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도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1
신시은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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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혹은 수십 년 전 고립된 장소(섬이라든지 오지라든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그 살인 사건은 미결로 남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현재가 되고, 과거 사건들의 관계자들은 특정 사건 때문에 다시 그 장소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복사판인 사건들이 그대로 일어나지요. 이런 설정 굉장히 익숙하지 않습니까? 저는 주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나, 그 긴다이치를 할아버지로 두고 있는 소년 탐정 김전일에서 자주 보았던 설정입니다.

 

또한 이런 오지 마을들엔 흔히 떠도는 전설이 많기도 합니다. 왜 수십년 전 엄마 치마폭에 숨어 보았던 전설의 고향이란 드라마에서도 보면 어떤 어떤 마을 어떤 산, 어떤 바위, 어떤 안개...같은 것에 얽힌 전설이라면서 드라마가 시작되지 않습니까? 이 작품 역시 어떤 섬, 그 섬의 영산, 그 섬의 안개와 관련된 섬뜩한 전설이 떠돕니다.

 

이러한 익숙한 설정들 덕에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상당한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배경이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이다 보니 거기서 오는 익숙함과 젊은 작가답지 않은 뛰어난 묘사력으로 인해 때이른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 밤을 시원하게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책장을 한번 열면 쭉쭉 그대로 마지막까지 내달릴 수 있는 미친 가독성을 자랑합니다.

 

물론 등장 인물이 몇 안되는데다가 이런 설정이 익숙한 추리 마니아들은 범인을 쉽게 눈치 챌 수도 있을 겁니다. 저도 중반부즈음에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꽤 치밀한 트릭이라든가 자연스럽게 곳곳에 숨어있던 복선들, 그리고 소름이 오소소 돋게 하는 묘사들 덕에 결말까지 내리 내달릴 수 있습니다.

 

일본 추리 소설에서 자주 보아오던 설정들과 우리 전설을 접목 시켜 스릴러적인 소재들을 잘 활용해 만들어 낸 수작이라 칭하고 싶네요.(뭐 제가 이런 평을 할 수 있는 깝이 되는 건 아니지만;;;) 작가가 정말 정말 젊던데 벌써 이 정도 필력이라니, 앞으로 이 작가의 눈부신 발전이 기대됩니다. 차기작 또한 한국적인 전설을 토대로 집필중이라니 또 한번 여름 밤을 하얗게 불태울 수 있는, 소름 오소소 돋는 작품 딱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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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왕국의 성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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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미미여사의 판타지 물입니다. 게다가 다른 세계로의 여행. 이세계 트립물. 저는 판타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미미여사의 판타지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추천 입학으로 이미 현립 고등학교에 입학한 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조금 복잡한 가정사도 가지고 있는 시로타, 유명 만화가의 어시이지만 현재는 휴가중인 파쿠 아저씨. 주요 인물은 고작 이 세 사람입니다. 세 사람 모두 어떤 그림을 통해 그 그림 속 세계로 들어가는 여행(?), 탐험(?)을 하게 되지요. 그림 속엔 성이 있었고, 그 성엔 한 소녀가 갇혀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그 소녀가 갇혀 있다고 확신하며 그 소녀를 구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만나고 이 탐험을 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한 사건이 화두에 오르고, 그들은 그 과거 사건과 그림 속 소녀와의 연관성을 파헤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선 역시 미미 여사의 특기인 추리적인 요소가 등장을 하는 부분이지요. 그렇게 그림 속 세계와, 현실의 세계는 점점 하나의 점으로 모아집니다.

 

역시 이 작품은 해리포터나 왕좌의 게임이나 반지의 제왕 같은 그런 느낌의 판타지는 아니었습니다. 역설적인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상당히 일상적인 판타지랄까요. 주인공들이 분명 그림 속 세계를 탐험하긴 하는데, 그것이 이야기의 큰 얼개라고 느껴지진 않았거든요. 탐험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이나 그림 속 세계가 어째서 생겨났는지가 더 중요한 포인트였으니까요.

