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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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로맹 가리와 만나게 해 준 첫 책은 『새벽의 약속』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를 향한 애틋하고도 절절한 사모곡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

그 책 한 권으로 로맹 가리에 반해버려,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리라, 한 권 두 권 사다가 꽂아 놓고는,

얼마 전에서야 다시 로맹 가리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엔 에밀 아자르로 만났다.

 

『새벽의 약속』을 통해 이미 맛보았던 로맹 가리의 유쾌하고 재치있는 글맛이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음속에, 환희가 차올랐다. 다시 맛보게 된 그의 글이, 미치도록 행복하고 황홀했다!

아아, 이 책을 그동안 계속 책꽂이에 꽂아만 두고 있었다니. 극심한 후회와 함께,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겪어본 후에야 그놈의 행복이란 걸 겪어볼 생각이다."(100)라는 우리의 꼬마 친구 모하메드.(나이는 '꼬마'지만 생각하는 건, 나보다 훨씬 성숙하다.) 모모가 그놈의 행복이란 걸 겪기 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겪어야 하는 걸까...?

자신을 버린 부모, 이제는 모모가 돌봐줘야 하는 로자 아줌마, 모모의 훌륭한 인생 선생님이었지만 이제 모모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 하는 하밀 할아버지, 모모를 희망에 차게 했다가 금세 실망하게 만들어 버린 쓸데 없는 친절을 베푼 금발 미녀,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곳으로 보내야만 했던 강아지 쉬페르...

모모가 행복이란 걸 겪어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의 돌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돌을 하나하나 밟고 나아갈 때마다 그만큼 더 성장하는 모모.

 

나는, 그 돌들을 건너기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 하는 걸까...?

그 모든 것을 겪어야만 만나볼 수 있는 게 행복이라면, 차라리 그것들도 만나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해버릴 것 같은 내 모습, 어째야 좋을까...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 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108)

 

 

모든 등장인물이 다 사랑스러운 책이다. 주인공 모모는 물론, 모모의 측근들과 잠깐 스치듯 나오는 인물이며, 정말 잠깐 등장하는 강아지마저도.

그 인물들로 그려진 모모의 생은, 사실 고통인 동시에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숙한 모모의 눈에 그려진 모습들이었기에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에게 비굴하지 않겠다는 모모는, 생을 대하는 내 모습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훌륭한 꼬마 선생님이었다.

역시 미뤄두고 있던 로맹 가리의 책들, 늦으면 늦을수록 나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

다른 책들도 어서 만나봐야겠다.

 

내 생에 이런 작가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로맹 가리.

 

 

_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44)

 

_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63)

 

_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91)

 

_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116)

 

_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131)

 

_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 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232)

 

_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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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2012-06-0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원주 님
저는 문학동네 편집부 해외3팀 김선희라고 합니다. 언제나 원주 님이 올려주시는 멋진 리뷰들 잘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자기 앞의 생> 띠지를 새로 제작하게 되었는데, 띠지 뒤쪽에 원주님이 올려주신 이 리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제작이 급하게 진행되어 좀더 일찍 말씀을 드리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띠지 뒷면에 이렇게 들어갈 예정입니다.

마음속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의 글이, 미치도록 행복하고 황홀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다 사랑스러운 책. 알라딘 독자

메일로도 같은 내용을 보냈고 여기에도 제 메일 주소를 남기니, 간단하게나마 답신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유익한 리뷰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선희 드림(shkim@munhak.com)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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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은 은유를 헤아릴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사막엔 칼로 자른 듯 선명한 두 개의 세계 외엔 없다.

  빛과 어두움.

  그러니, 운명의 모호함에 질린 사람이라면 누구든 중독될 수밖에 없는 거지. (23)

 

사막에 중독이 된 건 아니지만, 사막을 여행 중이라며, 사막을 전해 온 친구가 생각났다.

'운명의 모호함에 질린' 거였을까, 어쨌든, 현실에 질리고 지쳐 일상을 정리하고, 내가 한 달에 지하철을 타는 횟수만큼 비행기를 타고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있는 친구. 그 친구가 전해주던 사막 이야기와 사막 사진에 빠져있을 즈음,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붉은 분홍' 빛을 낸다는 정오의 사막. 어쩌면 나의 친구도 봤을 한낮의 사막. 그래서 더욱 궁금한 이야기, 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다. 몇 해 전에 『내 아들의 연인』을 읽었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뭔가 개운하지 못 한 느낌을 남겼던 것만은 생생하다. 그래서 조금 망설이다가, 단 한 권의 책으로 한 작가와의 만남을 중단하고 싶지는 않아 이번에 나온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어떤 느낌을 남겨줄까...

