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 지중해의 태양 아래에서 만난 영원한 이방인 클래식 클라우드 16
최수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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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영원한 고향 알제리에서부터

예술과 정치 활동의 정점을 찍은 파리를 거쳐

마지막 거처인 루르마랭까지

카뮈의 자취를 따라가다

 

 

"한마디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그 존재는 하찮지만, 그 사실을 명징하게 의식하면서 이 순간에 온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_ 최수철" 

 

 

 

 

독서를 하면서 보통 작품에 집중하는 편이지 작가의 삶에 별로 관심 가져본 적이 없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의 삶이 작품만큼이나 훌륭하기도 어렵고, 그런 작품을 썼다는 게 의아할 정도로 실망스러운 언사나 납득하기 어려운 삶을 살고 간 예술가들 또한 많다.

그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그냥 작품 자체에만 관심을 가지는 편이 더 좋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때론, 작가의 삶을 전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다.

작품이란 게 꼭 그 작가의 삶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작품에 작가의 삶이 녹아있는 경우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작가의 삶을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 작가 중 한 명이 내겐 카뮈다.

 

이 책에 명시된 작품 제목으로는 『시시포스 신화』, 내가 소장 중인 책 제목으로는 『시지프 신화』인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 카뮈를 알게 되었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으로 카뮈를 처음 만났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런데 나는 사실 『결혼·여름』이라는 책으로 처음 카뮈의 책을 읽을 마음을 먹었고, 어쩌다 보니 실제로 처음 읽게 된 책은 『시지프 신화』였다.

절반쯤 읽다가 '철학'책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이 책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한두 줄을 읽고 멈춰서 생각하고, 또 한두 줄을 읽고 멈춰 생각하고... 그렇게 읽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사유하며 책을 천천히 읽다가 결국 완독을 하지 못한 채 멈춰 섰다.

어쩌자고 나는 남들 다 읽는 『이방인』을 두고 하필 이 어려운 책을 선택했을까 한숨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꼭 읽고 싶었고, 이해하고 싶었고, 깨닫고 싶었다.

 

그렇게 멈춰진 책을 다시 읽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카뮈의 생을 먼저 들여다 보기로 했다.

 

아르테에서 출간되고 있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는 처음부터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한 작가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현대의 작가가 지나간 그의 삶과 작품을 더듬으며 그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는 콘셉트는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처음 팟빵으로 들으면서 과연 책으로 출간되었을 때 어떤 느낌일까 참 궁금했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구입해두고는 어쩌다 보니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벌써 16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그렇게 미루다 처음 읽게 된 책은 결국 『카뮈』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던 예술가들의 삶을 다룬 책들이 이미 출간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출간된다니 참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이다.

이렇게 한참 지나고서야 나는 그 이야기들에 동참하는 첫 발자국을 찍어본다.

최수철 작가와 함께 카뮈의 생을 들고서.

 

 

 

 

 

장 폴 사르트르는 일찍이 카뮈에 대해 인간과 행동과 작품이 한데 결합한 탁월한 사례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한 '탁월한' 삶이 돌연한 죽음을 맞은 끝에 이제 카뮈는 '지중해의 태양을 품었다'라거나, '아프리카인의 기질을 타고났다'라거나, '신중한 용기와 긍지가 결합된 투우사의 영혼을 지녔다'라는 수식어를 단 신화적 아이콘으로 우리 곁에 남았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늘 일상의 나태와 마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한 한 인간으로서의 카뮈를 떠올린다.

_ P. 024

 

 

 

카뮈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뮈의 생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책의 시작부터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나는 아주 단편적이고 소극적으로 카뮈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카뮈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은 것도 아니고, 카뮈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 마저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백지에 가까운 상태로 카뮈를 만난 것이다.