 

사람은 누구나 되돌리고 싶은 과거가 있을 겁니다. 그때, 이러 이러했더라면......하고 아쉬워 하는 마음. 때문에 최근 방영된 한 드라마도 그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마음들은 대부분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과거의 한 장면에서의 자신이거나 혹은 사랑하는 누군가이거나. 그런 마음들이 담긴 작품이라 느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일본 대지진 이후에 나온 작품이라니 더욱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미여사는 역시 대단한 작가입니다. 화제가 되었던 그림 하나와, 산책길에 본 풍경 하나로 이런 작품을 구상해 냈다니 말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기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미친듯이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마치 신이나 시로타나 파쿠가 그림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기가 빨려 미친듯이 먹거나 기절하는 상태 비슷한 걸 저도 느꼈던 거지요. 이렇게 말하면 분명 안믿으실 것 같지만 정말 정말이랍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 오히려 오던 졸음도 달아나는데 이 작품만큼은 자꾸 졸음이 쏟아졌습니다. 급기야 책을 다 읽은 그제(토요일)엔 거의 하루 종일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가독성이 장난아닌 작품이었기에 결코 책이 지루해서도 아닌데 그랬습니다. 때문에 제겐 참 묘한 작품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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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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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 보일드 hard-boiled>

하라 료를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라고 한다는군요. ​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구요. 제가 좋아하는 이정명 작가를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 등 수많은 현존 작가들이 동경했다는 레이먼드 챈들러. 하지만 저는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고전'을 좀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하드'라는 단어 때문에 지레 겁부터 먹어서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드 보일드'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인 소녀'를 읽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도대체 이 '하드 보일드'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았더니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코넌 도일(ArthurConanDoyle) 류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두산 백과사전에서 발췌)라고 설명하고 있네요.

그래서 저는 이 설명을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제가 최근에 읽은 작품들에 적용해 이해해 보았는데요. 같은 요네스뵈 작품이지만 '아들'이라는 작품의 경우 서술이나 문장들이 한없이 섬세하고 감성적이라고 느꼈던 반면, '블러드 온 스노우' 같은 경우는 조금 더 차갑고 냉정하고 딱딱하다고 느꼈었는데, 바로 '블러드 온 스노우' 같은 작품이 '하드 보일드'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 맞는거겠지요? (잘못 이해한 거면 어쩌지.... 소심 소심;;)

무튼, 저는 '아들' 쪽이 '블러드 온 스노우' 보다 훨씬 더 구미에 맞긴 했지만, '블러드 온 스노우'의 경우에도 상당히 신선하고 재밌었기에 '하드'라는 단어에 지레 먹었던 겁을 조금 내려놓고 책을 펼쳤습니다.​

<내가 죽인 소녀 - 제목 속에 감추어진 반전>

사건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소녀의 유괴로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주인공이자 탐정인 사와자키는 유괴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의뢰인의 저택에 방문하는데 이는 유괴범의 농간으로, 그는 도리어 유괴범과 한 패로 오인 받아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유괴범은 사와자키를 돈 전달책으로 지정하고 우리들의 주인공이자 탐정인 사와자키는 결국 이 유괴 사건에 깊게 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속수무책 며칠간의 시간이 흘러버립니다. 이에 소녀의 외삼촌은 유괴범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자녀들을 조사해 달라고 사와자키에게 의뢰를 하지만.... 사와자키가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유괴된 그 소녀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고 맙니다. 이에 사와자키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소녀가 죽은 거라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때문에 더욱 유괴범을 찾는데 주력하게 되고 여러 의심스러운 등장 인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요.

그렇게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과 진범...은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작품에 '반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책을 읽을 때면 그 '반전'이 무엇인지 엄청 집착하면서 책을 읽어나기에 어느 정도 반전의 윤곽을 짐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추리 소설들은 분명 책을 읽어 나가는 중에 마주치게 되는 그 누군가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그들 중 가장 의외성이 짙고, 진범이었을 경우 독자에게 가장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면 윤곽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이 작품의 경우도 이런 논리로 생각을 해 보니 짐작이 가는 인물이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그 인물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제목을 곱씹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내가 죽인 소녀'라는 어쩌면 직설적인 제목에서의 '나'는 물론 사와자키일 수도 있지만(앞서도 말했듯이 사와자키는 자기의 실수 덕에 소녀가 죽은게 아닌가 계속 갈등하거든요.)... 바로 그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건 이 소설에선 그 반전이 결말에서 2차례 연달아 찾아 옵니다. 제가 짐작했던 진범에 대한 반전은 1차에서 그쳤는데(물론 짐작했던 인물이 범인이어서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닙니다. 짐작했음에도 꽤 충격적이었어요.) 연달아 2차 반전이 등장을 하더군요. 그리고 그 2차 반전은 정말 너무나 의외였던데다 도저히 이해 불가라 그 충격이 정말이지 컸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여전히 소름돋아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에둘러 말하기가 참 힘들군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출간된 지 근 30년이 다 되어가는 걸로 아는데, 현대 작품에 견주어도 내용면으로나 문장면으로나 참 근사하고 재밌고 멋진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나오키상 수상작은 다르군요.

