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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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세요.

이 이야기는 바로 그 '극락'에서 펼쳐진답니다.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 지금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파괴된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뉴올리언스. 뉴올리언스의 한 낡은 집이 바로 이 이야기의 무대이다.

그 낡은 집에는 스텔라가 남편 스탠리와 함께 살고 있고, 어느날 갑자기 스텔라의 언니 블랑시가 이들을 찾아온다. 블랑시는,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세 사람이지만 불안불안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단숨에 읽힌다.

 

"좋아요. 다 털어놓을게요. 그게 내 방식이에요. 난 거짓말을 많이 해요. 여자의 매력이란 결국, 절반은 신기루 같은 거 아닌가요. 하지만 사안이 중대할 때 나는 진실을 말해요. 그리고 이건 진실이에요. 살아오면서 내 동생이든 당신이든 그 누구도 속인 적이 없다는 거죠."(39~40)

 

거짓말을 많이 한다면서도 살아오면서 그 누구도 속인 적이 없다는 블랑시. 블랑시와 스탠리와의 관계는 첫만남부터 삐그덕댄다. 온갖 화려한 옷과 장식으로 온몸을 치장했으면서 고향의 저택을 빚으로 날렸다는 블랑시의 말을 스탠리는 믿을 수 없다. 블랑시로 인한 스탠리의 불편한 심기는 임신 중인 스텔라를 향한 손찌검으로까지 이어지며 이 '가족'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는다.

 

갈등 중간에는 스탠리의 친구인 미치와 블랑시의 로맨스도 잠깐 등장한다. 첫 눈에 서로에게 끌린 둘의 모습에 잠깐 긴장을 내려 놓고 마음이 살짝 달달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때에도 역시 자신을 치장하기에 급급한 블랑시. 그런데 어쩐지 거짓 일색인 듯 한 블랑시가 그렇게 밉지만은 않다. 블랑시 마음속의 상처가 드러나기 때문일까?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게 뭐 대수인가 싶기도 한데, 블랑시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과의 이별에서 가슴속에 아주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 때문인 것 같다. 블랑시가 이렇게 '거짓'으로 자신을 도배하고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이게 된 것은. 그러니까, 블랑시가 밉기보다는 얼마나 사랑했으면...하고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버린다.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인데, 그렇게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뿐인데, 결국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혀버린 블랑시는 미치와의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스탠리에게 겁탈 당한 충격에 정신을 놓고, 끝내는 스텔라와 스탠리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고 슬퍼하는 스텔라이지만, 스텔라는 블랑시를 믿었을까?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버리고 떠나온 고향 집을 지키며 블랑시가 혼자 감내해야 했을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았을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도착한 극락에서 지옥을 맞이한 블랑시, 끝내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블랑시. 그녀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

 

 

_ 봄이 되어 아이들이 처음으로 사랑을 발견하는 걸 보면 감동하곤 해요! 일찍이 누구도 사랑을 몰랐던 것처럼!(57)

 

_ 뉴올리언스의 비 오는 오후를 좋아하지 않나요? 한 시간이 그냥 한 시간이 아니라 마치 영원의 작은 조각이 손에 쥐어진 것 같고, 그리고 그걸로 뭘 해야 할지 모르잖아요.(88)

 

_ 소년이었어요, 그저 소년이었어요. 내가 어린 소녀였을 때죠. 열여섯에 발견했어요……. 사랑을 말이죠. 갑자기 너무 완벽하게요. 반쯤 그늘에 잠겨 있던 뭔가에 갑자기 눈부신 불을 켜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내 세계를 치고 들어왔어요.(102)

 

_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131~132)

 

_ 부서지고 시들고 그리고…… 후회와…… 비난들……. "네가 그렇게 했더라면, 내가 그 값을 치루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135)

 

_ 자네 행운이 뭔지 아나? 행운이란 자신이 운이 좋다고 믿는 그 자체야.(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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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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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을 읽고 그 재미에 푹 빠져 춘향전도 찾아 읽었다.

