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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우유 - 그리움으로 찾아낸 50가지 음식의 기억
김주현 지음 / 앨리스 / 2013년 8월
평점 :
타닥타닥, 가을비가 제법 힘 있게 창을 두드린다.
2013년 9월의 마지막 일요일을 맞으며, 가을비에 젖어드는 이 밤,
아빠는 낚시를 하러 친구 몇 분과 바닷가에 가셨고,
엄마는 "아빠 없으니까 잠이 안 오네" 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고 계시고,
언니는 큰딸 작은딸 소식을 연방 카톡으로 전해오고 있고,
여동생은 얼마 전에 태어난 셋째 아들이 아무래도 원빈을 닮았다며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고,
남동생은 친구들과 논다며 큼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나갔고,
몽은 얼마 전에 사준 '마약방석'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고,
나는, 노란 책 한 권이 불러온 상념에 잠겨 있다가,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 그대와 나의 '3층집', 그리고 '사남매' 이야기
이십여 년 전 그 옥탑 집에 살 때 계셨던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지 십 년이 가까워오고,
많은 가족 구성원이 새로이 생겨났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아빠 엄마 언니 나 여동생 남동생, 일곱 명입니다."
일곱 가족의 이야기는, 그때 그 시절 속에 남겨둔 채, 이제는 '그리움'과 '추억'으로만 아련하다.
문득, 그 옥탑 집을 떠올리게 한 것은, 노란빛 바나나 우유였다.
빙그레 웃으며 마셔야만 할 것 같은 '바나나맛 우유'가 아니라, 음식 잡지 기자 김주현이 쓴 책, 『바나나 우유』.
그 유년의 시간 한복판에는 지상의 방 한 칸, 3층집이 있다. _ 82
저자의 '3층집' 이야기가 불러온, 내 유년의 3층(이랄지 옥상이랄지)에서의 그 시절.
1층은 식당, 2층은 여인숙이 있던 건물의 옥상을 빌려(?), 아버지가 손수 만들었다던 그 집.
놀랍게도, 나의 그 시절 이야기를 꼭 닮은 이야기가 이 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3층(이랄까 옥상이랄까)집에서 뛰놀고 뒹굴고 치고받고 먹고 자고 사랑하고 웃고 울고 떠들며 자라나던 우리 4남매의 이야기를 쏙 빼닮은 이야기.
그리하여 절로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흘러들게 된 나.
'그리움으로 찾아낸 50가지 음식의 기억'이 담긴 이 책은 짐작도 못 했으리라.
여기 한 독자는,
음식에 앞서 '3층집'과 '사남매' 이야기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그 시절의 '옥탑 집'으로 돌아가 눈물 한방울 또로록 해야 했음을...
지금 돌이켜보면 참 허름했던 집, 참 궁색한 살림살이였는데
가난은 우리를 할퀴고 가지 못했다.
아마도 온 힘을 다해 우리의 바람막이가 돼주신 엄마, 아빠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_ p.86
#. 할머니와 '달구나' 한 냄비
'달구나'를 유난히 좋아하던 우리들을 위해 할머니는 어느 날, 냄비에 설탕을 잔뜩 부어 녹여서는 달구나를 한 국자도 아닌 '한 냄비' 만들어주셨다.
그날 그 달구나를 정말 말끔히 싹싹 다 먹었던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내 생에 가장 통 큰 '음식'으로 내 마음속에 위풍당당 자리잡고 있다.
나는 아직도 달구나(혹은 달고나, 혹은 뽑기, 혹은 쪽자, 혹은 국자, 혹은 띠기 등등으로 불리는 듯한 그것)를 몹시 좋아해서,
지나가다 별이며 하트를 찍어주는 뽑기 장수 아주머니 아저씨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얼굴 벌게지도록 열탕 같은 하루를 보낸 날이면
지금도 바나나 우유를 마신다.
살이 홀라당 벗겨질 것 같아도, 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가는 거다,
눈에 비누 거품이 들어간 것처럼 괴로운 시간들도 모두 지나갈 거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_ p.6
저자가 열탕 같은 일상에 지치면 찾는다는 바나나 우유,와 같은 존재가 내게는 어쩌면 달구나인지도 모르겠다.
꼭 달구나가 아니어도 달달한 믹스커피나 초콜릿처럼 일단 단 것들이면 오케이이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보는 순간부터 환호작약하여 단숨에 '열탕'의 온기를 낮춰주는 존재는, 달구나가 최고다.
빙그레 웃는 날보다, '앗 뜨거!' 세상에 데이며 삶기며 튀겨지며 살아가는 날이 더 많을지라도,
다시 아자아자 용기를 내게 해주는 힘, 어쩌면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내 온몸이 절로 싱긋이 웃을 수 있는 작은 '맛' 하나로도 충분한지도.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929/pimg_709840144901215.jpg)
# 사는 게 쉽지 않은 날 위로의 '음식'이 되어주는 문장들
정말 누구에게나 삶은 쉽지 않은 걸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마 나도 모르게 어두컴컴한 시간들을 지나갔다는 거겠지. 무엇이든 쉬워 보이는 그들의 인생에도 어딘가 터널이 있었다는 얘기일 거다.
그렇다면 조금 위로가 된다. 한 번도 막막하고 무서운 터널을 지나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게 너무 먼 사람들이니까. _ 78
풋.
'처음 나온' '덜 읽은' '깊지 않은'
풋사랑, 풋과일, 풋콩, 풋잠……
떫고, 시고, 그러나 싱그럽고 풋풋한 것들.
여물지 않아서, 너무 깊지 않아서
그 '어설픔'이 예쁜 것들.
세월이 지나면 다시 못 올 '풋것'의 시간들, 색깔들, 냄새들.
풋내 나는 시간들. 그 풋내를 즐겨. 다시 못 올 시간들이니까. _ 117
사소한 하루를 살아가는 나는
사소한 일에 분개하고
사소한 일에 설레며
사소한 일에 마음 무너지고
사소한 일에 눈물 닦는다.
나는 무수한 사소함으로 살아간다.
나무를 버티게 해주는 잔뿌리들처럼. 그런 사소함으로.
나를 견디게 해주고 나를 버티게 해주는 사소함들에게 인사한다. _ 267
아마도 당신이 사는 동안 만나고
사귐을 나눈 사람들 속에 새긴 구절 속에서야
당신이 얼마나 근사했던 사람인지,
당신이 얼마나 포근했던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나는 오늘 누군가에게 내 삶의 한 구절을 새기며 산다.
사람은 사람에게 기억되니까, 사람은 사람에 의해 지워지니까.
한 생을 여행하면서 누군가의 마음에 새기는 비문,
어떤 문장을 새기며 살아가고 있을까. _ 277
#. 그리고,
할머니의 홍시, 아빠의 배, 엄마의 단감, 언니의 자몽, 나의 자두, 여동생의 복숭아, 남동생의 곶감.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보았던,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 그 중에서 과일.
이 과일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