<탐정 사와자키>

역시 주인공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습니다. 제가 사전까지 찾아가며 이해했던 '하드 보일드'라는 개념은 역시 작품 속 주인공인 '사와자키'를 통해 구현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드 보일드'한 사와자키가 저는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사와자키 탐정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옆집 아재'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왠지 친근하기도 하고, 동네 일에 완전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동네에 큰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또 적극 나서기도 하는, 그런 모순된 매력을 발산하는 이웃 '아재'들 말입니다. 그런 아재들은 흔히 늘 담배를 꼬나 물고 다니며, 오토바이나 낡은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데 사와자키가 딱 그렇거든요. 낡디 낡은 블루버드를 몰고 다니며, 신문에서 바둑 기보를 살펴 본다거나, 특정 기업을 비꼰다거나, 경찰에게 꽤나 까칠하다거나 하는 점들도 그렇고요. 그러면서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은근 잔소리도 심합니다. 하지만 그런 잔소리는 당연 그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이런 품이 정말 딱 이웃집 아재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사와자키의 언행을 보고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박장대소의 큰 웃음 말고 '피식'이나 '풉' 같은 웃음이 말이죠.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은 상황들에서 문득 문득 던지는 '아재 개그' 비슷한 촌철살인 때문에 자꾸 그런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왠지 자꾸만 친근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아, 이 탐정 왠지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 바로 '하드 보일드'라면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도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제 어서 사와자키의 다른 이야기들과 또 사와자키의 롤모델이라는 레이먼드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도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작가 하라 료>

이 책이 이색적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가 죽인 소녀'라는 장편이 끝나고,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면, 뒤에 독특한 단편이 하나 실려 있습니다. 사와자키가 어떤 재즈피아니스트를 조사한다는 내용인데, 작가 소개부터 읽고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그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지요. 그 피아니스트는 바로 이 작품의 작가 '하라 료'였던 겁니다. 작가는 재즈피아니스트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이 단편이 정말 재미있는 건, 바로 작품의 결말입니다. 무명 피아니스트 '하라 료'는 자신이 '사와자키'라는 탐정에게 조사를 당한(?) 것을 알고 사와자키를 찾아와 복수(?)해 주리라 단언하고 떠나는데 2년 반 뒤에 사와자키에겐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가 도착을 했다는군요. '내가 죽인 소녀'라는 본편 장편도 정말 재밌었지만, 저는 바로 이 단편에 반해버렸습니다. 실상 말이 단편이지 이건 작가가 너무나 재치있게 쓴 자신의 소개이자 또한 첫 소설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대한 소개였으니까요. 그것도 사와자키는 하라료를, 하라료는 사와자키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말이지요. 때문에 굉장히 흐뭇한 얼굴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데뷔한 지 꽤 오래 된 작가임에도 굉장히 더디게 작품을 발표하는 덕에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고작 4편만이 국내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어서 첫 작품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부터 정주행을 해야겠습니다. 이제서야 알게 된 작가인지라 조금 억울(?)하지만, 덕분에 아직 앞으로 읽을 작품이 남아있단 것에 설레는군요.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혹시 피아니스트 하라 료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하고 검색을 해보았는데... 제가 일본어는 까막눈이라 찾을 길이 없더군요. 정식 앨범이 일본에서는 나온 것도 같던데... 들어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법이 굉장히 독특하다던데... 정말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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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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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과 사이코패스>

7년의 밤에서의 오영제, 28에서의 박동해.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라는 것입니다. 두 작품을 읽으면서 두 인물들 때문에 책에 대고 욕지거리를 뱉었을 정도로 그들은 절대 악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정유정 작가는 '악인'을 묘사할 때 그 필력이 폭발한다는 것을요. 게다가 28 출간 당시엔 작가 스스로 6명의 주인공 중 '박동해'를 가장 아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때문에 작년부터 들려오던 신작 소식에, 그것도 상위 1%의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집필중이라는 소식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인'을 묘사할 때 특히 폭발하는 문장력으로 오영제나 박동해를 훨씬 능가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쓸 거라니. 팬으로서 어찌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출간이 임박했을 땐 너무 기대하고 있는 제 자신이 걱정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대했다가는 분명 실망하고 말텐데...하고 말이죠.

