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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를 로맹 가리와 만나게 해 준 첫 책은 『새벽의 약속』이었다.
어쩌면 어머니를 향한 애틋하고도 절절한 사모곡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
그 책 한 권으로 로맹 가리에 반해버려,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의 책들을 모두 읽어보리라, 한 권 두 권 사다가 꽂아 놓고는,
얼마 전에서야 다시 로맹 가리를 만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엔 에밀 아자르로 만났다.
『새벽의 약속』을 통해 이미 맛보았던 로맹 가리의 유쾌하고 재치있는 글맛이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음속에, 환희가 차올랐다. 다시 맛보게 된 그의 글이, 미치도록 행복하고 황홀했다!
아아, 이 책을 그동안 계속 책꽂이에 꽂아만 두고 있었다니. 극심한 후회와 함께, 더 늦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겪어본 후에야 그놈의 행복이란 걸 겪어볼 생각이다."(100)라는 우리의 꼬마 친구 모하메드.(나이는 '꼬마'지만 생각하는 건, 나보다 훨씬 성숙하다.) 모모가 그놈의 행복이란 걸 겪기 전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겪어야 하는 걸까...?
자신을 버린 부모, 이제는 모모가 돌봐줘야 하는 로자 아줌마, 모모의 훌륭한 인생 선생님이었지만 이제 모모를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 하는 하밀 할아버지, 모모를 희망에 차게 했다가 금세 실망하게 만들어 버린 쓸데 없는 친절을 베푼 금발 미녀, 사랑하기 때문에 더 좋은 곳으로 보내야만 했던 강아지 쉬페르...
모모가 행복이란 걸 겪어보기 위해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의 돌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돌을 하나하나 밟고 나아갈 때마다 그만큼 더 성장하는 모모.
나는, 그 돌들을 건너기 두려워하기 때문에, 성숙하지 못 하는 걸까...?
그 모든 것을 겪어야만 만나볼 수 있는 게 행복이라면, 차라리 그것들도 만나지 않고, 행복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해버릴 것 같은 내 모습, 어째야 좋을까...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 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108)
모든 등장인물이 다 사랑스러운 책이다. 주인공 모모는 물론, 모모의 측근들과 잠깐 스치듯 나오는 인물이며, 정말 잠깐 등장하는 강아지마저도.
그 인물들로 그려진 모모의 생은, 사실 고통인 동시에 행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숙한 모모의 눈에 그려진 모습들이었기에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생에게 비굴하지 않겠다는 모모는, 생을 대하는 내 모습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는, 훌륭한 꼬마 선생님이었다.
역시 미뤄두고 있던 로맹 가리의 책들, 늦으면 늦을수록 나에게 미안한 일,이라는 생각.
다른 책들도 어서 만나봐야겠다.
내 생에 이런 작가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고 축복이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로맹 가리.
_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은 매사에 걱정이 많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44)
_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63)
_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건, 인간 안에 붙박이장처럼 눈물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원래 울게 돼 있는 것이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체면 같은 게 없음이 분명하다. (91)
_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116)
_ 저능아란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자라지 않기로 마음먹은 아이다. (131)
_ 여러분도 알겠지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나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죽을 맛이었다. 이건 아닌데, 생이 이런 건 아닌데, 내 오랜 경험에 비춰 보건대 결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뇌리를 스쳐갔다. 사람들은 말없이 하나둘 줄을 지어 밖으로 나갔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232)
_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