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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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슬픔의 벚꽃박죽>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에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모란이 피어 찬란하지만, 이내 져버리고 마는 모란 덕에 슬픔 또한 함께 느낄 수 밖에 없는 봄. 매년 벚꽃잎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하면 나는 자연스레 이 시를 떠올리곤 한다. 모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그래도 역시 봄엔 벚꽃이다. 벚나무가 흩뿌리는 꽃눈 속을 걷다 보면 사람이 괜히 설레기도 들뜨기도 하거니와, 더불어 말이나 글로는 형용하기 힘든 애달픔 같은 것을 함께 느끼곤 한다. 그렇게 벚꽃은, 봄바람이 살랑거려 그렇지 않아도 찰랑거리는 강 물결 같은 사람의 마음을 뒤죽박죽 뒤흔들어 놓는다. 마치 봄날의 벚꽃처럼 이 소설은,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쇼노스케의 이야기는 내 안의 복잡한 여러 감정들을 뒤흔들어 놓는다. 뒤죽박죽, 벚꽃박죽.

 

『 p.36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마음에 깃든 불안이며 작은 희망을 살펴주지 않는다. 해가 바뀌어 이윽고 매화 봉오리가 터지고, 물에 비친 벚꽃 그림자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도가네 번의 산기슭이 신록으로 물들었다. 』

 

<향수>

주인공인 쇼노스케는 도가네 번 번주의 시종관인 후루하시 소자에몬의 차남이다. 누명을 쓰고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비의 죽음, 그 뒤의 더 큰 흑막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을 받아 에도의 도미칸 나가야에 살고 있다. 심약한 아비를 닮아, 어미인 사토에나 형인 가쓰노스케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그렇기에 그는 가족에 대한 깊은 그리움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거의 느끼질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짙은 향수를 느꼈다. 쇼노스케처럼 작은 촌마을 출신으로 수도권(소설로 치면 에도)으로 이주하여 고향을 떠나 산 지가 오래 되어서였을까. 아닌듯, 아닌척 하지만 나는 분명 쇼노스케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쨌거나 쇼노스케가 태어나 자란 곳은 도가네 번이었고, 그의 아비는 그곳의 시종관이었으니까.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에도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쇼노스케는 항상 고향에선....이란 사족을 함께 붙이곤 하는데 그러한 점이 바로 그가 고향을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그리움이란 것이 단순한 애정이 아닌, 애증이었을 뿐. 쇼노스케처럼, 그리고 나처럼 시골 촌구석에서 태어나 도시로 이주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쇼노스케의, 그리고 내가 느낀 향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 p.145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여기 도미칸 나가야에서도 하루 한 끼는 흰밥을 먹는다. 고향에서는 번사조차 하급 가문은 밥에 잡곡이 섞이는 게 당연했거니와, 흉년이면 설에 먹는 떡도 좁쌀이나 피로 만들었다. 도가네의 '일상'이나 '보통'은 에도 거리의 잣대로는 '가난'이다. 』

 

<가족, 다시 가족, 결국 가족>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는 한 인터뷰에서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이유에 대해 "가족의 소중함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 만능의 묘약은 아니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이 소설을 읽음으로써 새삼 가족에 대해 고마움과 미안함과 소중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반성하고 말았다. 그러다 주책없이 코끝이 찡해져 눈물까지 나고 말았다. 쇼노스케 가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박이었고,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했지만, 나는 그것 하나만은 믿는다.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사랑해도, 소중해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거라고... 단지 사랑하는 방식이 서로 어긋나 합을 이루지 못했을 뿐. 작가는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결국 소중한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겐 그 소중함을 잘 지키라는 말도 함께 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 다시 가족, 결국 가족이라고... 그렇게 내멋대로 해석해 버리고 말았다.

 

<꽃이 피고, 꽃청춘들이 만났으니 응당...>

아비를 잃고, 어미와 형에겐 미움 받아 타지에 홀로 사는 주인공 쇼노스케. 이렇게만 그를 묘사하고, 그가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스물셋 꽃다운 나이인 그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장지문 밖엔 봄바람이 불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강물은 분홍 물결로 일렁이고 있는데 말이다. 그때 그 앞에 등장한 단발머리의 벚꽃 정령. 비밀을 간작한듯 신비롭기만한 그녀. 그녀의 상처를 쇼노스케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녀를 통해 배우게 되고, 그녀 또한 쇼노스케를 통해 그녀 안의 깊은 상처를 치유 받는다. 꽃이 피고, 상처 안은 꽃청춘들이 만났으니 응당 그러하리라... 설레고, 들뜨고, 하지만 한편으론 애달프고... 그들의 사랑 또한 벚꽃과 많이 닮았다.

