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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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겨울 왕국의 '엘사'가 대세가 되어 버렸지만, 실은 공주의 대명사는 명실공히 '백설공주'이지요. 아마 전세계적으로 소녀들은 누구나 한번쯤 거울을 들여다 보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고선 자신의 이름을 대며 깔깔 웃어본 경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백설공주는......사실 가만 생각해 보면 동화속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예쁜 거 말고는 그녀의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매력이라 해야할지가 전혀 없으니까요. 뭐 아름다운 외모...야 말로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라면 할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무튼, 때문에 백설공주는 여타 다른 동화들 속 공주들 보다도 저에겐 훨씬 매력이 덜했습니다. 애초에도 지극히 수동적이기만 한 공주들이 등장하는 동화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눈엔 상당한 민폐 캐릭터로 보이던 백설공주는 특히나 별로인 캐릭터였지요.

 

그런데 이 백설공주가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백설공주 이야기는 핀란드에 구전되는 동화라고 하네요. 핀란드의 동화작가인 살라 시무카가 이를 변주하여 새로운 백설공주 시리즈를, 그것도 스릴러로 재탄생 시켰고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여담인데, 처음 작가 이름을 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출간 직전에 모 인터넷 서점 사이트엔 이 소설이 일본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더군요. 그만큼 핀란드 소설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백설공주...그녀가 현대적인 캐릭터로 어떻게 재탄생되었을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동화에서의 백설공주처럼 예쁜거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 민폐 캐릭터라면 과감하게 책을 덮어버리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앞선 기우는 어느새 잊혀지고 정신없이 우리의 새로운 백설공주 '루미키'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백설공주는 17세의 '루미키'라는 소녀입니다. 그리고 '루미키'라는 이름은 핀란드어로 '백설공주'가 된다고 합니다. 바로 '백설공주'가 주인공인 셈이지요.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백설공주처럼 여리고 어여쁘고 청초하게 자라길 바라며 '백설공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모르지만, 루미키의 성격은 익히 알려진 동화 속 백설공주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눈'이라는 그녀의 이름과 어울리는 건 그녀의 피부가 아니라, 차갑고 냉소적인 성격 뿐이었으니까요. 핀란드의 명문 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인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거나 섞이는 것을 싫어하며 조용히 없는 듯 지내는 게 삶의 신조였습니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가 오랜 좌우명이었던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학교의 암실에서 피 묻은, 아니 정확하게는 묻은 피를 세척한 돈뭉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좌우명엔 금이 가기 시작하지요. 수많은 동화속에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겉잡을 수 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주인공들처럼 그녀도 그녀의 좌우명을 어기는 바람에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 발을 들이고 맙니다. 마치 세상물정 모른 채 '호기심'만이 충만했던 공주님들이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해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고 루미키가 파헤치는 피비린내 나는 3만 유로에 얽힌 사건들이 미스터리 가득하다거나, 그 돈의 뒷배경에 어마어마한 음모나 반전이 숨어있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고 사건의 진상이란 것도 상당히 단순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키의 모험담은 굉장한 흡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문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해서이기도 하고, 단 엿새 동안의 이야기가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 덕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3만 유로에 얽힌 미스터리를 쫓는 루미키의 현재 모험담에 슬쩍 슬쩍 끼워놓은 루미키의 어린 시절, 그리고 얼마전 헤어진 미스터리한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끌어올려 자꾸만 책장을 넘기게 하지요. 또한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춘기의 끝무렵쯤 되는) 소녀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그녀의 심리묘사 등은 때론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핏빛 짙은 스릴러에 양념처럼 섬세한 낭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빼어난 점은 역시 핀란드의 겨울 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 내내 누군가를 쫓고, 또한 누군가에게 쫓기는 루미키의 가장 큰 적은 다름아닌 핀란드의 살인적인 겨울 날씨였습니다. 겨울철 평균 기온이 무려 영하 20~30도라는 핀란드의 겨울. 그 겨울 한복판을 끊임없이 달리고 뛰는 루미키. 그런 루미키의 모험담을 읽고 있자니 제 귀까지 어는 것만 같고, 자꾸만 손이 주머니를 찾아 갑니다. 제목이나 표지만 보면 뜨겁고 열정적일 것 같았던 소설은 주인공의 성격도 배경도 차갑디 차갑기만 했습니다. 이런 소설은 무더운 여름 열대야에 잠못 이룰 때 읽으면 제격이겠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꾸 기온이 내려가는 요즈음 같은 때에 읽으면 더욱 으슬으슬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서 약간의 심심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심심함 덕으로 다음 편이 몹시 궁금해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품 전반에 그녀의 가정사에 얽힌 과거나, 그녀의 전 남자친구의 이야기, 또 간만 살짝 보여준 북극곰의 이야기...처럼 밑밥을 잔뜩이나 뿌려놓았거든요. 그러니 3부작의 서막이 끝이 났지만, 결코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습니다. 잔뜩 뿌려진 떡밥에 독자는 파닥파닥 낚일 뿐입니다. 역시 시리즈는 순서대로 줄줄이 전부 읽었을 때 그 오롯한 재미를 완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어서 제게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를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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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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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7 그렇게 인터넷을 오래할수록 점점 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돼. 확증 편향이라는 거야. TV보다 훨씬 나쁘지. TV는 적어도 기계적인 균형이라도 갖추려하지. 시청자도 보고 싶은 뉴스만 골라 볼 순 없고.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달라.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어떤 신문이나 방송보다도 더 깊이 빠지게 돼. 그런데 이 미디어는 어떤 신문 방송보다 더 왜곡된 세상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심의를 받지도 않고 소송을 당하지도 않아. 커뮤니티 사이트들은 최악의 신문이나 방송사보다 더 민주주의를 해치지. 』

