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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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처]를 TV에서 드라마로 만든다면 막장 드라마란 소리를 듣기에 딱 좋습니다. 주인공 남자가 수염 하나를 기르면서 과거와는 다르게 신분 세탁을 합니다. 신분 세탁을 한 이유는 처와 바람을 피는 남자를 우발적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에서 아마추어 사진 작가로 신분을 세탁한 주인공은 외려 사진가로서의 삶이 너무 잘 풀리면서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소설 [빅 피처]는 막장 드라마로 빠질 이야기를 잘 걷어 들여 문학으로서의 위엄을 지켜 내었습니다. 막장으로 치닫는 이야기의 내면에 흐르는 주인공의 상실감과 삶의 의미를 잘 포착해 내었기 때문입니다. 신분을 세탁하면서 한 세계와 결별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TV 드라마처럼 '복수할 거야' 를 외치고 성형 수술을 하는 단순하고 저돌적인 마음가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익숙한 세계와 결별했고, 그 익숙한 세계가 주었던 추억과 행복이 바로 한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세계로 넘어간 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비약임이 분명합니다.

작가는 이런 비약 전후에 인간에게 찾아오는 정체성의 혼란, 상실감, 그리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과 공포 등을 효과적으로 그려내 결국 삶의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되새기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과 연애에 대한 몰입은 그 어느 독자에게도 금방 감정 이입할 여지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런 처지에 다다른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하고 독자를 행간의 틈 사이로 사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색을 가능하게 하는 이 소설의 장점이 '막장 드라마'라는 오명에서 이야기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인류가 좋아하는 이야기 가운데 막장극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막장이었고 셰익스피어의 문학 대부분이 막장이자 패륜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바로 인간성의 심연을 흩어내었고 그를 통해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빅 피처]는 재미있는 통속 소설이지만 함부로 무시할 드라마는 아닙니다. 독자들에게 최소한 남의 극적인 상황을 통해 현실을 감사하게 하는 진정제를 투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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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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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에 '신'과 필적할 권위를 가진 직업이 있다면 '의사'가 바로 그런 직업일 것입니다. 환자의 삶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고 환자의 생명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의사는, 그래서 환자들에게 대단한 존경과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의사에게는 엄격한 직업윤리가 필요합니다. 의사가 선의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만약 환자가 그런 의사를 만난다면 그는 어떤 곤경에 빠질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글머리를 읽는다면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은 진지하고 무거운 소설이라고 선입견을 지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 소설은 아주 경쾌하고 흥미롭습니다. 기발한 캐릭터들이 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며 야구에 비유하며 풀어나가는 작가의 재치가 또한 신선합니다. 의료계의 현실과 명암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작가의 해박함 때문에, 대학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와 계략의 술수들이 소설의 미스터리만큼 흥미진진합니다.

어떤 분야를 잘 아는 것과 잘 알려주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일입니다. 작가 가이도 다케루는 잘 아는 것을 잘 알려주어서 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아무쪼록 '머리'로 쓴 글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과 세월에 옹골차게 들어앉아 잘 익은 오렌지를 베어먹는 상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록 미스터리 구조가 뜻밖에 간단하여 허무하지만, 영화 [공공의 적]에서 보여 주듯 캐릭터의 화려한 성찬이 펼쳐집니다. 재미있고 빠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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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은 속삭인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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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은 속삭인다]는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작인 만큼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발견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화차], [이유], [모방범]에서 보여준 촘촘한 이야기를 짜는 성숙함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삼는다든지, 인물의 성정(性情)에 대해 깊이 있는 묘사를 하는 미미 여사 특유의 기량은 이미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소설은 여러가지 이야기로 다층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소년 마모루의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 이유 없이 자살하는 여성들의 연쇄 미제 사건, 마모루의 이모부인 택시 기사가 저지른 교통사고, 마모루를 괴롭히는 급우의 갈등이 이런 다층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이 사건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연결되며 소설을 진행시키는데, 주인공 마모루가 움직이는 요인이 분명치 않다는 한계가 노출됩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나름의 설득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사건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소설의 인물들입니다. 소설의 인물은 모두 한 가지 씩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그들과 독자는 곧 친해지고 응원을 보내게 됩니다. '잘 되거라, 성공하거라' 하고 손뼉을 치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무서운 속도로 이야기의 기관차에 끌려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무엇보다 선과 악, 인간의 성장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과 묘사에 많이 감탄했습니다.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마모루의 체육 선생 이와모토가 아래와 같이 조언합니다. 제 마음속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나쁜 놈이 많거든.코끼리 꼬리를 만지고 뱀이라며 소동을 피우고 쇠 뿔을 잡고는 코뿔소라고 소동을 피우기도 해. 놈들은 자기 코앞도 못 보는 거야. 부딪힐 때마다 화를 내지 말고 네 쪽에서 잘 피해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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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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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교]는 시인 이적요의 이야기이고, 그의 제자 서지우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어린 연인 은교의 이야기입니다. 구도자 처럼 시(詩)를 써온 시인 이적요에게서지우는 유일한 가족이자 글쓰기에는 무능한 제자입니다. 그런 서지우에게 이 적요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시(時)가 아닌 장르 물을 대신 써주었습니다. 서지우의 이름으로 나간 그 작품은 의외의 화제작이 됩니다. 그들은 사제지간에서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이 되었고 , 이로 인해 더더욱 공고한 관계가 됩니다. 서지우는 이 적요의 집 근처 동네에 사는 여고생 은교를 집 청소를 위해 데려옵니다. 은교와의 만남으로 이 적요와 서지우의 삶은 파문이 일어납니다. 시인은 여자에게 사랑인지 욕정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고, 시인과 제자는 사제지간에서 연적이 되어 버립니다. 시인과 제자 사이를 기묘하게 줄타기 한 은교는 독자의 마음에도 파문을 던집니다.


