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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포스트, 1663 - 보급판 세트
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때는 영국의 정치 격변기인 1660년대. 한 명의 왕이 교수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크롬웰에 의한 전제정치가 이뤄지다 다시 왕정이 복구된 시기입니다. 영국은 권력 교체의 틈바구니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새로 권력의 혜택을 받으려는 세력들의 대립으로 추악한 이전투구의 양상이 벌어집니다. 그 싸움 속에 평민들의 삶은 더없이 피폐한 지경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 가톨릭과 영국 국교 등 여러 종파의 대립은 더 큰 분쟁을 불러왔고 전쟁의 불씨가 되어 타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옥스퍼드 뉴 칼리지의 로보트 그로브 박사가 살해됩니다. 박사의 하인으로 일했던 사라 블런디란 젊은 여인이 살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기소됩니다. 이 소설은 사라 블런디를 둘러싼 네 명의 증인의 비망록입니다. 베네치아 출신의 의사,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젊은 귀족, 암호 해독을 전문으로 하는 수학자, 그리고 옥스퍼드의 사학자이자 서지학자인 네 명의 남자가 그들입니다.
15세기는 인간이 합리와 이성으로의 추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의 사극(史劇)이 그러하듯 사실(事實)과 허구(虛構)를 뒤섞으며 독자를 과거로의 여행으로 이끌어 드립니다. 지금은 초등학생도 아는 과학적 사실을 모르는 15세기 서양인의 생각과 삶의 모습을 작가는 완벽하게 재현해냈습니다. 독자는 그 속에서 인류가 축적한 문명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깨닫게 되면서 옥스퍼드의 습하고 퀴퀴한 거리를 측은한 마음을 갖고 거닐게 만듭니다. 그러나 독자가 가질 수 있는 방관자의 여유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독자는 네 명의 증인이 각자의 환상과 허구, 집념과 잇속으로 해석한 사건의 편의적 진실을 알게 됩니다. 같은 사건을 향해 다가가지만, 각자의 입장은 워낙 다른 것이어서 독자는 네 개의 다른 이야기를 읽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하고 요사스러운지, 우리의 의지와 진실이 얼마나 편의적으로 해석되어 탄생하는 것인지, 작가의 냉소적인 풍자에 독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집니다. 한 편 왜 사라 블런디란 여자에게 이토록 힘들고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최후의 순간, 이야기는 거대한 반전을 일으킵니다. 지금까지 켜켜이 쌓아온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비약합니다. 그 비약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산의 정점에 올라서야, 독자들은 작가가 그려 놓은 큰 그림을 발견하고 놀라움에 입을 벌릴 뿐입니다.
<핑거포스트, 1663>은 15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거대한 서사시입니다. 이 서사시는 인간의 나약함, 그리고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소설의 수준을 종교적인 초월의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소설 말미에 네 번째 퍼즐 조각이 들어맞기 시작할 때 독자가 느끼는 희열과 감격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고 보면 15세기나 21세기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인간은 유한하고 죄를 짓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치밀하고 힘 있는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