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인구변화가 대한민국을 바꾼다
김현기 외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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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
로버트 네프.정성화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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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역사는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불과 100년 전에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수업을 통해 배운 100여 년 전 역사는 연도별로 일어난 굵직굵직한 사건을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1871:신미양요 ▲1884:갑신정변 ▲1894:갑오농민전쟁 ▲1905:을사조약 하는 식으로 연도를 외우고 각각의 사건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놀이를 하고, 어떻게 친교를 나누고, 어떤 문화 활동을 하며 살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기회는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00여 년 전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의 삶이나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삶을 소개하는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정성화와 로버트 네프가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바로 구한말 한국에 체류했던 서양인들의 일상 기록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시기부터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주로 서울에서 거주했던 서양인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 책은 구한말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서양인들의 조선살이와 이 서양인들이 숨기고 싶었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그리고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간행된 대부분의 관련 서적들은 서양인이 한국을 방문해서 느낀 점이나 여행 중에 보고 들은 내용들 즉, 주로 관찰자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서양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이 한국에서 실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머리말 중에서)

서양인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인, 어땠을까

기근과 불황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여가를 보내고, 질병에 걸려 어렵게 치료를 받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희로애락을 상세히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마치 일기를 보듯이, 혹은 재미있는 영화 한 편을 보듯이, 친근한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듯이 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수두룩하다. "이 책을 위해 필자들은 서양인들의 일상을 가급적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해외자료에만 의존했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쓴 자서전이나 여행기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발행된 일간지 그리고 알렌 및 포크문서 등 다양한 필사본을 이용했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허드문서와 그레이 문서'를 비롯한 방대한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이 책 끄트머리에는 미국 도서관에서 찾아낸 귀한 원 사료와 20여종이 넘는 신문자료 그리고 6쪽 분량의 방대한 2차 자료목록 그리고 20쪽이 훌쩍 넘는 상세한 각주 600여 개가  달려 있다.

지은이들은 "구한말 외교문서를 수집하고 선교사들의 자료를 정리하면서 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제관계사의 발굴이라는 공통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거의 전적으로 서양인들이 남긴 자료에 의지하였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책보다 방대한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쓰여진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2천 명이 넘게 몰려든 스케이트 구경꾼

정동은 구한말 대표적인 서양인 거주 지역이었는데, 이는 초대 미국 공사인 루셔스 푸트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서양인촌이 형성되었기 때문. 한국정부의 허가를 얻어 민씨일가의 집을 사비로 구입해서 미국공사관으로 이용했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이 부근에 신축되어 서양인촌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1895년 한국에서 출판된 첫 영어잡지인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에는 경북궁에서 열린 스케이트 파티를 소개하고 있다.

"1월 17일과 21일에는 왕비가 정동에 사는 서양인들을 대상으로 경북궁에서 두 차례에 걸쳐 스케이팅 파티를 개최했다. 향원정에서 열린 이 스케이팅 파티는 사람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겼다."(본문 중에서)

이 스케이팅 파티는 서양식 스케이트가 한국에 소개된 후 10여년이 지난 뒤에 궁궐에서 열린 파티라고 한다. 그보다 앞서 처음 국내에 스케이트를 소개한 사람은 미국 해군 필립 랜스데일과 윌슨 대위였다고 한다.

서양인이 스케이트 타는 것을 처음 본 한국인들에게 이 새로운 스포츠는 엄청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다. 1886년 1월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였던 포크는 자신이 스케이트를 타던 날 벌어진 일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십분도 안 되어 나를 보기 위해 수백 명이 사람들이 얼음 위로 몰려들어 실제로 길이 막혀 버렸다. … 다음날 나는 다시 연못으로 갔는데 내가 스케이트 타는 것을 보기 위해 거의 2천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본문 중에서)

심지어 구경꾼들은 목수가 사용하는 대패와 손도끼를 가지고 울퉁불퉁한 빙판을 평평하게 다듬어주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돈을 내기도 했고, 간식을 팔기 위해 행상들이 몰려들었다는 것.

어떤 학자들은 "얼음 위의 예술" 또는 "발의 예술"로 불렀고, 일반인들은 "서양인 발 쇼"라고 불렀다고 한다. 100년 전 이땅에서 처음 스케이트를 탔던 서양인들의 인기는 요즘 피겨 스타 김연아 못지않았던 것 같다.

열강에 굴복하고, 자국민에게만 가혹한 정부

지금도 세계 최고의 술 소비량을 자랑하는 나라인데, 100여 년 전 서양인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과도한 음주로 인하여 폭행이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개항 초기 한반도를 찾은 서양인들은 술취한 한국인의 모습을 많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때로 취객들은 서양인들과 시비를 벌이기도 하였다는 것. 영국 공사인 존 조단과 고종 시위대 군인 간에 일어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술에 취한 이 군인은 호의적인 마음으로 외국인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가 상대가 받아들이기엔 과도하게 목을 세게 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서양인들은 선의를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가까운 경찰서에 인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을 처리하는 당시 한국 정부의 태도는 서글프고 기가 막힌다.

