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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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소설만 줄창 읽어대는 편독가인 저는 소설 중에서도 은유나 상징이 넘치는 소설들보다는 역시 서사가 풍부한 이야기들이 좋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독 시나리오 작가 출신 소설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걸 보면요. 천명관 작가가 그러했고, 또 이 작품의 김호연 작가가 그러합니다. 끊임없이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 웃다가 울다가 그리고 결말에선 여운도 있는 소설을 추천하는 많은 글들 속에서 김호연 작가의 '망원동 브라더스'라는 작품이 자주 언급되곤 합니다. 저 또한 그런 추천글들 덕에 '망원동 브라더스'를 접하고 많이 웃다가 '아구아구 콩나물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지면서 진한 여운과 함께 책을 덮었더랬죠. 때문에 작가의 신작이 참으로 반갑습니다. 재밌고 쉽게 읽히고 여운은 깊은 그런 이야기를 또 한껏 기대하며 첫장을 열었지요.

 

<연적>

재연이라는 전 여자친구의 부음 문자가 오면서 이 소설은 시작됩니다. 출판사 편집장인 '나'는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게 되고 거기서 '나'와 사귀기 전에 재연이 사귀었던 전 남자친구 '앤디 강'과 스치듯 재회하게 되지요. 그리고 1년이 흐르고... 재연의 1주기가 되어 그녀의 납골당에 방문하게 된 '나'는 다시 한 번 '앤디 강'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고, 의미 없는 질투와 경쟁심에 불 타 오르게 되는데... 심지어 두 남성은 급기야 재연의 유골함을 들고 튀게 됩니다. 그녀를 좀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위해서......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여정은 주평에서 시작해 남해, 여수, 제주까지 이어집니다. 재연이 생전에 좋아했던 산과 바다가 공존하는 곳으로... 상당히 낭만적인 장소들인데... 이 여행을 함께하는 것은 건장한 두 남성. 그렇게 그들은 무려 4박 5일 동안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 함께 자고 함께 여행합니다.  정작 그들이 사랑했던 여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미묘한 관계인 연적들끼리 말이지요.

 

p.80 영원한 게 있습니까? 영원하면 추억입니까? 다 사리지고 변하고 그러는 거지. 자, 마시고 잊어요.

 

<일탈>

자우림의 노래중에 '일탈'이란 곡이 있습니다.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 점프를, 신도림 역안에서 스트립쇼를'이란 가사를 가진 노래이지요. 항상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나도 이런 일탈을 한 번...이란 생각을 해보지만 극도로 소심하며 평범한 일상이 깨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저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지요. 이 소설 속 '나'란 인물도 그렇습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안정적이고 지극히 단조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그런 그가 납골당에서 유골함을 훔치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며칠간 연속 무단결근이라니... 일탈도 이런 대범한 일탈이 없습니다. '나'의 이런 일탈이 가능했던 건...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욱~해서 훅~ 할 수 있었던 건 그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앤디 강'이란 인물 때문이었습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자 서술자는 분명 '나'임에도 불구하고 씬 스틸러랄까... 미친 존재감을 표출하는 건 역시 '앤디 강'입니다. 대책없고 개념없고 무식한 그...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고, 아니 어느샌가 그에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버리고 맙니다. '나'도 독자들도요. 우리들의 일상이란 것이 대부분 분명 '나'와 다를 바 없이 단조롭고 지루하고 평범할 테니, 아마 우리 모두 '앤디 강'이란 인물을 통해 '일탈 대리만족'을 느끼는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p116. 이 사내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자신감과 허세가 넘친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모습을 본 나로서는 속내의 상처도 보인다. 소심한 나는 처음부터 상처받지 않으려 웅크리고 있는 데 반해, 그는 일단 들이대고 부딪치는 스타일이다. 당연히 내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처럼 심하게 예민하진 않아도 그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근육은 단단하게 만들 수 있지만 내장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내장에는 위장도 있지만 심장도 있다. 동행 내내 그의 심장박동을 들었던 것 같다. 덩치를 지탱하기에 그의 심작박동은 약해 보였다.

 

<여행>

영화로 치자면 이 소설은 일종의 로드무비라 할 수 있겠지요. 여행...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엔 낭만, 추억...이런 것들이 있겠지만, 저는 여행하면 '사건'이란 단어와 '성장'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연적관계였고, 심지어 현재에도 서로가 서로를 연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남성이 4박 5일 동안 차 타고 비행기 타고 등산 하며 벌어지는 일들인데 결코 평범할리 없습니다. 그들은 수시로 서로를 질투하며 입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끊임없이 투닥거립니다. 그리고 그 꼴이 딱 유치원생들 수준으로 유치합니다.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며 끊임없이 실소를 터뜨리게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키득대며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문득 채플린의 명언이 떠오릅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명언 말입니다. 두 남자는 길다면 긴 여정을 통해 각자 자신의 과거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보며 자기 자신을 바라 보게 되지요. 그 과정속에서 문득문득 코끝이 찡해지곤 합니다. 그들의 여행을 지켜 보는 과정을 통해 독자인 저 또한 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역시 여행이란 것은 현실에서도 그리고 소설에서도 매력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불어 남해, 여수, 제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풍광 묘사 또한 일품입니다. 아마 책을 읽다보면 누구나 그곳들로 당장 차를 몰고 싶어질 겁니다. 이런 점은 국내 소설을 읽는 또다른 재미가 될 수 있겠네요.

 

p.109 나이만 같지 고향과 성격, 생활환경까지 완전히 다른 녀석과 나의 동행도 이제 곧 끝날 것이다. 분명한 점은 녀석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거다. 녀석을 포함해 이 세계는 내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여정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든 바뀌어 있을 것이다.

 

<복수>

보통 여정 소설이라함은 그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소설도 끝이 나거나 여행 후의 아주 간략한 에필로그가 소개되면서 결말을 맺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 틀을 깹니다. 그들의 여행이 소설 전반부를 장식했다면, 그 여행을 마치고 성장하고 달라진 '나'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장식합니다. 짧지만 길었던 일탈과 여행을 통해 (긍정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나'가 그 변화와 성장의 결실로 행하는 것은 다름아닌 '복수'입니다. 나름 치밀하게 행해지는 복수의 과정은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긴장감을 주기도 해 흥미진진 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누구를 향한 복수였느냐고요? 그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책 속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

 

<희망>

망원동 브라더스에서도 그랬지만, 연적에서도 역시 참 팍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그들은 결말에 가서 로또 같은 것에 당첨되어 혹은 사업이 대박나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소설이 끝을 맺진 않습니다. 소설의 발단 부분보다 오히려 더 팍팍해지고 고달파진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들의 결말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며 희망같은 것이 보입니다. 그들의 희망과 가능성을...그리도 더불어 내 인생에 대한 희망도...... 아마 이런 이유로 저는 소설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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