춘향전 역시 '열녀춘향수절가(완판본)'과 '춘향전(경판본)'이 함께 실려 있다.

'열녀춘향수절가'가 '춘향전'에 비해 내용이 길고 묘사가 세세하다는 차이가 있는 외에도, 둘에서 묘사되는 춘향의 성격이 약간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열녀춘향수절가'에서는 제목 그대로 춘향을 열녀로 묘사하고 있는 데 반해, '춘향전'에서의 춘향은 어딘가 '요부'의 기질이 엿보이는 듯 했다.(내가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

 

이 책은 읽히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는데, 내가 비록 판소리는 잘 모르나 속으로 판소리처럼 읽혀서 그랬다.

문장에 운율의 맛이 참 뛰어나다.

 

열여섯 청춘 남녀(청소년 남녀가 아니고?)의 사랑 이야기가 어찌 이리 야할꼬!

(향단과 방자) 둘이 다 건너갔구나. 춘향과 도련님 마주 앉아 놓았으니 그 일이 어찌 되겠느냐.(55)

그 일이 어찌 되었겠는지는 상상하시던지, 책을 읽으시던지.

둘이 서로 희롱하는 중에 주고 받는 '사랑가'는 또 어찌나 아름답고 간질간질하던지.

사랑에 빠진 남녀 청춘들에게 필독서로 춘향전을 권해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랑가'뿐 아니라 중간중간 등장하는 노랫말이 마음에 쏙쏙 와 박히는 것들이 많았다. 사랑이면 사랑, 그리움이면 그리움, 아픔이면 아픔, 다 노래가 되어 흐른다.

 

이 책을 읽은 게 1주일 전이던가 2주일 전이던가. 그때는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 얘기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인데 뭐 새로운 게 있는가 싶어 그냥 예사로 읽어 넘겼는데, 요즘은 자꾸 사랑에 빠진 이 도령이 책방에 앉아 책은 못 읽고 몸을 배배 꼬던 장면이 생각난다.

책을 펼치니 공자 왈 춘향, 맹자 왈 춘향, 하늘 춘향 땅 춘향, 온통 춘향 춘향 춘향이라 '애고애고 보고지고' 탄식을 하기에 이르르는데,

나는 요즘 책에 누가 자꾸 나타나기에...

이게 다 봄 탓이렸다. 곱게 단장하고 그네를 뛰러 가야 하나.

춘향전을 조금 늦게 지금쯤 만났으면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살짝 해봤다.

 

 

_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괴로움이 다하면 즐거움이 올까 기다림도 적지 않고 그리움도 오래로다. 일촌간장 굽이굽이 맺힌 한을 님 아니면 누가 풀꼬. 하늘은 굽어 살피시어 빨리 보게 하옵소서. 다하지 못한 사랑 다시 만나 백발이 다 닳도록 이별 없이 살고지고.(92)

 

_ "어제는 저 날이 뒷덜미를 치는지 그리 빨리 가더니, 오늘은 뒤를 결박하였는지 어찌 그리 더디 가는고? 날이 심술도 불량하다."(198)

 

_ 반나마 늙었으니 다시 젊어지진 못하여도 이후나 늙지 말고 항상 지금처럼 되고지고 백발이 스스로 짐작하여 늦게 늙게 하여라.(231)

 

_ "이 글을 못 읽겠도다. 글자가 다 뒤집혀 보이는구나. 하늘 천(天)이 큰 대(大) 되고 『사략』이 노략이 되고, 『시전』이 선전 되고 『서전』이 딴전 되고, 『통감』이 곶감 되고 『논어』가 붕어 되고, 『맹자』가 탱자 되고, 『주역』이 누역이 되어, 보이는 것이 다 춘향이라. 보고지고. 칠 년 큰 가뭄에 빗발같이 보고지고. 구 년 홍수에 햇빛같이 보고지고. 달 없는 동쪽 하늘에 불 켠 듯이 보고지고. 통인, 방자, 군조, 사령, 별감, 좌수, 약정, 풍헌, 급창이 다 춘향으로 보이는 듯 온 집안이 다 춘향이라. 이를 어찌 하잔말고. 보고지고, 잠깐 보고지고."(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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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
허균 지음, 김탁환 엮음,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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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는, 이라는 유행어를 낳은(?) 홍길동전을 드디어 만나보았다.

