩌면, 베네치아에 대해 말을 함으로써 영원히 그 도시를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도시들을 말하면서 이미 조금씩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113)

 

_ '살다 보면 자기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 가운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날이 찾아오게 돼. 그러면 마음은 다른 얼굴, 다른 표정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 새로운 얼굴을 만날 때마다 거기에 옛 형상을 새기고 각 얼굴에 가장 적당한 가면을 찾게 되지.'(122)

 

_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궁금하면 읽어보세요~! 옮기자니 길어서;;)(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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