 

인터넷, 스마트폰, SNS등이 활성화 된 세상에서도 군부독재는 존재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생각한 답은 존재할 수 없다...였지요. 권력의 횡포로 언론 장악이야 쉽겠지만, 개개인이 주고 받의며 퍼져 나가는 정보들까지야 일일이 막기 힘들테니까요. 그렇기에 인터넷의 발전은 분명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이 훨씬 더 크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모 인터넷 사이트(처음 시사프로그램에서 그 사이트의 정체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습니다.) 사태나, 몇 해 전 국정원 선거 개입과 같은 사건을 지켜보며 허를 찔린 기분이었습니다. 늘상 쉽게 우리곁에 머무르거나 우리 눈앞에 노출되며 더 은밀하고 뿌리깊게 사람들의 정신속에 파고들게 할 수 있는 것이 인터넷이란 도구이더라고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말이지요. 그런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겁니다.

 

작가는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모티프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때문에 저는 조금 걱정이 되었더랬습니다. 이 소설 과연 괜찮을까? 이 작가 그런 소설을 쓰고도 과연 괜찮은걸까? (70~80년대도 아닌데 말이죠ㅠㅠ) 때문에 몹시 위험한 소설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다 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위험하긴 위험한데 위험하다의 주체가 작가는 아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때의 댓글부대가 아닌 그 후에 더욱 발전된 형태의 2세대 댓글부대였으니까요.

 

이 소설은 댓글부대 2세대인 팀-알렙의 세 멤버인 삼궁, 찻탓갓, 0110...이 의뢰받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나 사적인 이야기, K신문 임상진 기자와 찻탓캇이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 교차하며 서술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팀-알렙은 실검 조작이나 가짜 구매후기, 파워 블로거 조작등의 일을 하는 어찌 보면 온라인마케팅 업체입니다. (저도 블로그 팔라는 둥, 자신들이 써 준 글을 매일 포스팅 하면 건당 만원을 주겠다는 둥의 쪽지를 종종 받는데.... 그 이면이 이런 것들이었다니 좀 충격이었습니다. ) 그런데 어느날 팀-알렙에게 아주 묘한 의뢰가 들어오는데 그것은 영화 한 편을 망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기업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백혈병을 앓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를 그린 영화였지요.(... 책 안에서의 제목과는 다르지만 이 영화는 실제로 존재했고, 실제로 망했습니다;;) 그리고 팀-알렙은 이 사건을 아주 깔끔하고(?) 성공적으로 해치웁니다. 그렇게 실력을 인정 받은 팀-알렙에게 합포회라는 수상한 조직이 접근하고 계속되는 의뢰를 하는데... 그 의뢰란 것은 진보 성향의 인터넷 카페 게시판이나 커뮤니티들을 초토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적인 일처리를 위하여 팀-알렙은 각각의 커뮤니티들을 아주 꼼꼼하게 관찰을 하는데, 그에 대한 묘사가 정말 적나라합니다. 인터넷 사이트들의 생태를 아주 제대로 까발려 놓았지요. 매 사이트의 생리를 분석하고 묘사하는 부분에서 자꾸 소름이 돋더군요. 저는 독서 관련 커뮤니티에서 (지엽적으로밖에 활동을 안하긴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의 생태를 자주 목격했었으니까요. 그런 묘사가 너무도 사실적으로(실제로 어느 사이트에서 복붙해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서술이 사실적이랍니다.) 그리고 있어서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인간 본성에 감춰진 악의랄지...공격성...등을 집중 공략하는 팀-알렙의 일처리는 승승장구합니다. 나름 인터넷 용어를 많이 안다고 자부했는데도 수도 없이 튀어나오는 은어에 가끔 이게 뭔소린가...싶어서 검색을 해야했지만(여초니...남초니...하는 말의 정확한 뜻도 이제서야 알았습니다.)...미친 가독성을 발휘하며 책에 빠져들었지요.

