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요즘은 겨울 왕국의 '엘사'가 대세가 되어 버렸지만, 실은 공주의 대명사는 명실공히 '백설공주'이지요. 아마 전세계적으로 소녀들은 누구나 한번쯤 거울을 들여다 보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묻고선 자신의 이름을 대며 깔깔 웃어본 경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백설공주는......사실 가만 생각해 보면 동화속에서 딱히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예쁜 거 말고는 그녀의 능력이라고 해야할지, 매력이라 해야할지가 전혀 없으니까요. 뭐 아름다운 외모...야 말로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라면 할말은 없지만 말입니다. 무튼, 때문에 백설공주는 여타 다른 동화들 속 공주들 보다도 저에겐 훨씬 매력이 덜했습니다. 애초에도 지극히 수동적이기만 한 공주들이 등장하는 동화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제 눈엔 상당한 민폐 캐릭터로 보이던 백설공주는 특히나 별로인 캐릭터였지요.

 

그런데 이 백설공주가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백설공주 이야기는 핀란드에 구전되는 동화라고 하네요. 핀란드의 동화작가인 살라 시무카가 이를 변주하여 새로운 백설공주 시리즈를, 그것도 스릴러로 재탄생 시켰고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여담인데, 처음 작가 이름을 보고 일본인인 줄 알았습니다. 심지어 출간 직전에 모 인터넷 서점 사이트엔 이 소설이 일본 소설로 분류가 되어 있더군요. 그만큼 핀란드 소설은 생소하기만 합니다.) 백설공주...그녀가 현대적인 캐릭터로 어떻게 재탄생되었을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동화에서의 백설공주처럼 예쁜거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는 민폐 캐릭터라면 과감하게 책을 덮어버리자는 마음으로 책장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앞선 기우는 어느새 잊혀지고 정신없이 우리의 새로운 백설공주 '루미키'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들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백설공주는 17세의 '루미키'라는 소녀입니다. 그리고 '루미키'라는 이름은 핀란드어로 '백설공주'가 된다고 합니다. 바로 '백설공주'가 주인공인 셈이지요.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백설공주처럼 여리고 어여쁘고 청초하게 자라길 바라며 '백설공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모르지만, 루미키의 성격은 익히 알려진 동화 속 백설공주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눈'이라는 그녀의 이름과 어울리는 건 그녀의 피부가 아니라, 차갑고 냉소적인 성격 뿐이었으니까요. 핀란드의 명문 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인 그녀는 사람들 눈에 띄거나 섞이는 것을 싫어하며 조용히 없는 듯 지내는 게 삶의 신조였습니다.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참견하지 마라.'가 오랜 좌우명이었던 그녀는 어느날 우연히 학교의 암실에서 피 묻은, 아니 정확하게는 묻은 피를 세척한 돈뭉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좌우명엔 금이 가기 시작하지요. 수많은 동화속에서 금기를 어기는 바람에 겉잡을 수 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주인공들처럼 그녀도 그녀의 좌우명을 어기는 바람에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 발을 들이고 맙니다. 마치 세상물정 모른 채 '호기심'만이 충만했던 공주님들이 그 호기심을 참지 못해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고 루미키가 파헤치는 피비린내 나는 3만 유로에 얽힌 사건들이 미스터리 가득하다거나, 그 돈의 뒷배경에 어마어마한 음모나 반전이 숨어있다거나 하진 않습니다.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고 사건의 진상이란 것도 상당히 단순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미키의 모험담은 굉장한 흡인력을 갖고 있습니다. 문장 자체가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해서이기도 하고, 단 엿새 동안의 이야기가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 덕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3만 유로에 얽힌 미스터리를 쫓는 루미키의 현재 모험담에 슬쩍 슬쩍 끼워놓은 루미키의 어린 시절, 그리고 얼마전 헤어진 미스터리한 그녀의 남자친구 이야기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끌어올려 자꾸만 책장을 넘기게 하지요. 또한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인도 아닌 어중간한 (사춘기의 끝무렵쯤 되는) 소녀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그녀의 심리묘사 등은 때론 혼란스럽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핏빛 짙은 스릴러에 양념처럼 섬세한 낭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빼어난 점은 역시 핀란드의 겨울 묘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야기 내내 누군가를 쫓고, 또한 누군가에게 쫓기는 루미키의 가장 큰 적은 다름아닌 핀란드의 살인적인 겨울 날씨였습니다. 겨울철 평균 기온이 무려 영하 20~30도라는 핀란드의 겨울. 그 겨울 한복판을 끊임없이 달리고 뛰는 루미키. 그런 루미키의 모험담을 읽고 있자니 제 귀까지 어는 것만 같고, 자꾸만 손이 주머니를 찾아 갑니다. 제목이나 표지만 보면 뜨겁고 열정적일 것 같았던 소설은 주인공의 성격도 배경도 차갑디 차갑기만 했습니다. 이런 소설은 무더운 여름 열대야에 잠못 이룰 때 읽으면 제격이겠지만 바꾸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자꾸 기온이 내려가는 요즈음 같은 때에 읽으면 더욱 으슬으슬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서 약간의 심심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심심함 덕으로 다음 편이 몹시 궁금해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작품 전반에 그녀의 가정사에 얽힌 과거나, 그녀의 전 남자친구의 이야기, 또 간만 살짝 보여준 북극곰의 이야기...처럼 밑밥을 잔뜩이나 뿌려놓았거든요. 그러니 3부작의 서막이 끝이 났지만, 결코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습니다. 잔뜩 뿌려진 떡밥에 독자는 파닥파닥 낚일 뿐입니다. 역시 시리즈는 순서대로 줄줄이 전부 읽었을 때 그 오롯한 재미를 완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어서 제게 '눈처럼 희다.'와 '흑단처럼 검다.'를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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