(이방인은 워낙 유명해서 읽지 않고도 스토리를 알고 있지만)

 

그래서 최수철 작가가 해석하고 들려주는 카뮈의 삶과 작품이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일상의 나태와 마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라고 서술된 최수철 작가의 문장에서 '독의 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최수철 작가가 말하던 삶의 방식 또한 카뮈의 생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어쩜 이렇게 딱 맞는 저자를 만나 이 책이 쓰였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가 카뮈를 잘 몰랐기에 최수철 작가와의 교차점을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일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돌아본다. 지금 나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의 여행자다. 현재적 공간을 벗어나 시간을 넘나들며 카뮈의 글이 내 머릿속에서 펼쳐 보이는 환영을 쫓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현실과 환상 사이를 여행한다. 그럼으로써 현재의 낯선 무대 위에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_ P. 030~031

 

 

 

이 책은 그냥 저자가 살던 곳, 활동하던 곳, 마지막을 맞이한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서가 아니다.

첫걸음부터 저자는 시간을 넘어 그 아득한 옛날의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그때의 카뮈를 눈앞에 그린다.

어린 카뮈의 발자국, 청년이 된 카뮈의 눈으로 본 풍경들을 그때의 카뮈가 되어 함께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 서서, 같은 장소에 서서, 시간을 넘어 그때의 풍경과 그때의 바람과 그때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

설레면서도 놀라운 여행법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서서 최수철 작가는 어느 순간 문득 진짜 카뮈가 되어 보기도 했을 것이다.

완벽히 똑같은 생각과 시선을 공유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분명 스스로 카뮈가 되어 그곳에 서보려고 시간을 거슬렀던 저자의 걸음은 남들과는 다른 깨달음에 닿았을 것이라 믿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글에서도 진하게 전해지고 있다.

 

 

 

 

 

 

"부조리에 걸려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부조리로부터 발을 빼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카뮈 식으로 말하면, 부조리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명확히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또한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부조리다. 그렇다면 부조리는 우리 삶의 장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일부다. 따라서 그러한 부조리와 제대로 대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된다.

P. 142

 

 

 

 

'부조리'

카뮈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일 것이다.

카뮈 문학의 심장이 부조리가 아닐까 싶다.

나처럼 카뮈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마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부조리에 대한 막연한 이해와 해석은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가지는 생각들과 이해들이 맞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럽기도 했었다.

 

이 책은 카뮈의 생의 길을 따라 걷고 있지만, 그 바닥은 모두 카뮈의 작품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밟는 걸음걸음마다 카뮈의 글들이 수놓아져있다.

저자를 따라 걸은 걸음의 수만큼 우리는 카뮈의 작품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최수철 작가는 카뮈의 생을 따라 걸으면서 뒤따라 걷는 우리를 위해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 작품을 쓸 때 카뮈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어떤 생각들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는지, 우리가 더 가까이 카뮈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게다가 카뮈의 작품세계가 어렵다고 느끼는 독자를 위한 해석도 놓치지 않는다.

카뮈의 언어가 어려워 주춤댈 때마다 뛰어난 통역사가 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로 카뮈의 말들을 해석해 주고는 했다.

해석의 말들마저 때로는 철학적이고 깊어서 두어 번 다시 읽으며 그 의미를 음미하고는 했다.

그 순간이 굉장히 즐거웠음을 숨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우선 달리 어쩔 수 없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비로소 자유가 있다. 그러려면 죽음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여 속속들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안과 겉』에서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라고 했다. 죽음을 긍정할 때, 삶도 긍정할 수 있다.

_ P. 105

 

 

 

오래된 고전 문학을 읽을 때면 늘 불안하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 나의 해석은 옳은가,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모두 이해했는가.

수많은 의문들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너무 많이 읽히고, 너무 많이 회자되어 왔고, 너무 많은 해석이 존재하기에 더더욱 제대로 읽고 싶어지는 욕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래서 때로는 너무 유명한 작품은 읽기를 꺼리게 된다.

나의 부족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알량함일까.

 

그런 순간에 이런 책들이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더 이상 카뮈는 내게 어렵고 멀고 낯선 존재가 아닌, 손잡고 이방의 나라를 함께 거닐었던 친구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완벽한 해석을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는다.

