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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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과 사이코패스>

7년의 밤에서의 오영제, 28에서의 박동해.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라는 것입니다. 두 작품을 읽으면서 두 인물들 때문에 책에 대고 욕지거리를 뱉었을 정도로 그들은 절대 악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정유정 작가는 '악인'을 묘사할 때 그 필력이 폭발한다는 것을요. 게다가 28 출간 당시엔 작가 스스로 6명의 주인공 중 '박동해'를 가장 아꼈다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때문에 작년부터 들려오던 신작 소식에, 그것도 상위 1%의 사이코패스 이야기를 집필중이라는 소식에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인'을 묘사할 때 특히 폭발하는 문장력으로 오영제나 박동해를 훨씬 능가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쓸 거라니. 팬으로서 어찌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출간이 임박했을 땐 너무 기대하고 있는 제 자신이 걱정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대했다가는 분명 실망하고 말텐데...하고 말이죠.

 

<시작과 끝>

이 작품은 참 묘한 작품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사건의 진상이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심지어 결말까지도. 시작하자마자 끝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작품. 하지만 신기하게도 뻔함이나 식상함을 느끼진 않습니다. 자신의 방에서 피범벅이 되어 깨어난 유진, 아래층에서 피가 낭자한 채 발견된 어머니의 시신, 간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은 해진, 어머니의 짜증나는 여동생 이모. 주요 인물이라고는 이렇게 고작 네 사람. 하지만 어머니나 해진이나 이모는 그저 유진의 주변 인물일 뿐, 이 작품은 팔할이 유진의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됩니다. 훤히 보이는 전개와 단순한 인물 구도, 거기에 서술은 주로 주인공의 심리 묘사. 이런 점들은 자칫 소설의 전개를 지루하게 만들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쫀쫀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스릴러에 등장하는 흔한 결말에서의 반전조차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나(독자)와 한유진>

정말 재미있는 책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흡입력이 대단하다고 말합니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맛. 그 흡입력으로 따지자면 이 작품은 단연 최고일 겁니다. 책장을 펼쳐 한 페이지 가량을 읽다 보면 이미 책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저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는 한유진이 됩니다. 그와 함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때문에 해진에게, 이모에게, 경찰에게 그의 살인 행각이 들통이 날까 긴장되고 안달이 나기까지 합니다. 유진이 위기에라도 봉착할라치면 책에 대고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분명 한유진은 살인자인데, 그것도 최상급 사이코패스인데, 반드시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하는 범죄자인데 어째서 내가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지에 생각이 미치고선 스스로 화들짝 놀라고 맙니다. 때문에 저는 이 작품을 꽤나 여러차레 끊어 읽어야 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가지 내달리다가는 내가 진짜 한유진이 될 것 같아서.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는 이틀 동안 꿈에서마저 유진과 함께 생각하고 행동했습니다. 이 엄청난 흡입력, 그렇게 형성되는 주인공 유진과의 공감대. 하지만 그 주인공은 최악의 사이코패스라는 깨달음. 그렇다면 내게도 혹시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가 감춰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즉, 피식자로서 포식자에게 당할까봐 느끼는 두려움이 아닌, 나도 혹시 포식자가 아닐까 하는 데서 오는 공포가 더욱 컸던게지요.  이런 점들 때문에 저는 이 소설이 정말 무서운 소설이라고 느꼈습니다.

 

<소설과 현실>

요즘 연일 묻지마 살인에 관한 보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흉악범들. 그리고 이런 묻지마 살인 사건의 빈도는 점점 더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그 잔인성 또한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정말 '악'과 함께 진화했는지도 모릅니다. 과거엔 그저 살아남기 위해 행해졌던, 그래서 도덕적으로 판단하기에 애매했던 행위들이 이젠 이유도 없고, 당위성도 없는 순수한 악행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은 누구나 그 본성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선이든, 악이든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발현되는지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가 또한 한유진이라는 인간의 본성에 감춰져 있던 '악'이 어떻게 발현되는 지를, 그리고 유진이란 인물은 그 누구도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이 작품을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내밀한 곳에 숨어있는 이 '악'이란 것이 발현하지 못하도록 예방접종을 잘해두어야겠지요.

 

<나(팬)과 정유정>

수 년 전 저는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을 차례대로 읽고 정유정 작가의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앞서서도 밝혔지만 그녀의 차기작을 애타게 기다렸고, 그 기대 또한 컸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던데, 종의 기원을 완독하고 난 후의 저의 솔직한 심정은 실망은 커녕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만 더욱 커져버렸다는 겁니다. 수 년 전 인터뷰에서 1년에 1편씩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밝혔던 작가.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싶지만, 28이 출간되고 이번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 근 3년이 걸렸으니, 또 다시 시작될 그만큼의 기다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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