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은 조선 사람 최부가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닷길을 헤메이다 서남해를 표류하던중 명나라에 상륙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표해록'이란 '바다에서 표류한 일에 관한 기록'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조선 사람이 중국에 갈 때는 보통 육지로 다녀서 바닷길로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 남긴 중국 견문록은 요동을 거쳐 중국의 황제가 있던 북경을 오가며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부는 중국에서도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양자강 남쪽, 곧 '강남' 지방을 자세히 살펴보고 기록을 남겼기에 '표해록'은 조선의 다른 견문록이 담지 못한 진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 최부는 제주에서 경차관(지방에 파견하는 벼슬-군대를 살펴보고 관청의 곡식 손실을 조사하고 흉년에는 백성이 굶주리지 않도록 돌보고 관청에서 사람을 가둘 때 법에 따른 절차를 제대로 지키는지, 도망친 노비를 찾는등의 일을 한다.)으로 일하다가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본가가 있는 나주로 돌아가던 중이었고 그러던중 풍랑에 배가 부서지면서 14일 동안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된다. 사람들은 날씨가 좋지않아 사람들이 나중에 갈것을 말했지만 어버이와 자식의 도리를 엄격히 지키는 유교사상으로 하루속히 가야한다는 생각에 위험하다는 측과 이젠 괜찮다는 측의 주장 중 괜찮다는 말을 듣고 출항을 하게 된다. 최부와 일행은 해적을 만나 모든 것을 잃고 거친 폭풍으로 인해 삶의 희망을 잃는등의 시련중에 바다에서 살아남았다. 겨우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에는 왜구로 몰려 위급한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최부는 조선으로서의 자긍심을 지켜 '선비'를 알아본 중국 벼슬아치의 도움으로 대운하를 따라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호송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성종 임금께 그 모든 일을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최부가 겪고 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쓰게 했고 최부는 모든 일들을 상세히 묘사해 '표해록'을 쓰게 되고 이것을 휼륭하게 여긴 성종은 외교 문서를 관리하는 승문원에 그것을 보관하게 한다. [표해록] 에는 중국 절강 동남쪽에서 북경 일대에 이르는 여정과 중국의 자연, 물산, 인물, 풍속 등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고 진귀한 기록이자 최부의 식견과 능력도 엿볼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원했지만 곧바로 책으로 엮어지지는 않았다. 최부가 기록을 정리한 후 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1569년에서야 최부의 외손자인 유희춘이 책으로 엮어내 나왔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이 이웃 나라를 알수 있게 하고 역사적 기록으로도 커다란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역사학자들은 일본 스님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과 같이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하루하루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다닐때 요동의 뭍길로만 다니다가 바다를 왕래하는 일이 조선시대에 와서 명나라를 세우면서 바닷길을 막는 정책인 해금 정책을 실시하면서 거의 끊어졌다. [표해록]은 시대적인 국제 상황과 정세를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의 가치를 지닌 것을 일본이 먼저 알아보고 1976년 에도 시대 일본에서 '당토행정기'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국내보다 먼저 상업적으로 출판되 널리 읽혔다. 에도 시대 일본 지식인들은 최부의 [표해록]을 통해 중국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가늠하고 조선 지식인의 중국을 보는 시각등을 일본과 비교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통속표해록]이라는 개정판 형태로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상업 출판으로서도 크게 성공하게 된다. [표해록]이라는 이 한권을 통해 한중일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지식과 정보가 어떻게 전해졌는지등을 알수 있는 아주 귀한 자료라고 한다. 폭풍속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되는지 위험한 상황속에서 극복해 나가는 등을 상세히 기록해놓았고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등을 보면서 지식의 필요성을 다시한번 느끼기도 하였다. 한자를 알았기에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필담으로 서로가 소통을 할수 있었고 최부의 지혜와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으로 수많은 죽을 고비등을 넘기는 것을 보면서 다양한것들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가치를 배우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