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첩보전의 역사 : 인물편
어니스트 볼크먼 지음, 석기용 옮김 / 이마고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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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시절 , 장래에 되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언제나 그건 007이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서방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멋진 남자, 신사이면서 대단한 완력을 소유하고 거기에 미녀들까지 굴비처럼 엮여 따라오니, 007같은 첩보원의 인생은 내게는 정말 환상 같은 삶의 전형이었다.

007의 모습이 이처럼 환상이라면 [20세기 첩보전의 역사]에 소개된 스파이들의 모습은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그들의 실상이다. 물론 역사를 그들이 온통 다 재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역할이 중대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왜 독일군은 엉뚱한 지점인 칼레에서 연합군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는 사실 연합군 측의 이중간첩이 흘린 역정보로 인해 독일이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주요 고비에 스파이들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그들은 정보를 알아내고, 거짓 정보를 흘려주어 적을 혼란시키고, 상대를 유혹하고 매수하고 포섭하였다. 이들의 실상은 지금까지 나온 많은 헐리우드  스파이물 영화의 모델이 되었음을 알 수 있고, 영화보다 더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실제 스파이들의 삶은 조망할 수 있게 하였다. 

스파이 유형별로 분류되어 간략하게 그들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 인물들의 삶이 사실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A에 의해 B가 포섭되어 스파이로 양성되며, B는 C를 통해 정보를 캐낸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D 가 적국에 전향, 혹은 체포되며 백일하에 드러난다. 이러한 관계가 이 책에 소개된 스파이들의 운명속이 얽혀져 있기에 금세 스파이들의 조직도가 머리 속에 새겨진다.

책을 읽는 도중, 수 많은 스파이들은 이 책에 수록되지도 못하고 수면 하에서 잠들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 대다수의 무명 스파이는 작가가 소개한 '훌륭한 스파이가 되기 위한 삼계명', 즉 "첫째, 절대 붙잡히지 말라. 둘째, 붙잡히더라도, 우리는 결코 너희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셋째, 위의 계명들 외에 더 이상 다른 계명은 필요치 않다."라는 삼계명을 잘 몰랐던지 무시했을 것이다. 그래서 차가운 감방 속에서 고문을 받으며 사라진 이들의 운명적인 삶이 그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처럼 드리웠음을 알게 된다.

007을 인생의 롤모델로 삼았던 분들에게 대단히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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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리고 80
콜린 히긴스 지음, 정성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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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콜린 히긴스의 유명한 시나리오 [19 그리고 80]을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을 오랜만에 누렸습니다. 이 작품은 외국에서는 이미 TV와 영화로 만들어졌고 연극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레퍼토리입니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삶보다는 죽음에 집착하는 해롤드와, 이제 살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모드의 사랑이야기라서 원제는 [Harold and Maude]입니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짧고 강렬한 통찰을 보여주었기에 시나리오의 교본처럼 숭배를 받고 있습니다. 참 Collin Higgins는 예전 할리우드 영화 [Nine to Five], [Foul Play],  [Silver Streak]과 같은 재치있는 작품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연극 [19 그리고 80]은 박정자의 작품입니다. 이제 60이 된 고참 연기자의 저력과 여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입니다. 극본에 휘둘리지 않고, 연출에 휘둘리지 않고, 무대에 휘둘리지 않고 도를 깨친 듯 한 박정자의 연기는 관객의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마도 3년 이상 같은 역할을 연기한 경험에서 우러난 자연스러움도 이러한 분위기에 일조를 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풋풋한 어린 소년을 연기해야 하는 해롤드의 캐스팅은 아마도 연출가 강영걸에게는 힘든 숙제였을 것입니다. 경험 많은 연기자를 쓴다면 해롤드의 풋풋함이 나오진 않을 것이고, 반대로 너무 어린 배우를 쓴다면 그 경험 부족으로 어설플 뿐 아니라, 박정자의 '모드'에게 휘둘리기 십상일 테니 말입니다.

우려했던 것에 비해 소년 윤태웅은 훌륭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한 것이 오히려 '해롤드'본인의 캐릭터에 누가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 비해 삶에 비관적인 해롤드로부터 모드를 만나면서 인생의 기쁨을 느끼고, 활력을 찾아가는 변화의 과정을 닮는 어려운 역이 였음이 분명한데, 이런 변화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반부에서는 좀더 힘을 뺏으면 좋았다고 느꼈기에, 사실 비관적인 해롤드보다는 적극적인 후반부의 해롤드에서 그의 연기는 빛을 발했다고 생각합니다.