"외부대신은 조단 공사에게 즉시 사과하고 군부 역시 이 불운한 군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지나친 판결에 조단 공사가 오히려 놀랐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후에 이 불쌍한 군인의 형량은 10년 유배로 감형되었다."(본문 중에서)

또 다른 사건은 궁궐에 전기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북궁에 전기 설비를 하던 미국인 기술자 월리엄 매케이가 그의 총을 살펴보던 한국인 젊은 군인의 오발 사고로 치료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사자인 매케이는 우발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그 군인을 처벌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으며, 많은 미국인 동료들도 권총이 사고로 격발되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외국의 간섭과 공세를 두려워하던 한국 조정은 이 군인을 하나의 본보기로 간주하고 즉시 체포했다. 그는 감옥에 투옥되어 호되게 매를 맞고 사형을 언도 받았다."(본문 중에서)

다행히 이 젊은 군인도 매케이 부인의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지만, 두 사건은 모두 서양 열강의 개입에 두려움을 느낀 힘없는 당시 한국정부가 자국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가혹한 형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편, 지금도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이 나라는 100여 년 전에도 서양인 범죄자에 대한 재판권이 없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국인이나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경우 한국 정부는 재판권이 없었고, 해당 국가의 영사들만이 자국민을 재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경인철도 공사 기술자로 온 '필립'이라는 미국인 총잡이가 한국인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휘두르고 총으로 상투를 맞혀 떨어트리는 난동을 부리는 일도 발생하였다.

한성판윤의 고충을 들은 알렌 공사가 이런 일이 재발하면 미국으로 추방하겠다는 경고를 하자, 필립은 "오랫동안 사격 연습을 하지 못해 걱정이 되어 그렇게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놓는다.

다양한 최초 기록을 모아 놓은 책

이 땅에 많은 근대문물이 서양인들을 통해 이 땅에 소개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양인의 조선살이>를 쓴 정성화와 로버트 네프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최초의 서양 상점 ▲서울에서 죽은 최초의 서양인 ▲최초로 스케이트를 탄 사람 ▲최초의 미국인 죄수 ▲처음 한국에 온 서양 여인 ▲최초의 치과 진료 ▲최초의 영어학교 교사, 핼리팩스 ▲최초의 외과 수술 ▲최초의 예방접종 ▲최초의 자전거 ▲처음 열린 야구경기와 축구경기 ▲최초의 자동차 ▲최초의 비행 ▲최초의 영화상영

그동안 국내에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한국인 중에서 처음으로 서양 문물을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는 안창남, 최초의 민간인 여류비행사는 박경원, 최초의 자전거 선수는 엄복동, 맨 처음 야구경기를 치른 YMCA 야구단 같은 식이다.

반면에, <서양인의 조선살이>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이 땅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 자동차를 탄 사람, 비행기를 운항한 사람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최초의 축구경기는 1896년 말에 한국학생들과 영국 선원들 간의 경기이며, 최초의 야구경기는 1896년 미국 해병대원들과 서울 거주 미국인들 간의 시합이었다는 것이다.

구한말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경인 철도 부설을 주도하고, 외국인 거주 거리에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하며, 고종의 요청에 따라 궁궐에 전기를 공급하는 등 새로운 문물을 전하는 진취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서, 혹은 동양의 새로운 땅에서 경제적 부를 얻기 위하여,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이 땅을 밟은 서양인들 중에는 이런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영국신문에 보도하다 해임된 베델과 같은 언론인도 있었고, 근대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언더우드 가문도 있었으며, 이준 열사와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만행을 알리는데 참여한 호머 헐버트와 같은 이도 있었다.

전적으로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기록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문 자료에 근거한 <서양인의 조선살이>는 오늘을 사는 독자들의 짐작보다 훨씬 자세하게 구한말 한반도에서 살았던 서양 사람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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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
로버트 네프.정성화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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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 - 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
김재영 지음 / 한얼미디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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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슬픈 유랑자들, 연해주 고려인 리포트'라는 부제가 붙은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는 고려인돕기운동의 자원봉사자로 2001년부터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재영·박정인 부부가 만난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들 부부가 만난 고려인 동포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물이다.

단지 먹지 못해 팔과 다리가 구부러진 '서 와짐'과 '제냐'가 살고 있는 곳, 러시아 사람들에게 모종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아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사는 '허 니나' 아주머니가 사는 곳.

병원한 번 못가보고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보아야했던 '김 아나스탸샤' 아주머니가 사는 곳, 윤간을 당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스물세 살 꽃다운 처녀 '엘레나'가 살아가는 절망의 땅 연해주의 이야기.