 

p. 177 자기가 모르는 사람이 어정쩡한 글을 올리면 처음에는 다들 눈치를 봐요. 이걸 받아들여줘야 하나, 아니면 공격해야 하나. 그런데 누가 '저도 그래요. 공감 100배'라고 댓글을 달면 이제는 상대해야 하는 사람이 둘이 되는 셈이죠. 거기에 누가 '글 정말 잘쓰시네요. 읽는데 내 얘기인 줄'이라고 댓글을 달면 이제 원 게시물은 철옹성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3자가 '이 글 저만 불편한가요?'라고 의문을 표시하면 공격의 틈이 살짝 열리죠. 그다음에 '저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다들 별말씀 없으시네요. 다른 분들은 괜찮으신가봐요?'라는 댓글이 달리면 슬슬 멍석말이를 준비해도 됩니다. 거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의견은 처음 듣습니다.'라고 누가 동조하면, 짜잔. 이제 나도 칼을 뽑아도 됩니다. 다구리를 치는 시간이 온 거죠.

 

이렇게 실력을 인정 받은 팀-알렙에게는 이제 더 거대하고 어마무시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런 일이 정말로 어디선가 행해지고 있으면 어쩌나 싶게 위험하고 무서운 임무가 말입니다.(스포가 될 수 있으니 소개하진 않겠습니다. 장담하건데 누구든 읽어 보시면 저처럼 어마어마한 충격과 공포를 느끼실 겁니다.)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지요. 아, 이 소설은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위험하구나...하는 것을요.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라고 하기엔... 이야기들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현실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결말을 맞이했을 때 저는 '와!'라는 감탄사를 수도 없이 뱉어냈습니다. 식상한 말로 '충격과 공포'라는 단어는 딱 이 작품에 써야하는 말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 어떤 스릴러 보다 더 소름끼치던 결말... 제발 누구든 이건 말도 안되는 뻥이라고, 말도 안되게 비현실적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읽어 보셔야 압니다. 그러니까 부디 꼭 읽어 보세요;;;)

 