 영상화, 무대화를 염두에 둔 작품이라서 인지 소설 [19 그리고 80]이 주는 감동은 무대에서의 그것보다는 훨씬 떨어집니다. 자신의 삶을 던져 自由를 전파하는 '모드'의 탁월한 대사는 소설을 통해 곱씹어봐도 여전히 재밌었습니다.

극단의 각색과 연출도 원작 못지않게 훌륭하게 생각합니다. 원작의 행간을 적절히 채워 놓았고, 무대에 불필요한 상황을 적절히 삭제하는 현명한 선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강영걸의 연출은 관객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역동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대라기보다는 한 편의 영화와 같은 편집과 템포가 무대 위에 펼쳐졌기에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 두 시간이었습니다. 

 살면서 제일 지겨운 것이 인생 선배랍시고 술자리에 불러놓고 두 시간씩 인생에 관한 훈계를 할 때입니다. 그 훈계가 '모드'할머니가 '해롤드'에게 하듯 재밌고 생생한 내용이었다면 아마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겁니다. '모드'의  삶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의 인생의 더욱 자유스러웠을지 모릅니다. 최소한 더 재밌었을 겁니다. 그래서 연극 [19 그리고 80]과 책 [19 그리고 80] 모두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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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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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기존의 추리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추리소설의 전형은 어떤 범인이 사건을 일으키고 탐정이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전형을 벗어나고 있다. 이렇다 할 범인이 등장하는 류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대체 우리가 풀어야할 수수께끼가 무엇인가'하고 계속 미궁을 헤매는 기분일 수도 있다.  어떤 범인을 찾는 것도 아니고,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고, 독자는 그 숨겨진 이면이 드러날 때 허를 찔렸음에 놀라워한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이다.

사실 사건도 별다른 것이 없다. 어릴 적부터 탐정 기질이 농후한 나루세가 호라이 클럽이란 불법 판매조직이 살인을 교사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다른 추리소설처럼 엄청난 비밀을 가진 사건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추리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런 사건의 크기에 있지 않다. 캐릭터의 생생함, 사건의 리얼리티, 촘촘한 인물의 관계가 씨줄과 날줄로 얽히며 우리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마냥 이 소설의 매력에 휩싸이게 된다. 연속된 사건의 흐름에 독자는 롤러코스터를 탄 어린아이 마냥 책장을 꽉 붙든 채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달려간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이 소설의 반전에 대해 뭔가 귀띔을 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독자가 이 반전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약간은 작가의 반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작가의 반칙에 어느 정도는 우리도 심정적으로 공범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반칙과 독자의 선입견이 함께 공조를 해 이 소설의 반전을 이루었으니, 이점은 책장을 덮은 뒤 이상한 씁쓸함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쓴 후에도 묘한 장난기가 발동하니, 이후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에게 하나만 힌트를 더 주고 싶다. 이 소설은 절대 영화화되거나 드라마로 만들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잘 아실 것이다.

반전 때문이 아니라도 이 소설에는 권할만한 여러 가지 장점들이 있다. 새로운 추리소설에 새로운 탐정의 모델도 제시했으니, 추리소설 팬 뿐 아니라 문예물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즐거운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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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경제학 - 상식과 통념을 깨는 천재 경제학자의 세상 읽기
스티븐 레빗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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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시절 경제학원론 수업에서 C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워낙 숫자와 관련된 학문을 싫어한 탓도 있지만 솔직히 그때 담당 교수도 지독히 재미없게 가르쳤다. 경제학원론에서 가르치는 모든 이론은 내게는 허공에 뜬 것이었고, 수업에 흥미가 없어서인지 시험공부도 대충 할 수밖에 없었다.