 

  귀찮다 했지만, 그래도 꽤 무람없이 느껴졌다. 누구하고든 이런 식의,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도대체 언제였지, 싶은 생각도 들었고. 외롭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렇게 아귀 어긋나는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갈라터진 마음속에 찰랑찰랑한 물기 같은 게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을 때야 비로소 얼마나 추운 바깥에서 떨고 있었나 알게 되는 것처럼. (165~166)

 

승도, 보라도, '추운 바깥에서 떨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 같았다. 오기와 독기를 가슴 가득 품고 있는 승의 가슴속에 불쑥불쑥 치미는 분노, 홀로 외로움을 견뎌내기 힘겨워 내키지 않지만 나오미의 방에 발을 들이는 보라의 오갈 데 없는 마음은, 내 마음속의 것들과 닮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쓸쓸한 동질감을 느꼈던 시간들...

 

'붉은 분홍'의 정오의 사막보다는, 싸늘하게 식은 검푸른 밤의 사막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라를 향한 바바의 마음을 읽을 때만 마음속에 잠시 퍼지던 연분홍빛 따스함. 그 외에는 손발이 싸늘해지는 외로움과 통증이 따랐다. 작가의 글이 그랬던 건지, 이 글을 읽는 내 마음이 그랬던 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소설의 결말,을 읽고도 또 다른 마지막 장면이 있을 것 같아, 혹시나 에피소드가 작가의 말 뒤에 실려 있나 찾아보기도 했던 부질 없는 미련.

소설의 결말엔 '칼로 자른 듯 선명한 두 개의 세계'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절절한 가슴을 부여 안고, 책장을 덮었다.

 

 

  "나오미, 종교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데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과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걸까?"

  말로 하다보니 꽤나 비극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이지. 사랑이야 말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영혼들마저 연결해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신비한 감정이니까."

  꿈꾸듯 속삭이는 걸 보니 몸만 의자에 앉혀두고 마음은 그사이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난 지 오래다.

  "그럼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어?"

  "보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알 수 있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막 뜨기 전, 맨 처음 떠오르는 얼굴이라면 그를 사랑하는 거란다. 사랑이 내 전부를 가득 채워버린 거지."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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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대책 없이 해피 엔딩>

 

28년 지기 두 친구, 두 김 작가님의 대책 없이 웃긴 영화 이야기가(...영화 이야기 맞는 거지? 어째 영화보다는 두 작가님의 주거니 받거니 '대꾸'가 강렬하게 머릿속을 치고 올라오는 것이냐...) 드디어 책으로 나왔다~~!!!

 

씨네21에 '나의 친구 그의 영화'란 꼭지로 연재되었던 글이다.

 

여름 휴가철에 무척 잘 어울리도록, 표지도 파도가 부서지는 파아란 바다 그림이다.

스쿠터를 타고 있는, 뒷모습도 멋지기 그지 없는 이 두 오빠(-_-*)는 당연히 우리의 두 김 작가님 되시겠다~!

옆에 친절하게 이름이 써있긴 하지만, 뭐,

이름 없어도 알겠다.

절대로, 다리 길이 보고 하는 말은 아님............흠흠...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의 향기가 퐁퐁 솟아나는 그림이냐~~!!

(이 그림을 보고, 정확히는, 그러니까, 리얼한 '길이'를 보고는 일러스트는 분명히 김중혁 작가일 것이다, 생각했으나,

책 날개를 보니 '일러스트 이강훈'이라고 되어 있음.)

 

책 속에 일러스트가 많은데, 아아, 정말 글과 그림이 혼연일치!

글을 살리는 그림, 그림을 살리는 글이다. 글, 그림 모두 훌륭함!

 



(김중혁 작가가 '기억나는 대로' 썼다는) 작가 소개부터 매력 만점이다~!

