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하드 보일드 hard-boiled>

하라 료를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라고 한다는군요. ​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구요. 제가 좋아하는 이정명 작가를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 등 수많은 현존 작가들이 동경했다는 레이먼드 챈들러. 하지만 저는 아직 그의 작품을 접해보진 못했습니다. '고전'을 좀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서이기도 했고, '하드'라는 단어 때문에 지레 겁부터 먹어서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드 보일드'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인 소녀'를 읽기 전에 워밍업 차원에서 도대체 이 '하드 보일드'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았더니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계란을 완숙하면 더 단단해진다는 점에서 전의()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수법을 의미한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코넌 도일(ArthurConanDoyle) 류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두산 백과사전에서 발췌)라고 설명하고 있네요.

그래서 저는 이 설명을 제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고 제가 최근에 읽은 작품들에 적용해 이해해 보았는데요. 같은 요네스뵈 작품이지만 '아들'이라는 작품의 경우 서술이나 문장들이 한없이 섬세하고 감성적이라고 느꼈던 반면, '블러드 온 스노우' 같은 경우는 조금 더 차갑고 냉정하고 딱딱하다고 느꼈었는데, 바로 '블러드 온 스노우' 같은 작품이 '하드 보일드'라고 이해하면 되는 거 맞는거겠지요? (잘못 이해한 거면 어쩌지.... 소심 소심;;)

무튼, 저는 '아들' 쪽이 '블러드 온 스노우' 보다 훨씬 더 구미에 맞긴 했지만, '블러드 온 스노우'의 경우에도 상당히 신선하고 재밌었기에 '하드'라는 단어에 지레 먹었던 겁을 조금 내려놓고 책을 펼쳤습니다.​

<내가 죽인 소녀 - 제목 속에 감추어진 반전>

사건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소녀의 유괴로 시작됩니다. 우리들의 주인공이자 탐정인 사와자키는 유괴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고, 의뢰인의 저택에 방문하는데 이는 유괴범의 농간으로, 그는 도리어 유괴범과 한 패로 오인 받아 경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유괴범은 사와자키를 돈 전달책으로 지정하고 우리들의 주인공이자 탐정인 사와자키는 결국 이 유괴 사건에 깊게 관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 아닌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속수무책 며칠간의 시간이 흘러버립니다. 이에 소녀의 외삼촌은 유괴범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자녀들을 조사해 달라고 사와자키에게 의뢰를 하지만.... 사와자키가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유괴된 그 소녀는 결국 주검으로 발견되고 맙니다. 이에 사와자키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소녀가 죽은 거라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때문에 더욱 유괴범을 찾는데 주력하게 되고 여러 의심스러운 등장 인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요.

그렇게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과 진범...은 적잖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작품에 '반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책을 읽을 때면 그 '반전'이 무엇인지 엄청 집착하면서 책을 읽어나기에 어느 정도 반전의 윤곽을 짐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대부분의 추리 소설들은 분명 책을 읽어 나가는 중에 마주치게 되는 그 누군가가 범인일 가능성이 높은데다가, 그들 중 가장 의외성이 짙고, 진범이었을 경우 독자에게 가장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보면 윤곽이 드러나게 마련이니까요. 이 작품의 경우도 이런 논리로 생각을 해 보니 짐작이 가는 인물이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그 인물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제목을 곱씹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내가 죽인 소녀'라는 어쩌면 직설적인 제목에서의 '나'는 물론 사와자키일 수도 있지만(앞서도 말했듯이 사와자키는 자기의 실수 덕에 소녀가 죽은게 아닌가 계속 갈등하거든요.)... 바로 그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건 이 소설에선 그 반전이 결말에서 2차례 연달아 찾아 옵니다. 제가 짐작했던 진범에 대한 반전은 1차에서 그쳤는데(물론 짐작했던 인물이 범인이어서 충격을 받지 않은 건 아닙니다. 짐작했음에도 꽤 충격적이었어요.) 연달아 2차 반전이 등장을 하더군요. 그리고 그 2차 반전은 정말 너무나 의외였던데다 도저히 이해 불가라 그 충격이 정말이지 컸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여전히 소름돋아요. (스포일러가 될까봐 에둘러 말하기가 참 힘들군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출간된 지 근 30년이 다 되어가는 걸로 아는데, 현대 작품에 견주어도 내용면으로나 문장면으로나 참 근사하고 재밌고 멋진 소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나오키상 수상작은 다르군요.