[괴짜경제학]을 읽어보니 경제학이 지독히 현실적인 학문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거대한 이론의 틀에 현실을 맞춘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 어떤 법칙성을 찾아내어서인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재밌고 신선하다. 이 책은 이처럼 현실감을 가진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이 그의 연구 논문들을 일반 독자들이 알기 쉽게 풀어 쓴 글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사회적 통념이 사실은 잘못된 선입견이나 정보에 기반하여 형성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작년의 뉴욕 유학에서 예상 밖에 그곳이 안전한 도시인 것에 놀란 적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론으로 뉴욕이 안전해진 이유를 설명했는데, 첫째는 검사 출신인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이 당선되어 뉴욕의 치안을 바로잡았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거리를 향해 통유리로 사방을 감시하게끔 만들어진 스타벅스 커피숍의 유행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을 펼친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낙태의 전면적 허용'이 미국 대도시의 범죄율을 급속히 떨어뜨렸다는 분석에 가히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선입견과 잘못된 정보의 왜곡을 넘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욱 신선하다. 반인종주의로 폭력적인 집단으로 알려진 KKK가 사실은 그렇게 실적이 남을 만큼 폭력적이지 않았고, 다만 그들의 초기 이미지로 '테러의 두려움'을 오히려 무기화했다는 사실이 그렇거니와,  KKK의 비밀스러움을 조롱거리로 삼아 그들을 무력화시킨 일례도 아주 재밌었다.

자식을 기르는 입장의 부모에게는 힘 빠지는 진실도 알려준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해주느냐(What parents do)는 거의 영향이 없고, 부모가 어떠한 사람인가(who the parents are)가 이미 자식의 인생을 결정지었다는 사실들의 통계적인 증거는 더욱 충격적이다. 즉 이미 부모의 유전적인 자질이나 사회, 경제적인 현 위치가 자식의 미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책을 많이 사주거나, 박물관에 데려가거나, 잠자리에서 책을 읽어주는 후천적인 행위는 자식의 미래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놓치는 또는 당연히 생각하는 자명한 현실의 법칙을 저자는 찾아내어 입증하고 또 반론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우리에 세상의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내가 만일 대학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 경제학원론 성적은 더 좋았을까? 그건 확실치 않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재미없게 이론을 나열했던 경제학원론 교수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 강의 내용은 좀더 실속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비소설이 정보가 많고 신선하며 게다가 아주 쉽게 쓰였다면, 나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괴짜경제학]은 내게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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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여자 박완서 소설전집 1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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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은 내게 영감을 준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나는 많은 드라마의 캐릭터를 생각했고, 에피소드를 상상했으며, 나의 삶을 걱정했다. 박완서의 영감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그녀의 작품은 예전 TV의 단막극이 잘 되던 시절에는 많이도 영상화 되었다.

박완서의 소설은 내게 어머니의 이미지를 많이 연상시킨다. 예전 어머니들이 보던 여성지에 주로 기고했던 그녀의 글들이어서인지, 내게는 어머니가 봐야하는 세계를 몰래 넘겨다보는 긴장감이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생겨난다. 단지 이뿐만 아니라 그녀의 소설은 모녀지간의 갈등을 다룬 것도 많고, 글의 모티브가 중년여성에서 비롯된 것이 많아 내게는 유독 어머니가 연상되는 글들이다.

[서있는 여자]는 여자를 위한 소설이다. 어머니 경숙의 삶도 독자로 하여금 의미심장하거니와, 딸 연지의 삶도 흥미로운 소재이다. 80년대 초반에 소설이 시작되어 85년에 단행본으로 묶어진 이 소설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구태의연하고 어색한 구식 캐릭터들의 모습도 이해가 될 만하다. 더 나아가 80년대를 생각하고 나서 이 노작가의 여성적인 시선은 그 당시로선 낯 선 것이었을 것이고, 아직까지도 유효한 서늘하고 예리한 부분이 있다.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80년대와 지금과의 차이는 '母性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글에서 연지는 남녀평등의 수단으로 임신 중절을 선택했지만, 오늘날 다시 이런 소재가 쓰인다면 당당히 아이를 낳아 자신이 기르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벌써 20여년이 지난 오래된 작품이지만, 여전히 재밌는 소설이었다. 어머니의 잡지를 통해 드문드문 읽었던 기억을 이번에 한통으로 이어붙이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소설 중에 가장 반동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철민의 모습을 보면서, 내게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은지 자기 점검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에게도 권할 만한 소설이지만, 남성에게는 더욱 가치가 읽는 소설일 수 있다.

작가에게 여유가 있다면 21세기를 맞아 한번 개작을 권하고도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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