글쎄, 어렸을 때 홍길동전을 읽은 적이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책 내용을 거의 다 알고 있는, 그래서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리는.)

 

이 책에는 홍길동전이 서로 다른 판본으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완판 36장본'이고 다른 하나는 '경판 24장본'이다.

완판과 경판이 뭔가 궁금해 사전 검색을 해보니 완판본은 '조선 후기에, 전라북도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의 고대 소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 있어 향토색이 짙다. '라고 나오고 경판본에 비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경판본은 '서울에서 판각한 책.'이라고 나오고 묘사가 완판본에 비해 간결하다고 한다.

'완판 36장본'과 '경판 24장본'은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느낌을 전해주고 있어 두 판본으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홍길동전은 내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있는 것보다 훨씬 환상적인 요소가 강했다.

홍길동의 신비한 탄생에서부터 자신을 해치려는 자객을 죽이고 집을 떠나는 장면이나 엄청난 괴력을 선보이고 도적떼의 두목이 되는 모습,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 등을 보다보면 홍길동의 실제 모델이었던 도적 두목이 얼마나 기개가 뛰어난 인물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책에 실려 있는 백범영 교수의 그림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책 뒷부분에는 홍길동전 영인본도 실려 있다.(영인본은 '원본을 사진이나 기타의 과학적 방법으로 복제한 인쇄물.'이라고 한다.)

전에 연구실에서 일할 때 옛 서적을 많이 봤었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한 자 한 자 따라 읽어보기도 했다.

 

책 한 권에 참 다양한 재미가 담겨 있다.

조금씩 다른 두 이야기를 비교해 읽는 맛, 글을 빛내주는 그림을 감상하는 맛, 고서적을 경험하는 맛,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의 기억은 되살리고 몰랐던 부분은 새로 발견하며 읽는 맛.

 

홍길동전의 재미에 푹 빠져 내친김에 춘향전까지 찾아 읽었다. 아름다운 우리 문학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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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과 다른 사람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4
세스 노터봄 지음, 지명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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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무척이나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필립과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이 담긴 1장은 정말이지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무척 아름다운 부분이다.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 하면 바로 이 필립과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린 필립의 눈에 이상하게만 보이는 칠순 노인인 알렉산더 삼촌, 아아 내게도 이런 삼촌이 있었다면!

네가 필립이냐? 빈손으로 왔어? 우리 축하 파티를 할까? 네가 즐겨하는 게 뭐냐?

저녁 늦게 아니면 한밤중에 버스 타고 다니는 거, 물가에 가 앉아 있는 거, 비 맞고 쏘다니는 거, 누군가와 뽀뽀하는 거 좋아한다는 필립을 위해 알렉산더 삼촌이 마련한 축하 파티는,

버스를 타고 먼저 루넌으로 갔다가 다시 로스드레흐트로 되돌아오자꾸나. 거기서 호숫가에 가 앉아 있다가 뭘 좀 마시든지 하고, 그런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다.

그렇게 들른 호숫가에서 칠순의 삼촌이 운다. 우는 게 아니라고 말하지만, 삼촌은 울고 있다.

왜 결혼 하지 않았느냐는 필립의 질문에 삼촌은 이렇게 대답한다.

"난 나 스스로하고 결혼한 셈이지. 원래 그대로의 나 자신이 아니라, 나로 변신해 버린 추억하고 말이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니?"

필립도 나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삼촌의 그 말은 왠지 굉장히 멋있게 들렸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도 축하파티는 끝나지 않았다. 삼촌은 필립을 다해 열정적으로 피아노 연주를 해준다. 아아, 알렉산더 삼촌! 내게도 이런 삼촌이 있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칠순의 알렉산더 삼촌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알렉산더 삼촌과 그의 꼬마 친구 폴 스웨일로의 이야기...