마음의 눈이 닫히지 않은 독자라면 표지 사진은 물론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하는, 깊은 주름이 팬 고려인 동포들의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흑백 사진들 위로 "죽지못해 살아가는" 질기고 모진 목숨에 얽힌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1부, '고려인 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가난과 이방인이 겪는 비통한 사연들이다. 정말이지 우리가 같은 세기를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막힌 일들이 벌이지고 있었다.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 이주민들은 수도는 물론, 난방조차 되지 않은 오래된 군용막사에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시베리아의 찬바람을 오로지 맨몸으로 이겨내고 있다."
"봄이 되어 밭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지을 때도 기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얼어붙은 땅을 일군다."(본문 중에서)

지은이 김재영의 이야기다. 그는 운명처럼 연해주 고려인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4년의 세월을 보냈고, 지금도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으며 이제는 그 땅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다.

그렇게 연해주 크레모보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던 젊은 부부는 지마와 지나라는 이름의 고려인이 되고 만다. 마침내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고려인으로 살게 된 것이다. 지마는 '드미뜨리'의 애칭이고 지나는 '지나이다'의 애칭이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주해온 '리 나리사'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1937년 강제이주의 출발역이었던 '자즈돌노예' 역  


고려인, 그들은 누구인가. 연해주에는 지금도 1만여 명 정도의 고려인이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1863년부터 가난과 수탈을 피해 굶주림을 면하고자 농사를 지으러 간 이들이고,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고 피 흘리며 싸우던 독립 운동가들의 후손이다.

1920년대 항일무장 투쟁의 지도자 홍범도 장군, 이등박문을 죽이고 사형당한 안중근,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이상설, 이동녕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싸우던 이름 없는 독립군 병사들이 그들의 부모들이다.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극장 청소부로 살다 죽었다.

역사책에도 나오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홍범도 장군이 1937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어 그곳 극장의 청소부로 말년을 보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독립훈장을 받은 애국지사 최재형의 딸이 최 류드밀라 할머니의 "돌아갈 곳이 없어 (여기)이러고 산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조국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1937년 스탈린의 소주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는 연해주에 살던 18만여 명의 한인을 하루아침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로 몰아넣었다. 강제 이주를 시작하기 전에 2500여명의 한인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강제 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고려인이 굶주림과 추위, 전염병 그리고 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묻다가 흔적도 없이 죽어갔다고 한다.

연해주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는 이 책뿐만 아니라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화물열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일어나는 처참한 죽음의 기록과 중앙아시아 불모의 사막을 농토로 바꾸는 고단한 삶의 기록이 고스란히 씌어있다.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1988년 올림픽이 열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국에서 가난과 굶주림, 징용과 정신대를 피해 연해주로 '강제이주'했던, 고려인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구소련이 해체된 후에는 55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독립국가의 자국민 우월정책에 떠밀려 또 다시 6000km나 떨어진 연해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연해주로 돌아온 이들은 러시아 국적이 없어 의료와 연금의 혜택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취업도 할 수 없으며, 러시아인들의 부당한 폭력과 살인을 당하고도 누구에게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 라즈돌로예 역에서 바라 본 시베리아 철길 - 이 철길을 따라 18만 명의 고려인들이 화물열차에 실려 40일 동안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필자는 2005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약 연해주에 가기 전에 이 책을 읽고 갔었다면 그 때 만난 고려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컸다.


이 책에는 지난 140년간 가장 골 깊은 수난의 시대를 살고 있는 러시아 재외동포인 '고려인'들에 관한 삶의 기록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강제이주의 역사가 1937년 스탈린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을 대신해서 연해주 고려인들을 끌어안기 위하여 책을 쓴 김재영 박정인 부부는 처제와 함께 고려인 정착촌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 다행인 것은 부족하기는 여전하지만 많은 분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힘겹게 삶을 지탱하는 고려인 동포들의 삶을 붙들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조국을 대신하여 참회와 공존의 삶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자들과 후원단체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조국에 살아가는 모두는 그들에게 진 빚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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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
박유하 지음 / 사회평론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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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반일의식을 가장 자극하는 사건은 무엇일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최근에는 한센병 환자 보상 문제 그리고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 있는 이들은 우토로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런데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의 저자인 박유하는 우리 국민의 일상적 반일의식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일제가 민족의 정기를 누르려고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마다 박아놓은 '쇠말뚝'이라고 보았다.

신문 기사를 검색해보면 지리산과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일제의 쇠말뚝을 뽑아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성대한 행사가 개최 되었다.

쇠말뚝을 제거하는 사람들은 "일제가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명산마다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아울러 명산으로부터 시작되는 민족 정기를 누르려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쇠말뚝만 뽑읍면 민족정기가 살아나는가? 