할 줄 아는 건 컴퓨터밖에 없고, 정상적인 연애는 할 용기도 능력도 없어서 안마방에나 다니는 세 인물 삼궁, 찻탓갓, 0110. 솔직히 처음엔 참으로 정이 안가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났더니 왠지 안쓰럽습니다. 그리고 걱정도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청년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수상한 인물들에게 거금의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해가며 점점 의식이 변해가는데(특히 삼궁), 아니 의식이라는게 형성되어 가는데....그게 참 무섭습니다. 수상한 인물들이 거시적으로 장기적으로 하고자 한 일의 결정판 같은 인물이 바로 삼궁이구나 싶었으니까요. 존재만으로도 빛난다는 청춘들인데...... 대한민국의 젊은이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팍팍하고 불안한 일이구나...하고 다시 한번 씁쓸하게 깨달았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로 처음 장강명 작가를 접했을 때 그 첫인상은 이 작가 굉장히 냉소적이면서 젊구나...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접한 '그믐.......'은 조금 난해해서 이 작가도 결국은 어려운 작가구나...싶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접한 작품이 '댓글부대'입니다. 색이 전혀 다른 세 작품을 한 작가가 썼다니 장작가의 스펙트럼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가는 댓글부대 관련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읽은 독자들 나를 좌빨로 볼지, 일베로 볼지 궁금하네요. 누가 읽어도 불쾌하고 기분나쁜 소설이거든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에 저는 작가 자신이 작가 후기에도 썼던 말로 독자로서 답변을 하고 싶네요. '작가님은 이 나라를 비판하면서 사랑하는 작가'일 뿐이라고. 그러니 앞으로도 이런 소설 많이 써주시길 바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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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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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슬픔의 벚꽃박죽>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에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모란이 피어 찬란하지만, 이내 져버리고 마는 모란 덕에 슬픔 또한 함께 느낄 수 밖에 없는 봄. 매년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자연스레 이 시를 떠올리곤 한다. 모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역시 봄엔 벚꽃이다. 벚나무가 흩뿌리는 꽃눈 속을 걷다 보면 사람이 괜히 설레기도 들뜨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말이나 글로는 형용하기 힘든 애달픔 같은 것을 함께 느끼곤 한다. 그렇게 벚꽃은, 봄바람이 살랑거려 그렇지 않아도 찰랑거리는 강 물결 같은 사람의 마음을 뒤죽박죽 뒤흔들어 놓는다. 마치 봄날의 벚꽃처럼 이 소설은,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쇼노스케의 이야기는 내 안의 복잡한 여러 감정들을 뒤흔들어 놓는다. 뒤죽박죽, 벚꽃박죽.

 

『 p.36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마음에 깃든 불안이며 작은 희망을 살펴주지 않는다. 해가 바뀌어 이윽고 매화 봉오리가 터지고, 물에 비친 벚꽃 그림자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도가네 번의 산기슭이 신록으로 물들었다. 』

 

<향수>

주인공인 쇼노스케는 도가네 번 번주의 시종관인 후루하시 소자에몬의 차남이다. 누명을 쓰고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비의 죽음, 그 뒤의 더 큰 흑막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을 받아 에도의 도미칸 나가야에 살고 있다. 심약한 아비를 닮아, 어미인 사토에나 형인 가쓰노스케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렇기에 그는 가족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거의 느끼질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짙은 향수를 느꼈다. 쇼노스케처럼 작은 촌마을 출신으로 수도권(소설로 치면 에도)으로 이주하여 고향을 떠나 산 지가 오래 되어서였을까. 아닌듯, 아닌척 하지만 나는 분명 쇼노스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쨌거나 쇼노스케가 태어나 자란 곳은 도가네 번이었고, 그의 아비는 그곳의 시종관이었으니까.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에도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쇼노스케는 항상 고향에선....이란 사족을 함께 붙이곤 하는데 그러한 점이 바로 그가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그리움이란 것이 단순한 애정이 아닌, 애증이었을 뿐. 쇼노스케처럼, 그리고 나처럼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 도시로 이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쇼노스케의, 그리고 내가 느낀 향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 p.145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여기 도미칸 나가야에서도 하루 한 끼는 흰밥을 먹는다. 고향에서는 번사조차 하급 가문은 밥에 잡곡이 섞이는 게 당연했거니와, 흉년이면 설에 먹는 떡도 좁쌀이나 피로 만들었다. 도가네의 '일상'이나 '보통'은 에도 거리의 잣대로는 '가난'이다. 』

 

<가족, 다시 가족, 결국 가족>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는 한 인터뷰에서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만능의 묘약은 아니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새삼 가족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과 소중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반성하고 말았다. 그러다 주책없이 코끝이 찡해져 눈물까지 나고 말았다. 쇼노스케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박이었고,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했지만, 나는 그것 하나만은 믿는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사랑해도, 소중해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단지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어긋나 합을 이루지 못했을 뿐. 작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결국 소중한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그 소중함을 잘 지키라는 말도 함께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 다시 가족, 결국 가족이라고... 그렇게 내멋대로 해석해 버리고 말았다.

