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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베이징'이라는 단어 때문에 단번에 시선이 갔으나, 저자는 독일 사람, 그것도 (작가가 밝힌 바에 의하면) 중국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이다.
비록 중국 작가가 쓴 책이 아니고, 중국어 번역서가 아니었으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고는 바로 마음에 들어버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중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한 손자가 '도망'을 쳐버리고 할아버지 혼자 중국행을 감행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에게 할아버지의 죽음이 전해지고 손자는 가족들에게 가짜 편지를 보낸다. 중국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얼마나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를, 정말 중국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절절하게...
손자가 쓴 편지라는 게 궁금했다. 중국으로 떠나지도 않은 손자가 도대체 할아버지와의 여행을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을지. 그 안에서 어떤 애절함이 느껴질지.
책을 읽는 동안은 기대했던 만큼 큰 재미를 느끼지 못 했으나(늘, 기대는 조금만 하는 게 좋다. 그랬더라면 '이야! 의외로 재밌는 걸!!' 하는 수확을 거둘 수도 있는데!) 책을 덮은 뒤 여운이 참 길다.
이 책을 읽은 게 몇 주 전인데, 이 책의 결말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가라앉지 않고 있다.
좋은 책이다.
할아버지가 그토록 중국을 가고 싶어했던 이유, 할아버지의 한쪽 팔이 없는 이유,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베이징에서 날아온 편지 속에 들어있다. 나는 순간 이 편지가 손자의 '사기극'이라는 사실도 잊고 할아버지의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 그 애틋한 러브 스토리라니!
그러니까, 이렇게 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어버린, 이토록 긴긴 여운에 아직까지 심장에 은은한 떨림이 일도록 만들어버린 이 이야기가, 사실은 손자의 '사기극'인 거지? 아, 그래도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할아버지를 홀로 여행길에 오르게 하고, 할아버지가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손자는 가족들에게 할아버지를 아름답게 그려주었다. 가족들이 두고두고 입에 올리며 할아버지를 향해 연연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할아버지를 향한, 최고의 추도문일지도 모른다. 베이징 레터는...
신선한 소재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거니와, 중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작가가 '론리 플래닛' 한 권에 의지해서 그려낸 중국의 모습이 어찌나 현실감이 있고 생생한지, 정말 천상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틸만 람슈테트, 기억해두고 싶은 이름이다.
_ 넌 좋겠다, 결심한 게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을 거 아냐? (62)
_ "처음 며칠 동안은 말이 거의 오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말했어. "그럼에도 우리는 쉼 없이 이야기하고 있었지, 말이 아닌 게 없었으니까." 그녀의 입술이 아이스크림 스푼을 무는 모양도 말이었고, 마사지 곤봉이 목주름 사이를 파고들 때 고개를 트는 모양도 말이었으며, 옆에서 부채를 부쳐줄 때 속눈썹이 떨리는 것도 말이었지. 할아버지가 때때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는 것도 말이었고, 우연히 팔을 스칠 때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말이었고, 할아버지가 온갖 구실을 만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칠 때 그녀가 숨을 들이쉬는 것도 말이었어.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