 [은교]에는 주인공의 생과사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서지우, 자살하듯 생을 마감한 시인, 그리고 홀로 남아 죽음의 정체를 알아채는 은교의 이야기는 대단한 추진력으로 독자를 밀어붙입니다. 시인과 시인의 제자는 외부에 표방하는 모습과 내적인 모습의 괴리로 말미암아 서로를 파멸로 이끌 범죄로 치닫습니다. 실상과 그 후방 효과는 어느 미스터리 소설 못지않게 흥미롭습니다.


 [은교]는 저물어가는 인생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같습니다. 사계절이 변하듯, 봄 처럼 태어나 여름처럼 번성하고 가을처럼 저물었다가 겨울처럼 굳어지는 인생의 면면을 잘 보여줍니다. 이 적요와 서 지우는 늙음과 젊음의 대조이면서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갈망하는, 그리워하면서도 대결하는 존재로서 작용합니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계절을 보내는 사람에게 이 적요의 추한 욕망은 너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 절절하면서 위험한 욕망에서 저는 집착을 보았고 그 집착에 동의하는 순간 저도 시인 이적요와 공범(共犯)이 되었기에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소설의 끝에 가면 독자는 시인 이적요가 진정 그리워하고 욕망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됩니다. 은교가 욕망의 대상이었는지,이 적요의 생애를 통해 가장 부족했던 것을 채워 준 보상이었는지 헛갈립니다.


 [은교]는 시(詩)와 같은 소설입니다. 주인공의 심정을 대변하는 시가 많이 실려 있기도 하지만, 주인공의 이야기와 정서가 시처럼 다듬어진 문장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외국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오랜만에 만난 모국어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고 책장을 넘겼습니다. 우리 말이 이토록 도도하고 품위가 있을지는 몰랐습니다. 시인 적요의 캐릭터는 시인의 문장으로서 형상화했고, 열등한 서지우의 울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은교의 캐릭터가 날 선 문장이 되어 독자의 가슴 속에 파고들었습니다.


은교는 한 번 읽고 덮을 소설이 아닙니다. 두세 번 더 읽는다고 해서 이 소설이 어떻게 영상화할지 구도가 잡힐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스터리 속에 인생이 주마등처럼 흐르며 시적인 경지에 오른 [은교]의 독특한 분위기를 다른 장르로 옮긴다는 것은 무모해 보입니다. [은교]는 저를 다시 한국 소설로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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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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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영국의 정치 격변기인 1660년대. 한 명의 왕이 교수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크롬웰에 의한 전제정치가 이뤄지다 다시 왕정이 복구된 시기입니다. 영국은 권력 교체의 틈바구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새로 권력의 혜택을 받으려는 세력들의 대립으로 추악한 이전투구의 양상이 벌어집니다. 그 싸움 속에 평민들의 삶은 더없이 피폐한 지경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가톨릭과 영국 국교 등 여러 종파의 대립은 더 큰 분쟁을 불러왔고 전쟁의 불씨가 되어 타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옥스퍼드 뉴 칼리지의 로보트 그로브 박사가 살해됩니다. 박사의 하인으로 일했던 사라 블런디란 젊은 여인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됩니다. 이 소설은 사라 블런디를 둘러싼 네 명의 증인의 비망록입니다. 베네치아 출신의 의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젊은 귀족, 암호 해독을 전문으로 하는 수학자, 그리고 옥스퍼드의 사학자이자 서지학자인 네 명의 남자가 그들입니다.


15세기는 인간이 합리와 이성으로의 추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의 사극(史劇)이 그러하듯 사실(事實)과 허구(虛構)를 뒤섞으며 독자를 과거로의 여행으로 이끌어 드립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아는 과학적 사실을 모르는 15세기 서양인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작가는 완벽하게 재현해냈습니다. 독자는 그 속에서 인류가 축적한 문명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깨닫게 되면서 옥스퍼드의 습하고 퀴퀴한 거리를 측은한 마음을 갖고 거닐게 만듭니다. 그러나 독자가 가질 수 있는 방관자의 여유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독자는 네 명의 증인이 각자의 환상과 허구, 집념과 잇속으로 해석한 사건의 편의적 진실을 알게 됩니다. 같은 사건을 향해 다가가지만, 각자의 입장은 워낙 다른 것이어서 독자는 네 개의 다른 이야기를 읽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요사스러운지, 우리의 의지와 진실이 얼마나 편의적으로 해석되어 탄생하는 것인지, 작가의 냉소적인 풍자에 독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 편 왜 사라 블런디란 여자에게 이토록 힘들고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최후의 순간, 이야기는 거대한 반전을 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켜켜이 쌓아온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비약합니다. 그 비약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산의 정점에 올라서야,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 놓은 큰 그림을 발견하고 놀라움에 입을 벌릴 뿐입니다.


<핑거포스트, 1663>은 15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이 서사시는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소설의 수준을 종교적인 초월의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소설 말미에 네 번째 퍼즐 조각이 들어맞기 시작할 때 독자가 느끼는 희열과 감격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고 보면 15세기나 21세기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유한하고 죄를 짓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치밀하고 힘 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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