 

<꽃이 피고, 꽃청춘들이 만났으니 응당...>

아비를 잃고, 어미와 형에겐 미움 받아 타지에 홀로 사는 주인공 쇼노스케. 이렇게만 그를 묘사하고, 그가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스물셋 꽃다운 나이인 그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장지문 밖엔 봄바람이 불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강물은 분홍 물결로 일렁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그 앞에 등장한 단발머리의 벚꽃 정령. 비밀을 간작한듯 신비롭기만한 그녀. 그녀의 상처를 쇼노스케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우게 되고, 그녀 또한 쇼노스케를 통해 그녀 안의 깊은 상처를 치유 받는다. 꽃이 피고, 상처 안은 꽃청춘들이 만났으니 응당 그러하리라... 설레고, 들뜨고, 하지만 한편으론 애달프고... 그들의 사랑 또한 벚꽃과 많이 닮았다.

 

『 p.66 아침 강바람 속에 그 사람은 벚나무에서 날아 내렸다. 소리도 없이, 무게가 없는 것처럼, 사뿐히. 머리는 어깨 언저리에서 가지런히 잘랐다. 강바람이 불어 벚나무 가지가 흔들리면 그 사람의 머리칼도 춤을 추고, 그것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훤히 빛났다. 』

 

『 p.451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하는 일의 축적이며, 마음도 그럼으로써 성장한다. 』

 

<오지랖으로 푸는 미스터리.>

나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를 '모방범'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강렬하고, 섬뜩했던 범죄 소설. 그런데 이 소설은 모방범하고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한없이 잔잔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자주 자주 유쾌하다. 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방식이 모방범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의 미스터리 풀이법의 핵심 키워드는 '오지랖'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오지랖이 넓다. 어느날 갑자기 생면부지의 무사가 찾아와 내어 놓은 비밀 편지를 해독해보겠다는 주인공 쇼노스케. 그를 발 벗고 나서 돕는 도미칸 나가야 및 그의 주변 인물들(미야노 애향록)이 그렇다. 자신이 겪었던 슬픈 과거와 비슷한 사건이어서였는지, 자기 생업도 팽개치고 납치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지헤에(납치)도 그렇다. 호기심 많은 와카도, 그녀의 보모 쓰타도. 에도 대행이라는 걸출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잘한 일에까지 관심 많은 시게히데도. 가와센의 여주인 리에도. 다들 오지랖이 넓어도 너무 넓다. 이런 인물들의 오지랖 덕분에 사건이 복잡해지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오지랖들 덕분에 소소한 미스터리들이 풀리곤 한다. 참 바람직한 오지랖이 아닐 수 없다.

 

<입체 인물 모형을 조립하다.>

쇼노스케는 이야기 속에서 '야오젠'이라는 요릿집의 입체 모형을 제작한다. 아마 요즈음에도 아이들 과자 속에 부록처럼 들어있는 그런 모형이리라. 쇼노스케가 요릿집의 입체 모형을 제작한다면,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입체 모형을 조립한다. 아니다, 그런 표현으론 부족할 것 같다. 미미여사 그녀가 창조해내고 묘사한 그녀의 인물들은 그보다 더 진화한 형태이다. 사람하고 똑같이 만들어진 밀랍인형이나, 4D 영화 속 인물처럼 살아 숨쉰다. 이 작품은 분량이 꽤 길기에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초반엔 등장인물 소개를 들락거려야 누가 누구고,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나는 이미 도미칸 나가야에 살고 있었다. 도라조의 주정을 들었고, 긴의 눈물도 보았고, 다이치의 잔소리도 들었다. 빨래하는 히데와 잡담도 나누었고, 다쓰가 퍼뜨리고 다니는 소문들도 들었다. 630페이지라는 기나 긴 이야기가 단 한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었던 건 이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이야기가 좋다.

 

<한 점의 풍속화를 보는 듯...>

사실 나는 미미여사의 시대물은 기피하고 있었다. 딱히 일본의 시대물이라서가 아니라, 역사에 그것도 다른 나라의 역사엔 완전히 백지 상태의 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조금 두려웠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도 초반엔 알기 힘든 용어들 덕에(지역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관직명인지 등등) 읽기 조금 버겁기도 했다.(각주 같은 것을 이용해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계속 집중해서 읽어 가다 보니 한 점의 풍속화가 눈에 그려진다. 낯선 용어들이 어려워 그렇지 작가가 그 시대의 장소들을, 그리고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세밀하게 그려놓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마치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덕분에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일본의 에도 시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모습이랑,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벚꽃, 다시 벚꽃>

