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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126 목판에 새긴 우리 땅 이야기 ㅣ 책 읽는 고래 : 고전 1
이차원 지음, 강경선 그림 / 웅진주니어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지도 작업에 관심이 많은 김정호는 양반 가문은 아니지만 양반 가문인 사상가이자 실학자인 최한기를 만나면서 같이 지도작업을 하게된다. [지구전후도]를 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지구전요]라는 체계적인 세계 지도와 세계 지도첩을 출간하기도 한다. 지구전후도를 만들던 해에는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를 만든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신분도 낮았지만 물부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자료를 구하였다고 한다. 김정호의 지도에 대한 열정에 반한 후원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최성환이다. 양반은 아니었지만 궁중을 수호하는 무관이며 임금이 그를 찾을 때 개인적으로 임금으 만날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책을 간행할마큼 집안이 부유했다고 한다. 후원만 한 것이 아니라 김정호와 공동으로 [여비지]라는 지리지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판각할때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또 한사람 신헌장군이다. 나라를 지키기위해 경영과 국방에 도움을 줄수 있는 지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34년에 [청구도]를 제작하고, 1857년 무렵에는 아름다운 채색지도 [동여도]를 , 1861년에는 [대동여지도]목판본를 세상에 선보인다. 지도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데 걸린 기간만 27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초판본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간행하게 된다. 두번이나 간행하고도 죽는 순간까지도 새롭게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며 완벽한 지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옛 지도 중에서 [대동여지도]만이 가장 휼륭하고 정확한 유일한 지도는 아니다. 김정호의 업적은 이전 시기에 축적되어 온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는 길고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인 지도 제작은 조선 초인 세종 대에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지도 제작 방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거리를 실제로 측량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지도 작업에 관심이 많은 김정호는 양반 가문은 아니지만 양반 가문인 사상가이자 실학자인 최한기를 만나면서 같이 지도작업을 하게된다. [지구전후도]를 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지구전요]라는 체계적인 세계 지도와 세계 지도첩을 출간하기도 한다. 지구전후도를 만들던 해에는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를 만든다.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신분도 낮았지만 물부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양의 자료를 구하였다고 한다. 김정호의 지도에 대한 열정에 반한 후원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최성환이다. 양반은 아니었지만 궁중을 수호하는 무관이며 임금이 그를 찾을 때 개인적으로 임금으 만날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책을 간행할마큼 집안이 부유했다고 한다. 후원만 한 것이 아니라 김정호와 공동으로 [여비지]라는 지리지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판각할때 재정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또 한사람 신헌장군이다. 나라를 지키기위해 경영과 국방에 도움을 줄수 있는 지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34년에 [청구도]를 제작하고, 1857년 무렵에는 아름다운 채색지도 [동여도]를 , 1861년에는 [대동여지도]목판본를 세상에 선보인다. 지도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데 걸린 기간만 27년이라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초판본을 계속 수정 보완하여 간행하게 된다. 두번이나 간행하고도 죽는 순간까지도 새롭게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하며 완벽한 지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옛 지도 중에서 [대동여지도]만이 가장 휼륭하고 정확한 유일한 지도는 아니다. 김정호의 업적은 이전 시기에 축적되어 온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는 길고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인 지도 제작은 조선 초인 세종 대에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지도 제작 방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고 거리를 실제로 측량하는 작업이 행해졌다.
세종때 정척의 활동은 양성지에게 이어졌고 세조 때에 이르러 결실을 맺게 된다. 그것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실측 지도인 [동국지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못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몇몇 지도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초 정척과 양성지가 이룩한 실측 지도는 18세기 1757년 무렵에 정상기에 의해 더욱 정확하고 정밀해진것이다. 정상기의 업적은 축척, 즉 지도 상의 거리와 실제 거리와의 비를 넣은 백리척(백리를 한 척으로 그려내는 방법)이라는 방법으로 처음으로 제작했다는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은 실측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더라고 지도 상에 그려지지 않아 부정확했다. 이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대동여지도]를 통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자의 오랜 역사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한 휼륭한 바탕이 되었고 김정호는 행복한 계승자였던 것이다.
지도와 지리지는 국가의 모든것 즉 국가의 국방력과 생산력, 인구 등의 모든 사항을 담고 있는 극비 문서이다. 조선 시대에는 지도를 개인적으로 제작하거나 소장하는 일을 철저히 금했다. 법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소장하면 큰 벌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이 태동하고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연구하면서 지도 제작에 좋은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지도를 소유할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민간에서도 지도 제작이 비교적 활발해졌다. 김정호가 [청구도] 범례에서 뛰어난 지도 제작가로 들고 있는 윤영, 황엽과 같은 사람도 이시기에 활약했다.
[대동여지도]는 전체를 펼쳐서 이으면 세로 약 7미터, 가로 약 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지도이다. 거의 3층 건물높이의 전시 공간을 차지하는 크기이다. 얼마전에 육군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 걸린것이 대동여지도가 아니었나 싶다. 거기 담당하시는 선생님 말로 이건 너무 커서 왠만한 곳에는 전시를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신적이 있다. 대한 제국 광무 2년(1898) 일본 육군은 조선을 침략하한 기초작업으로 경부선을 부설하면서 우리 땅에서 극비리에 지도제작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잘 훈련된 50~60명이 현지의 비밀 고용원 200~300명을 데리고1년 여에 걸쳐 조사를 하였는데 얼마후 [대동여지도]를 발견하고는 김정호라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의 정확함에 깜짝놀랐다고 한다.
'대동'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별칭으로 동쪽의 큰 나라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며 여지란 '수레같이 만물을 싣는 땅' 즉 국토를 말하며 '여지도'는 지도를 이르는 명사라고 한다. 그래서 풀이를 하면 '우리나라 지도'라는 뜻이다. [대동여지도]는 한장으로되어 있지 않고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의 종이를 길게 이어 붙인 한권의 책이며 이것이 합하여 22권의 책으로 되어있다. 올해 국립중앙 박물관에 가서 아이들과 대동여지도를 배우고 만들었던 체험을 한적이 있다. 정말 지도 하나 만드는데 여러 사람이 붙어서 만들었다. 사실 만드는 것도 아니고 하나한 떨어진 한권씩 받아서는 길을 따라 색칠해서 완성하는 작업이었다. 다 색칠하고 붙여놓고 보니 정말 거대한 작업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김정호는 [동여도지]37권 20책을 쓰고 [여도비지]20권 20책을 최성환과 지었으며 죽기 직전까지 [동국도지] 30권 15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지리지 편찬은 지도 못지않게 방대하고 어려운 작업이라고 한다. 한가지 일에 이렇게 몰입해서 할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부러울 따름이다. 물론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들에 봉착했을텐데도 그렇게 대단한 작업을 해낸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의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지도왜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정호의 완벽한 백두대간을 나타낸 지도가 있기에 우리의 역사는 항변을 할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