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중근을 보다 - 100년 만에 드러난 새 얼굴 ㅣ 다큐북 시리즈 1
황병훈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2010년은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이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되는 해이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수장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이듬해 뤼순 감옥에서 32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이 책은 그런 안중근의사를 100주년을 기념해 재조명한 춘천 MBC의 황병훈 PD가 '안중근 의사를 제대로 보고 알게 하자'는 생각으로 만든 다규멘타리북이다.
안중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찰력을 지니시오! 폭넓은 시각으로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시오 .미래가 보일 것이오. 드넓은 시각으로 나와 우리를 바라보시오. 세계와 우주가 보일 것이오."
요즘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외쳐대고 있는 말이 통찰력이다. 얼마전에 책으로 만난 스티븐 잡스도 그리고 실제로 강연회에서 만났던 전 변호사였던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변호사도 외쳐대던 말이다. 통찰력을 가지고 살아가기.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통찰력이다. 책을 많이 읽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깊이있는 사고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언제인가 일본의 앞잡이로 살아왔던 그리고 지금도 살아가는 듯한 이들은 안중근은 태러리스트라는 말을 했다. 정말 자국민인가 의심이 될정도의 그런 망말을 들으면서 어이가 없었는데 그에게 이 책을 안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안중근은 진정 테러리스트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안중근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중 안중근 역의 배우가 극중 일본재판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나라의 국모를 시해하였음은 물론 무고한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총칼을 휘두른 이토 히로부미는 오히려 대한제국을 일본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 준비를 신속하게 이행하고 있었으며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 있었다면 한국의 평화는 물론 동양의 평화를 저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을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장을 살해한 안중근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안중군을 공판정으로 호송하는 마차와 당시의 재판 관련자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 법정에서 일본법으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1899년 제 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제정한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 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본은 일반 형사범으로 다뤄 살인죄를 적용했고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1909년의 기유각서에 따라 재판권을 일본으로 양도했지만 대한제국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규는 대한제국 국법을 따르고 있었고 1899년 대한제국과 청나라가 체결한 조약에 따라 청나라 영토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대한제국 국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은 안중근의 재판을 한국 침탈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당시 세계 각국의 여론들이 안중근의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것을 기회로 이용하려했다. 처음부터 재판은 불공정했고 이미 사형이라는 결론은 내려진 상태였으며 다른 선택을 못하도록 외국인 변호인 불채택의 원칙을 공표해 국제변호인단 동원을 막고 가족들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해야하는 폭압을 당했다.
당시 일본인 변호사들 중에도 안중근의 무죄론을 주장하던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안중근의 변호를 맡았던 미즈노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안중근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를 가졌고. 개인적 원한을 풀려고 한 게 아니다. 그래서 국사범으로 취급하는 것이 맞다. 때문에 일제의 볍률이나 한국의 형법이 아닌 국제법으로 다스려야 한다."(23쪽에서)
그러나 일본 정부는 뤼순 감옥에 가두고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관할법원에 사형을 지시하는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안중근 공판을 처리하기 위해 뤼순으로 파견된 외무성 정무국장은 전보를 받고 국비밀리에 사형을 언도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이미 사형이 계획된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회유하고 그의 거사가 지닌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해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을 감행했다.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이게하려고 말이다.
극비리에 전해진 전보가 사진에 담겨있다. 옥중에서도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통해 제국주의의 시대에서 도덕의 시대로, 평화의 시대로 가기 위해 전 세계적인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는 글을 썼다. 그러한 그의 실천에 제일 걸림돌이엇던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였기에 과녁이 되었다.
안중근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그의 거사로 인해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고 안중근이 사형된 후에도 끊임없이 조국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들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래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한 그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을 찾지못하였고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 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그의 조국에 대한 열정이 한낱 부질없는 일이 아님을 책을 보는내내 깨닫게 된다. 그를 감옥에 가두고 있던 일본인 검찰관조차도 그의 인격에 깊은 감동을 했고 그의 후손들은 지금도 안중근의사를 귀한 인물로 칭송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