매년 벚꽃이 필 때쯤이면, 꼭 봄비가 내린다. 그나마도 찰나에 피었다 지는 벚꽃을 더욱 빨리 떨구어 버리는 얄궂은 봄비. 그렇게 화려하게 피었다 금방 져버리고 마는 벚꽃. 이렇게 금세 지는 벚꽃을 보고 사람들이 안타까움의 탄식만을 늘어놓지 않는 것은, 벚꽃 뒤엔 신록이 찾아오고, 울긋불긋 단풍도 들 것이며, 하얗게 눈도 쌓였다가, 이듬해 또다시 꽃이 필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긴긴 뒤죽박죽 벚꽃박죽 쇼노스케의 이야기는 끝나버렸지만, 나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와카가 한 그 약속. 나는 그 약속이 독자들에게 한 미미여사의 약속이기도 한 것임을 믿기에. 그렇게 벚꽃, 다시 벚꽃...의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리라 또 내멋대로 해석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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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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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소설만 줄창 읽어대는 편독가인 저는 소설 중에서도 은유나 상징이 넘치는 소설들보다는 역시 서사가 풍부한 이야기들이 좋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독 시나리오 작가 출신 소설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걸 보면요. 천명관 작가가 그러했고, 또 이 작품의 김호연 작가가 그러합니다.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 웃다가 울다가 그리고 결말에선 여운도 있는 소설을 추천하는 많은 글들 속에서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작품이 자주 언급되곤 합니다. 저 또한 그런 추천글들 덕에 '망원동 브라더스'를 접하고 많이 웃다가 '아구아구 콩나물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지면서 진한 여운과 함께 책을 덮었더랬죠. 때문에 작가의 신작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재밌고 쉽게 읽히고 여운은 깊은 그런 이야기를 또 한껏 기대하며 첫장을 열었지요.

 

<연적>

재연이라는 전 여자친구의 부음 문자가 오면서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출판사 편집장인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게 되고 거기서 '나'와 사귀기 전에 재연이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 '앤디 강'과 스치듯 재회하게 되지요. 그리고 1년이 흐르고... 재연의 1주기가 되어 그녀의 납골당에 방문하게 된 '나'는 다시 한 번 '앤디 강'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고, 의미 없는 질투와 경쟁심에 불 타 오르게 되는데... 심지어 두 남성은 급기야 재연의 유골함을 들고 튀게 됩니다. 그녀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위해서......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주평에서 시작해 남해, 여수, 제주까지 이어집니다. 재연이 생전에 좋아했던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곳으로... 상당히 낭만적인 장소들인데... 이 여행을 함께하는 것은 건장한 두 남성. 그렇게 그들은 무려 4박 5일 동안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자고 함께 여행합니다.  정작 그들이 사랑했던 여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미묘한 관계인 연적들끼리 말이지요.

 

p.80 영원한 게 있습니까? 영원하면 추억입니까? 다 사리지고 변하고 그러는 거지. 자, 마시고 잊어요.

 

<일탈>

자우림의 노래중에 '일탈'이란 곡이 있습니다.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이란 가사를 가진 노래이지요. 항상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나도 이런 일탈을 한 번...이란 생각을 해보지만 극도로 소심하며 평범한 일상이 깨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저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지요. 이 소설 속 '나'란 인물도 그렇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극히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그런 그가 납골당에서 유골함을 훔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며칠간 연속 무단결근이라니... 일탈도 이런 대범한 일탈이 없습니다. '나'의 이런 일탈이 가능했던 건...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욱~해서 훅~ 할 수 있었던 건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앤디 강'이란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자 서술자는 분명 '나'임에도 불구하고 씬 스틸러랄까... 미친 존재감을 표출하는 건 역시 '앤디 강'입니다. 대책없고 개념없고 무식한 그...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고, 아니 어느샌가 그에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리고 맙니다. '나'도 독자들도요. 우리들의 일상이란 것이 대부분 분명 '나'와 다를 바 없이 단조롭고 지루하고 평범할 테니, 아마 우리 모두 '앤디 강'이란 인물을 통해 '일탈 대리만족'을 느끼는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p116. 이 사내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자신감과 허세가 넘친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모습을 본 나로서는 속내의 상처도 보인다. 소심한 나는 처음부터 상처받지 않으려 웅크리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일단 들이대고 부딪치는 스타일이다. 당연히 내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처럼 심하게 예민하진 않아도 그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근육은 단단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내장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내장에는 위장도 있지만 심장도 있다. 동행 내내 그의 심장박동을 들었던 것 같다. 덩치를 지탱하기에 그의 심작박동은 약해 보였다.