<탐정 사와자키>

역시 주인공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겠습니다. 제가 사전까지 찾아가며 이해했던 '하드 보일드'라는 개념은 역시 작품 속 주인공인 '사와자키'를 통해 구현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드 보일드'한 사와자키가 저는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사와자키 탐정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옆집 아재'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 조금 무섭기도 하면서, 왠지 친근하기도 하고, 동네 일에 완전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동네에 큰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또 적극 나서기도 하는, 그런 모순된 매력을 발산하는 이웃 '아재'들 말입니다. 그런 아재들은 흔히 늘 담배를 꼬나 물고 다니며, 오토바이나 낡은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데 사와자키가 딱 그렇거든요. 낡디 낡은 블루버드를 몰고 다니며, 신문에서 바둑 기보를 살펴 본다거나, 특정 기업을 비꼰다거나, 경찰에게 꽤나 까칠하다거나 하는 점들도 그렇고요. 그러면서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은근 잔소리도 심합니다. 하지만 그런 잔소리는 당연 그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에서 나온 것들이지요. 이런 품이 정말 딱 이웃집 아재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런 사와자키의 언행을 보고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박장대소의 큰 웃음 말고 '피식'이나 '풉' 같은 웃음이 말이죠.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은 상황들에서 문득 문득 던지는 '아재 개그' 비슷한 촌철살인 때문에 자꾸 그런 웃음이 새어나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가 왠지 자꾸만 친근하게 느껴지더군요. 아아, 이 탐정 왠지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게 바로 '하드 보일드'라면 '하드 보일드'라는 장르도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때문에 이제 어서 사와자키의 다른 이야기들과 또 사와자키의 롤모델이라는 레이먼드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도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작가 하라 료>

이 책이 이색적인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내가 죽인 소녀'라는 장편이 끝나고, 작가의 후기를 읽고 나면, 뒤에 독특한 단편이 하나 실려 있습니다. 사와자키가 어떤 재즈피아니스트를 조사한다는 내용인데, 작가 소개부터 읽고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그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지요. 그 피아니스트는 바로 이 작품의 작가 '하라 료'였던 겁니다. 작가는 재즈피아니스트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이 단편이 정말 재미있는 건, 바로 작품의 결말입니다. 무명 피아니스트 '하라 료'는 자신이 '사와자키'라는 탐정에게 조사를 당한(?) 것을 알고 사와자키를 찾아와 복수(?)해 주리라 단언하고 떠나는데 2년 반 뒤에 사와자키에겐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가 도착을 했다는군요. '내가 죽인 소녀'라는 본편 장편도 정말 재밌었지만, 저는 바로 이 단편에 반해버렸습니다. 실상 말이 단편이지 이건 작가가 너무나 재치있게 쓴 자신의 소개이자 또한 첫 소설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대한 소개였으니까요. 그것도 사와자키는 하라료를, 하라료는 사와자키를 소개하는 형식으로 말이지요. 때문에 굉장히 흐뭇한 얼굴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데뷔한 지 꽤 오래 된 작가임에도 굉장히 더디게 작품을 발표하는 덕에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고작 4편만이 국내에 소개되었다고 하는데, 어서 첫 작품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부터 정주행을 해야겠습니다. 이제서야 알게 된 작가인지라 조금 억울(?)하지만, 덕분에 아직 앞으로 읽을 작품이 남아있단 것에 설레는군요.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혹시 피아니스트 하라 료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을까...하고 검색을 해보았는데... 제가 일본어는 까막눈이라 찾을 길이 없더군요. 정식 앨범이 일본에서는 나온 것도 같던데... 들어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그의 피아노 연주는 기법이 굉장히 독특하다던데... 정말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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