박유하는 '일제 쇠말뚝 사건'을 왜곡되고 맹목적인 반일 이미지 확대의 대표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반일 담론이 항상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논리적이기보다는 비약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허상을 둘러싼 비판"이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일제의 쇠말뚝 뽑기'라는 것이다.

쇠말뚝 뽑기는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실(事實)에 대하여 史實(사실)검증을 하지도 않고, 국민 모두가 사실(史實)로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산에서 쇠말뚝을 뽑을 때마다 반일의식과 적대감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독립기념관에도 전시되었다가 지금은 수장고에 보관된 일제의 쇠말뚝에 대하여 박유하는 "문제는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는 점 자체보다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박았는가?"를 규명하여야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역사적 검증을 시도하지 않고 기정사실로 받아드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해방 60년이 훌쩍 넘은 올해도 정말로 일제가 박은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왜 박은 것인지에 대한 진실은 규명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쇠말뚝 제거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최초의 증언인 백운산 산장 할머니의 증언(열여섯 살 때 일본인이 박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에만 근거하여 국가적 '운동'이 되고, 공무원들의 '실적'이 되었으며 유수한 신문과 방송매체를 타고 안방으로 전해져서 시청자들의 반일의식과 적대감을 키웠다는 것이다.

전국의 명산마다 발견되는 쇠말뚝 제거를 "한국은 '민족정기'라는 이름의 망령에 씌어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전설과 소문을 사실(事實)화하여 사실(史實)이라는 '역사 새로 만들기'에 나서고 있었던 셈"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의도성'을 조장함으로써 반일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박유하는 풍수설에 휘둘리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풍수설을 믿는다면, 수 센티미터 지름의 쇠말뚝보다도 산등성이 자체가 파헤쳐져 끊임없이 아파트로 변하는 상황부터 걱정해야"하며 "그 중에 '명산'은 없는지, 혹여 민족정기가 서린 '정수리'를 잘라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하라"고 한다.

이이화와 같은 역사학자 역시 "민족정기 말살론에 대하여 근거가 없는 말이며 지도나 해도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었을 거라고 하였다는데, 근거 없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더군다나 풍수설 자체를 믿지도 않으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반일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분노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책을 읽는 도중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심지어 "경부선 철길을 놓을 때도 평지 대신에 일부러 산허리를 끊어 철길을 놓았다"며 분노하던 풍수론자들이 전국의 산허리를 잘라서 만드는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을 왜 반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스님이 생명을 걸고 천성산 터널공사를 반대할 때에 '민족정기'를 걱정하는 풍수론자들은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천성산의 민족정기와 관련이 없는 산이었을까? 고속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다보면 수도 없이 많은 터널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많은 터널은 '민족정기'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일까?

백두대간 산허리 끓는 일은 민족정기와 상관없나?

풍수설을 믿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나 같은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끊으려 했다는 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몇몇 지식인, 그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왜곡을 확인하거나 의심하는 일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확대 재생산해온 언론매체, 그리고 그런류의 보도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 우리 자신이었다.

나 역시 이러한 과정에 편승하여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일본의 음모에 분노하며 내 안의 반일 민족주의를 키워왔던 것이다. 투철한 반공교육과 반일교육을 받아오면서 자라서 반공교육의 굴레는 힘겹게 벗어났지만, 반일교육의 틀을 벗어나보지는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일 민족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였던 것이다.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고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역사바로세우기를 받아들였고, <일본은 없다>를 보며 쾌감을 느꼈으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며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왔었다.

박유하의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읽고 나서야 '민족정기 말살'하는 쇠말뚝과 철심제거를 바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래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쾌감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분풀이 소설'같은 끔찍한 일이 생기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박유하의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원래 <누가 일본을 왜곡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던 책을 2004년에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간한 책이다. 평론가 김규항은 작가 박유하에 대하여 "이따금씩 괜찮은 학자를 만나면 그것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관점이나 의견에 차이가 나더라도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는 보는 눈만 있다면 충분히 기쁘다"고 평가하였다.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네모로 보는 눈

<반일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읽다보면 일본에 대하여 세모를 세모로 네모를 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다. 일제의 쇠말뚝 문제뿐만 아니라 총독부 건물 철거에 얽힌 '진실 혹은 거짓'(?)과 <노래하는 역사>의 허구성을 <일본은 없다>의 왜곡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황당무계함과 일본문화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무지를 깨닫게 되었다.

강제철거의 위기에 처한 재일동포 마을 우토로를 다녀오면서 만약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통쾌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70만 재일교포에게는 얼마나 '끔찍한'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하면서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박유하의 말처럼 미래를 위한 책이며, 타자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책이며 지금도 반일교육과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있는 젊은이들을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 지혜의 눈으로 타자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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