 

책 전체 분량의 1/5도 안 되는 이 장면에 완전히 반해버려 나는 이 책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졌다.

 

책의 나머지 부분은 필립이 중국인 소녀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제목 그대로, 필립과 다른 사람들.

사실 훨씬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 이야기들은 내게 그렇게 큰 감흥을 안겨주지 못 했다. 그 누구와의 만남도 알렉산더 삼촌과의 만남만큼 와 닿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잔뜩 기대하고 읽어나간지라 조금쯤 아쉬운 마음이 든 게 사실이다.

 

다음에는 알렉산더 삼촌만 좋아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도 좀 더 관심을 기울여줘야지.

아아, 이 아름다운 앞부분을 얼른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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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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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 두 작품이 실려 있다.

처음에는 두 작품인 줄 모르고 1막, 2막의 개념인 줄 알고 읽다가 한참을 어리둥절해 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단 두 명만의 인물이 긴 대사를 주고 받고,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마침표가 없다) 독백이다.

이처럼 독백이나 독백에 가까운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이 많은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몇 권 안되는 희곡 중에서는 처음인지라 무척 신선하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내용 자체는 좀 심오하고 어려워서 잘 읽어내지 못 했지만, 독백의 분위기도 무척 마음에 들고, 밑줄 그은 문장도 많았다.(앞의 책에서는 밑줄 그은 문장이 별로 없었다고 투덜댔는데, 이게 바로 내 '취향'이다. 나는 밑줄 긋게 만드는 문장이 많은 책을 좋아한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밑줄 그은 문장이 적으면 '건진 게 없다'며 허전해지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건진 게 많은, 만족스러운 책이 되겠다.)

 

두 작품 중 나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가 더 마음에 들었는데, 손님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그걸 가지고 있으니 팔 수 있다는 딜러와, 스스로도 원하는 게 뭔지 모르므로 그걸 팔 수 있을 리 없다는 손님 사이에 펼쳐지는 자기 주장이 무척 흥미로웠다.

 

사실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다른 일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책 속에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자기 전에는 꼭 책을 읽어야 하는 습관을 버리지도 못 해 딴 생각과 책장 사이를 오가며 읽느라, 읽으며 책에게도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딴 데 정신 팔며 너를 읽으며 안 되는데, 이렇게 멋진 문장들이 내 눈과 마음을 호강 시켜 주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허술하게 너를 읽다니...

 

이 책 역시 다시 읽을 책 목록에 올려두었다. 그때는 좀 더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만나야지.

 

 

_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 회상에 젖고, 땅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슬퍼집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아쉬워하는 것과 그 무엇을 갖지조차 못했음을 회상하는 것은 모두 똑같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발이 잠시 머물게 된 위치가 어디건 간에, 그 높이에서 자기 앞을 똑바로 바라봐야만 합니다.(28)

 

_ 정말로 끔찍하고 잔인한 건 한 인간이나 짐승이 다른 인간이나 짐승을 미완성의 상태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마치 말줄임표가 문장을 한가운데서 중단시키듯, 누군가를 보자마자 고개를 돌려버리듯, 짐승이나 인간을 잘못 쳐다본 것, 잘못 판단한 것,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버리듯, 쓰기 시작한 편지를 날짜까지 쓰고 나서 갑자기 구겨버리듯이 말입니다.(40~41)

 

_ 생각이 마음껏 방랑하는 걸 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적절한 감각을 잃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요.(46)

 

_ 저녁은 망각과, 혼란과, 너무나 뜨거워서 수증기가 되어버린 욕망의 시간이지요. 하지만 침대 위에 드리운 거대한 구름처럼, 아침은 그 욕망을 주워 담습니다.(57)

 

_ 추억이란 사람이 발가벗겨졌을 때조차도 꼭 지니고 있는 비밀 무기랍니다.(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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