 

『 p.66 아침 강바람 속에 그 사람은 벚나무에서 날아 내렸다. 소리도 없이, 무게가 없는 것처럼, 사뿐히. 머리는 어깨 언저리에서 가지런히 잘랐다. 강바람이 불어 벚나무 가지가 흔들리면 그 사람의 머리칼도 춤을 추고, 그것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훤히 빛났다. 』

 

『 p.451 사람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에 기억하는 일의 축적이며, 마음도 그럼으로써 성장한다. 』

 

<오지랖으로 푸는 미스터리.>

나는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를 '모방범'이라는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강렬하고, 섬뜩했던 범죄 소설. 그런데 이 소설은 모방범하고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한없이 잔잔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자주 자주 유쾌하다. 이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방식이 모방범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의 미스터리 풀이법의 핵심 키워드는 '오지랖'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오지랖이 넓다. 어느날 갑자기 생면부지의 무사가 찾아와 내어 놓은 비밀 편지를 해독해보겠다는 주인공 쇼노스케. 그를 발 벗고 나서 돕는 도미칸 나가야 및 그의 주변 인물들(미야노 애향록)이 그렇다. 자신이 겪었던 슬픈 과거와 비슷한 사건이어서였는지, 자기 생업도 팽개치고 납치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지헤에(납치)도 그렇다. 호기심 많은 와카도, 그녀의 보모 쓰타도. 에도 대행이라는 걸출한 위치에 있으면서 자잘한 일에까지 관심 많은 시게히데도. 가와센의 여주인 리에도. 다들 오지랖이 넓어도 너무 넓다. 이런 인물들의 오지랖 덕분에 사건이 복잡해지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오지랖들 덕분에 소소한 미스터리들이 풀리곤 한다. 참 바람직한 오지랖이 아닐 수 없다.

 

<입체 인물 모형을 조립하다.>

쇼노스케는 이야기 속에서 '야오젠'이라는 요릿집의 입체 모형을 제작한다. 아마 요즈음에도 아이들 과자 속에 부록처럼 들어있는 그런 모형이리라. 쇼노스케가 요릿집의 입체 모형을 제작한다면,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입체 모형을 조립한다. 아니다, 그런 표현으론 부족할 것 같다. 미미여사 그녀가 창조해내고 묘사한 그녀의 인물들은 그보다 더 진화한 형태이다. 사람하고 똑같이 만들어진 밀랍인형이나, 4D 영화 속 인물처럼 살아 숨쉰다. 이 작품은 분량이 꽤 길기에 아주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때문에 초반엔 등장인물 소개를 들락거려야 누가 누구고, 그들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갈 수록... 나는 이미 도미칸 나가야에 살고 있었다. 도라조의 주정을 들었고, 긴의 눈물도 보았고, 다이치의 잔소리도 들었다. 빨래하는 히데와 잡담도 나누었고, 다쓰가 퍼뜨리고 다니는 소문들도 들었다. 630페이지라는 기나 긴 이야기가 단 한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었던 건 이런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캐릭터가 살아있는 이야기가 좋다.

 

<한 점의 풍속화를 보는 듯...>

사실 나는 미미여사의 시대물은 기피하고 있었다. 딱히 일본의 시대물이라서가 아니라, 역사에 그것도 다른 나라의 역사엔 완전히 백지 상태의 지식을 갖고 있는 터라 조금 두려웠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작품도 초반엔 알기 힘든 용어들 덕에(지역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관직명인지 등등) 읽기 조금 버겁기도 했다.(각주 같은 것을 이용해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계속 집중해서 읽어 가다 보니 한 점의 풍속화가 눈에 그려진다. 낯선 용어들이 어려워 그렇지 작가가 그 시대의 장소들을, 그리고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세밀하게 그려놓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마치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덕분에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일본의 에도 시대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모습이랑,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벚꽃, 다시 벚꽃>

매년 벚꽃이 필 때쯤이면, 꼭 봄비가 내린다. 그나마도 찰나에 피었다 지는 벚꽃을 더욱 빨리 떨구어 버리는 얄궂은 봄비. 그렇게 화려하게 피었다 금방 져버리고 마는 벚꽃. 이렇게 금세 지는 벚꽃을 보고 사람들이 안타까움의 탄식만을 늘어놓지 않는 것은, 벚꽃 뒤엔 신록이 찾아오고, 울긋불긋 단풍도 들 것이며, 하얗게 눈도 쌓였다가, 이듬해 또다시 꽃이 필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긴긴 뒤죽박죽 벚꽃박죽 쇼노스케의 이야기는 끝나버렸지만, 나는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와카가 한 그 약속. 나는 그 약속이 독자들에게 한 미미여사의 약속이기도 한 것임을 믿기에. 그렇게 벚꽃, 다시 벚꽃...의 이야기는 계속 될 것이리라 또 내멋대로 해석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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