 

김연수와 김중혁은 문학의 도시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김연수는 1970년에, 김중혁은 1971년에 태어났지만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 김중혁이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같은 학년이 되었다. 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야구기록지를 교환하다 친구가 됐고, 이후 28년 동안 친구로 지냈다. 김연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김중혁은 대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하여 사이가 멀어지는 듯하였으나 김중혁이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학교수업을 내팽개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있었다. 김중혁은 서울에 올라와 김연수의 자취방과 하숙방에 빌붙어 지낸 적이 많았는데, 미안함 때문에 하루종일 밖에서 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김연수는 친구가 집에 없는 틈을 타 문학에 매진하였다. 1993년에는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치사하게 저 혼자 작가가 되더니, 1994년에는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문학의 차세대 기대주로 발돋움했다. 이후 『꾿빠이, 이상』,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7번 국도』, 『사랑이라니, 선영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스무살』, 『세계의 끝 여자친구』 등의 책을 펴냈으며(뭐 빠진 거, 있나?)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뭐 빠진 거, 없지?) 수상하였다. 김연수는 아직도 차세대 기대주다. 열심히 놀던 김중혁은, 친구의 배신에, 아뿔싸, 뒤늦게 문학에 매진하여 2000년 겨울 『문학과사회』에 중편 『펭귄뉴스』를 발표하며 작가가 됐고, 『펭귄뉴스』, 『악기들의 도서관』 등의 책을 (뭐 빠진 거, 없군!) 펴냈으며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0년 손가락에 물이 오른 김중혁은 문학계간지에 새로운 장편 『미스터 모노레일』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는 ‘좀비’를 다룬 장편소설을 출간할 예정이다. 





 



 

씨네21에서, 이렇게 두  김 작가님이 주거니받거니 '대꾸'하며 독자들 배꼽 빠지게 만들어 주었던, 그 아름다웠던 시간들이,

이렇게 책으로 엮어 나오니 아아 정말 행복하다.

 

영화를 잘 보지 않는, 그래서 아는 영화도 별로 없고, 영화 이야기라면 지루해하기까지 하는 내가,

유일하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진지하게 읽어내려간 영화 관련 책이기도 하다.

 

두 김 작가님의 독자들뿐 아니라 영화 마니아들에게도 정말 시원한 여름 선물이 되어줄 것이라 장담!




40대가 더욱 기대되는 두 김 작가님!!!

작가님들이 있어,

저는 오늘도 대책 없이 해피해피!!! ^_____^*

시원한 여름 선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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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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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이징'이라는 단어 때문에 단번에 시선이 갔으나, 저자는 독일 사람, 그것도 (작가가 밝힌 바에 의하면) 중국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이다.

비록 중국 작가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어 번역서가 아니었으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고는 바로 마음에 들어버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 손자가 '도망'을 쳐버리고 할아버지 혼자 중국행을 감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이 전해지고 손자는 가족들에게 가짜 편지를 보낸다. 중국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를, 정말 중국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절절하게...

 

손자가 쓴 편지라는 게 궁금했다. 중국으로 떠나지도 않은 손자가 도대체 할아버지와의 여행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을지. 그 안에서 어떤 애절함이 느껴질지.

책을 읽는 동안은 기대했던 만큼 큰 재미를 느끼지 못 했으나(늘, 기대는 조금만 하는 게 좋다. 그랬더라면 '이야! 의외로 재밌는 걸!!' 하는 수확을 거둘 수도 있는데!) 책을 덮은 뒤 여운이 참 길다.

이 책을 읽은 게 몇 주 전인데, 이 책의 결말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가라앉지 않고 있다.

좋은 책이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중국을 가고 싶어했던 이유, 할아버지의 한쪽 팔이 없는 이유,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베이징에서 날아온 편지 속에 들어있다. 나는 순간 이 편지가 손자의 '사기극'이라는 사실도 잊고 할아버지의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그 애틋한 러브 스토리라니!

그러니까, 이렇게 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어버린, 이토록 긴긴 여운에 아직까지 심장에 은은한 떨림이 일도록 만들어버린 이 이야기가, 사실은 손자의 '사기극'인 거지? 아, 그래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할아버지를 홀로 여행길에 오르게 하고, 할아버지가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손자는 가족들에게 할아버지를 아름답게 그려주었다. 가족들이 두고두고 입에 올리며 할아버지를 향해 연연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할아버지를 향한, 최고의 추도문일지도 모른다. 베이징 레터는...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거니와, 중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작가가 '론리 플래닛' 한 권에 의지해서 그려낸 중국의 모습이 어찌나 현실감이 있고 생생한지, 정말 천상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틸만 람슈테트, 기억해두고 싶은 이름이다.