 

<여행>

영화로 치자면 이 소설은 일종의 로드무비라 할 수 있겠지요. 여행...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엔 낭만, 추억...이런 것들이 있겠지만, 저는 여행하면 '사건'이란 단어와 '성장'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연적관계였고, 심지어 현재에도 서로가 서로를 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남성이 4박 5일 동안 차 타고 비행기 타고 등산 하며 벌어지는 일들인데 결코 평범할리 없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서로를 질투하며 입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투닥거립니다. 그리고 그 꼴이 딱 유치원생들 수준으로 유치합니다.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며 끊임없이 실소를 터뜨리게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키득대며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문득 채플린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명언 말입니다. 두 남자는 길다면 긴 여정을 통해 각자 자신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보며 자기 자신을 바라 보게 되지요. 그 과정속에서 문득문득 코끝이 찡해지곤 합니다. 그들의 여행을 지켜 보는 과정을 통해 독자인 저 또한 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역시 여행이란 것은 현실에서도 그리고 소설에서도 매력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불어 남해, 여수, 제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 묘사 또한 일품입니다. 아마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그곳들로 당장 차를 몰고 싶어질 겁니다. 이런 점은 국내 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가 될 수 있겠네요.

 

p.109 나이만 같지 고향과 성격, 생활환경까지 완전히 다른 녀석과 나의 동행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분명한 점은 녀석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거다. 녀석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여정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든 바뀌어 있을 것이다.

 

<복수>

보통 여정 소설이라함은 그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소설도 끝이 나거나 여행 후의 아주 간략한 에필로그가 소개되면서 결말을 맺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 틀을 깹니다. 그들의 여행이 소설 전반부를 장식했다면, 그 여행을 마치고 성장하고 달라진 '나'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장식합니다. 짧지만 길었던 일탈과 여행을 통해 (긍정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나'가 그 변화와 성장의 결실로 행하는 것은 다름아닌 '복수'입니다. 나름 치밀하게 행해지는 복수의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을 주기도 해 흥미진진 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누구를 향한 복수였느냐고요? 그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

 

<희망>

망원동 브라더스에서도 그랬지만, 연적에서도 역시 참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그들은 결말에 가서 로또 같은 것에 당첨되어 혹은 사업이 대박나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소설이 끝을 맺진 않습니다. 소설의 발단 부분보다 오히려 더 팍팍해지고 고달파진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의 결말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며 희망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들의 희망과 가능성을...그리도 더불어 내 인생에 대한 희망도...... 아마 이런 이유로 저는 소설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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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해드립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로런스 블록 지음, 이수현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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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코타로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최종판>

유명한 작가 누구누구의 강력 추천! 이란 광고 문구... 너무나 식상한 문구라 상당히 팔랑귀인 저마저도 이런 문구에는 쉽게 혹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누구가 다름아닌 '이사카코타로'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그는 제가 무조건 믿고 보는 작가니까요. 게다가 켈러 시리즈는 이사카코타로의 최종 지향점과도 같은 책이라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책을 로런스블록이란 걸출한 중견 작가의 작품으로서가 아닌, 제가 애정해마지 않는 작가의 추천작으로서 펼쳐 들게 됐습니다. 그가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최종판이이란 어떤 스타일일지 점쳐 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감성감성 열매를 먹은 킬러 '켈러'>