 

<시작과 끝>

이 작품은 참 묘한 작품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사건의 진상이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심지어 결말까지도. 시작하자마자 끝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작품. 하지만 신기하게도 뻔함이나 식상함을 느끼진 않습니다. 자신의 방에서 피범벅이 되어 깨어난 유진, 아래층에서 피가 낭자한 채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 간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은 해진, 어머니의 짜증나는 여동생 이모. 주요 인물이라고는 이렇게 고작 네 사람. 하지만 어머니나 해진이나 이모는 그저 유진의 주변 인물일 뿐, 이 작품은 팔할이 유진의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됩니다. 훤히 보이는 전개와 단순한 인물 구도, 거기에 서술은 주로 주인공의 심리 묘사. 이런 점들은 자칫 소설의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쫀쫀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스릴러에 등장하는 흔한 결말에서의 반전조차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나(독자)와 한유진>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흡입력이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맛. 그 흡입력으로 따지자면 이 작품은 단연 최고일 겁니다. 책장을 펼쳐 한 페이지 가량을 읽다 보면 이미 책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저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한유진이 됩니다. 그와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때문에 해진에게, 이모에게, 경찰에게 그의 살인 행각이 들통이 날까 긴장되고 안달이 나기까지 합니다. 유진이 위기에라도 봉착할라치면 책에 대고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분명 한유진은 살인자인데, 그것도 최상급 사이코패스인데,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하는 범죄자인데 어째서 내가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고선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맙니다. 때문에 저는 이 작품을 꽤나 여러차레 끊어 읽어야 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가지 내달리다가는 내가 진짜 한유진이 될 것 같아서.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는 이틀 동안 꿈에서마저 유진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이 엄청난 흡입력, 그렇게 형성되는 주인공 유진과의 공감대. 하지만 그 주인공은 최악의 사이코패스라는 깨달음. 그렇다면 내게도 혹시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가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즉, 피식자로서 포식자에게 당할까봐 느끼는 두려움이 아닌, 나도 혹시 포식자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공포가 더욱 컸던게지요.  이런 점들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이 정말 무서운 소설이라고 느꼈습니다.

 

<소설과 현실>

요즘 연일 묻지마 살인에 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들. 그리고 이런 묻지마 살인 사건의 빈도는 점점 더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그 잔인성 또한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정말 '악'과 함께 진화했는지도 모릅니다. 과거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 행해졌던, 그래서 도덕적으로 판단하기에 애매했던 행위들이 이젠 이유도 없고, 당위성도 없는 순수한 악행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은 누구나 그 본성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선이든, 악이든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발현되는지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또한 한유진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감춰져 있던 '악'이 어떻게 발현되는 지를, 그리고 유진이란 인물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이 작품을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내밀한 곳에 숨어있는 이 '악'이란 것이 발현하지 못하도록 예방접종을 잘해두어야겠지요.

 

<나(팬)과 정유정>

수 년 전 저는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을 차례대로 읽고 정유정 작가의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앞서서도 밝혔지만 그녀의 차기작을 애타게 기다렸고, 그 기대 또한 컸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던데, 종의 기원을 완독하고 난 후의 저의 솔직한 심정은 실망은 커녕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만 더욱 커져버렸다는 겁니다. 수 년 전 인터뷰에서 1년에 1편씩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던 작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싶지만, 28이 출간되고 이번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 근 3년이 걸렸으니, 또 다시 시작될 그만큼의 기다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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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살인 아르테 누아르
카밀라 그레베 지음, 서효령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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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왠지 한없이 낯설게 느껴지는 북유럽 소설, 특히 북유럽 스릴러들이 이제 곧잘 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자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요네스뵈의 영향이겠지요. 저또한 요네스뵈의 영향으로 이제 북유럽 스릴러, 하면 낯섦보단 기대감이 먼저 생깁니다.

 

전세계 수많은 나라들 중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출간되었다는 카밀라 그레베의 약혼 살인. 차세데 요네스뵈라고 칭송 받는다는 스웨덴 작가라는군요. 책을 펼치고 나서 몇장 읽은 첫인상은 요네스뵈 소설에서 자주 느꼈던 차가움이었습니다. 북유럽의 지역적 특성상 눈과 추위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건 기본 옵션이더군요. 그리고 그 차가움은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느끼는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키곤 합니다.

 

새해를 며칠 앞둔 어느날 목이 잘린 채 유명회사 CEO의 저택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정체불명의 여성. 그리고 사라져버린 집주인. 이를 조사하기 위해 투입된 형사 예스페르, 행동심리학자 한네. 그리고 홀로 두달 전 시간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는 엠마. 이야기는 이렇게 세사람의 시점이 혼합되어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세사람의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첨부되어있습니다. 어쩐지 조금은 넬레여사의 타우누스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저는 막장 요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굳이 이렇게 많은 부분 주인공들의 막장적 사생활을 넣었어야 했을까...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릴러적인 재미를 놓쳤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무나 닮은 10년 전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 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는 두 사건의 교차점. 과연 내 짐작이 맞을까 하는 흥미로움과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계속 내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달린 끝에 결말에서 맞이하게 되는 반전까지. 꽤 괜찮은 북유럽 스릴러 한편을 또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이 리뷰는 몽실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아르테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고 제 맘대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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