 

 

_ 넌 좋겠다, 결심한 게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을 거 아냐? (62)

 

_ "처음 며칠 동안은 말이 거의 오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럼에도 우리는 쉼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지, 말이 아닌 게 없었으니까." 그녀의 입술이 아이스크림 스푼을 무는 모양도 말이었고, 마사지 곤봉이 목주름 사이를 파고들 때 고개를 트는 모양도 말이었으며, 옆에서 부채를 부쳐줄 때 속눈썹이 떨리는 것도 말이었지. 할아버지가 때때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는 것도 말이었고, 우연히 팔을 스칠 때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말이었고, 할아버지가 온갖 구실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칠 때 그녀가 숨을 들이쉬는 것도 말이었어.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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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늙어갈 것이다
카미유 드 페레티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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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여 쪽에 달하는 이 책에는 요양원의 하루가 그려져 있다.

아직 젊디젊은(이라고 믿고 싶은) 내가 요양원의 하루에 관심을 갖다니, 나 스스로도 조금 의아하지만, 어쨌든, 요양원의 하루가 문득 궁금했다.

내가, 지금의 내 나이만큼을 더 먹은 뒤에, 어쩌면 그보다도 더 나이를 먹은 뒤에 혹시라도 보내게 될지도 모를 하루가, 미리 궁금해졌던 거 같다.

 

많은 등장 인물과 그에 따라 빈번한 장면 전환 등의 영향인가 소설에 집중하지를 못 했다.

그래서 이 한 권을 거의 일주일 가까이 붙들고 있었다.(평소 이 정도 두께라면 이틀 안에 다 읽는데, 이 책은 꽤 오래 걸렸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책의 세세한 장면장면이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 책 속 등장인물들,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노인들의 모습이, 언젠가는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까?

제목 그대로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는 중이다. 

아니, 나는 요만큼 늙었고, 당신은 이만큼 늙었는데, 이게 어떻게 함께 늙고 있는 거야? 라고 생각된다면,

어쨌든, 우리는 모두 늙어갈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몇 십 년이 지난 뒤의 우리들 모습이 어떠할지 미리 예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물론 이 책 속 주인공들의 모습으로 노년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노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지만, 뭐,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노년이란 이렇다.

나는 가늘고 둥근 금테 안경을 끼고 우아한 백발을 곱게 빗어 내리고(혹은 쪽찐 머리??) 얼굴에는 가득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자상한 할머니다. 서재의 원목 책상 앞에 앉아 그때까지도 왕성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을 하고 있고, 나랑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는 강아지(가 아니라 개)와 느릿느릿 산책을 하고, 마당 한 켠의 텃밭을 일구다가 지치면 손을 씻고 나무 그늘로 들어가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멀미 하진 않겠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려오면 가슴에 절로 기쁨이 샘솟으며 정겹기 그지없는 통화를 한다. 가끔 찾아오는 손님들과 다탁에 둘러앉아 향긋한 차를 즐기고, 절로 인품이 배어나는 목소리로 담소도 나눈다. 뭐, 기타 등등.

 

하지만 책 속의 주인공들은 이런 노년을 보내고 있지 않다. 누군가는 요양원에서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어쩌다 찾아온 자식을 다른 노인들 앞에 뽐내고 싶어 안달이 나고, 누군가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헛된 망상을 하는 '병'에 걸려 있고, 누군가는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요양원 측의 실수로 시체에 개미가 들끓고 뒤늦게 찾아온 가족들은 노인의 통장에 잔고가 없음만을 통탄한다. 이 책에서 함께 늙어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 대부분은, 내게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싶은 노년의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외면하거나 타인의 일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내게도 찾아올 수 있는 노년이니까.

 

그런 마음을 계속 간직하면 좋겠다.

'몇 십 년 후 나의 모습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어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년의 모습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해도 인상 쓰거나 불쾌해 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때, 왜, 할머니께, 더, 잘, 해드리지, 못, 했을까.

할머니는, 늙으셨고, 힘이, 없어졌고, 사고력도, 더, 흐려졌고, 태어났을,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던, 중일, 뿐이었는데.

 

늘 내 마음속에 맺혀 있는 아픔이지만, 이 책을 읽으며, 더 짙고 시꺼멓게 멍이 들었다.

잊지 말아야지. 우리는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걸. 언젠가는 내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걸.

 

 

"잘 지내셨어요? 우리 파스칼 씨?"

"물론 잘 지내죠. 그리고 잘 지내지 않을 때도 잘 지내게 만들어야죠.

어제는 날씨가 정말 고약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좋군요."

모두가 동의를 표한다.

"그래. 그래, 잘 지내게 만들어야지"

"설사 내일 비가 오더라도 오늘은 좋아야지"

"어쨌든 일기예보에서 그러더군. 화요일까지는 좋을 거라고"

"그래, 그후부터 점점 나빠진댔어"

"그래, 그래도 오늘은 그렇게 나쁘지 않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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