'살인해 드립니다.'라니... 제목이 상당히 직설적입니다. 게다가 하드보일드라니, 그 수위(?)가 꽤나 강하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켈러라는 킬러(...운이 맞는 것이 참 좋네요...ㅋㅋ)... 마치 사춘기 소녀 같습니다. 출장지마다 그곳에 매료되어 이사를 꿈꾸지만, 또한 금방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는 변덕스러운 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개를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모든 생활을 개의 패턴에 맞춰나가기도 합니다. 정에도 한없이 약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의뢰인과 타깃 사이에서 내적 갈등도 자주 겪습니다. 우표 수집에 빠져들면서는 덕후스러움을 한껏 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섬세한 감성 덕분에 켈러는 심지어... 킬러라는 신분으로는 너무도 위험한 상담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개인적으로 10편의 단편 중 가장 맘에 들었던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만약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악마의 열매중 감성감성 열매란 것이 있다면 분명 그 열매는 켈러가 먹었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악마의 열매를 먹은 사람은 그 열매 덕에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는 동시에 어마어마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지 않습니까? 켈러 또한 그렇습니다. 이런 예민한 감성은 분명 킬러로서는 지극히 불필요한 약점이 될텐데... 어쩐 일인지 켈러는 이 감성 덕에 그의 능력치...특히 독자를 끌어 당기는 매력치가 극에 달하게 되니까요. 때문에 시원한 액션 스릴러를 기대하며 이 책을 펼치신 분들은 아마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기에 대한 묘사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총탄이 비오듯 퍼붓는 장면을 읽을 때면 머리가 멍~ 해져버리는 저에겐 이런 독특한 킬러 '켈러'의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그렇게 시간 순서대로 수록된 10편의 단편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켈러의 섬세한 심리 변화 과정이나 자아성찰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가 있습니다.

 

<독자를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킬러 '켈러'>

원래 킬러라함은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냉정함을 갖고 있다거나 어마무시한 살해 스킬(?)을 자랑하며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이 정석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에서 접하게 되는 킬러들은 흔히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지요. 주인공을 괴롭히는 '철저한 악인'이거나, 그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주로 부당한 권력에 맞서는 '의적 스타일의 암살자'이거나. 그런데 켈러라는 인물은 그 어디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애매함을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딜레마에 빠지고 맙니다. 그가 '철저한 악인'이라면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단죄되기를 빌면 될 것이고, '의적 스타일의 암살자'라면 악의 무리를 처단해 가는 그를 응원하면 되는데... 도통 그를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어찌됐건 그의 직업은 사람을 죽이는 킬러이니... 그는 분명 선인에 포함될 수는 없는 인물인데다가 가끔 실수로(-_-) 의뢰받지 않은 무고한 사람까지 살해하는 켈러를 보고 있노라면 약간의 분노와 함께 켈러를 증오하게 됩니다. 역시 킬러라는 직업은 어쩔 수 없지...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켈러 역시 이점에 대해 끊임없이 내적 갈등을 겪으며 자아를 성찰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켈러에 대한 미움이 점점 사라져가게 되는 묘한 심리 변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게다가 정에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다거나, 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거든요.) 어느새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거든요. 또 그러는 와중에 켈러가 타깃을 살해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아... 맞다... 켈러는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인 사람이었지...하고 깨닫습니다. 그렇게 10편의 단편을 읽으며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딜레마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딜레마는 즐겁기 짝이 없는 딜레마이며 이 책의 페이지 터너가 되는 것이지요.

 

<누구누구의 추천작이 아닌, 로런스 블록의 '켈러' 시리즈>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저는 이 책을 오로지 이사카코타로란 이름 때문에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고선 왜 그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의 최종판이라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사카코타로의 최근작인 '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에서의 킬러 '목부남'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거든요. 아마도 켈러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아 탄생시킨 캐릭터가 '목부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적인 요소와 더불어 질척거리지 않는 간결한 문장,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대화체, 지루하지 않은 내면 묘사까지.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하는 로런스 블록에 대한 저의 첫인상을 두 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그것은 '섬세하게 담백하다.' 였습니다. 대중적인 요소와 문학적인 요소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로런스 블록의 대단한 필력을 저 또한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사카코타로의 추천작 켈러 시리즈가 아닌, 오롯이 로런스 블록의 매력적인 캐릭터 '켈러'의 이야기를 즐기고 싶은 욕구가 커졌습니다. 도트의 전화가 울리고, 켈러는 또 어딘가로 출장을 가서 그곳의 매력에 흠뻑 취해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리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겠지요. 여전히 우표 수집에 열을 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런 그의 이야기들이 또 읽고 싶습니다. 부디 켈러의 다른 이야기들도 어서 번역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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