그저 카뮈의 글들을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충분한 의미가 되어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이미 저자가 내게 일러준 것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는 스스로 다짐한다. 죽는 날까지 대지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을 지키겠노라고,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영생을 꿈꾸지 않겠노라고, 인간과 대지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것에 희망을 가지지도, 그렇다고 죽음 앞에 굴복하여 절망하지도 않겠다고.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감각을 최대한 확장하는 한편, 하늘과 바다의 다정하면서도 가혹한 침묵을 받아들이며 늘 명징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한다.

_ P. 076~077

 

 

하지만 절대와 영원을 연상시키는 그런 형상이야말로 카뮈가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윤곽이 물렁거리고 당장이라도 발효와 부패로 이어질 듯한 상태, 스스로 더할 나위 없이 명증하고 자명한 태양, 그 태양의 가혹한 빛줄기를 받아 모든 것이 노골적으로 노출되고 짓뭉개져 소멸되기 직전의 상태, 그것이야말로 카뮈가 '절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_ P. 098

 

 

 

작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과 매우 가까이 맞닿아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여실히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한 게 맞지만, 이토록 선명하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카뮈가 살아온 생의 자국들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같은 빛깔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가 생을 통해 지키려고 했던 것, 그가 생을 바쳐 사랑했던 것들.

그 모든 것이 그의 작품에 녹아있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가 수첩』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책 중 하나다.

카뮈는 일기 대신 작가 수첩에 많은 것들을 글로 남겼는데,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그를 잃은 사람들에게 『작가 수첩』은 그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카뮈의 생을 좀 더 가까이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메모들을 통해 그가 입을 열고 말하지 않았던 침묵의 이야기들도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카뮈로써는 과연 그것을 기뻐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세 권으로 출간된 『작가 수첩』 또한 내겐 궁금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전에 『결혼·여름』을 먼저 구입할 생각이다.

내게 카뮈의 글을 읽고 싶어지게 했던 『결혼·여름』은 이 책 속에서도 아주 매력적인 문장들로 등장하고 있다.

매번 그 책 속 문장들이 나를 유혹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책과 나는 만나야만 하는 운명인가 보다.

 

게다가 이 책에는 카뮈가 『결혼·여름』에서 언급한 많은 장소들을 직접 가서 찍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가보지 않은 이방의 나라의 모습을 막연히 글로 상상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워서 매번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곤 했었는데 그 사진들과 저자의 친절한 설명들이 내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 같다.

카뮈의 다른 책을 읽을 때도 역시나 그 배경이 등장하기에 앞으로 만나게 될 카뮈의 작품들은 좀 더 상상의 폭을 넓혀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두근거린다.

 

 

 

 

 

 

그는 계속해서 『작가수첩 2』에서 스스로 이렇게 다짐한다.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다 해도 그것이 통째로 만들어져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영혼은 일생에 걸쳐서 이승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다는 것은 그 길고도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출산의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 자신과 고통에 의해 창조된 영혼이 드디어 준비가 되면 바야흐로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P. 269~270

 

 

이 책 또한 카뮈의 작품들 만큼이나 많은 사유의 시간을 선물해 준다.

책을 읽으면서 카뮈의 삶과 작품만큼이나 최수철 작가의 문장 또한 깊이 와닿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카뮈와 최수철 작가의 생각들.

그 깊은 시선과 고민과 사유에 나 또한 많은 생각들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죽음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시선, 삶을 살아가는 깨어있는 자세, 그리고 부조리한 삶마저 사랑하는 것.

내가 카뮈처럼 세상을 살아낼 자신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더 삶을 또렷이 바라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앞으로 내가 읽게 될 카뮈의 작품들은 이 책 덕분에 훨씬 더 깊고 풍부하게 와닿게 될 것을 믿는다.

감사한 일이다.

 

 

 

 

카뮈의 생을 알게 되고, 그 생을 함께 더듬는 동안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던 카뮈가 나에게도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늘 나는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여기며 지금에 왔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억하는 내가 너무 달라서 가끔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끝없이 변두리를 돌며 어떤 중심으로도 들어가지 못하고, 항상 사람들에게서 한 뼘은 떨어진 곳에 혼자 서있었던 것 같은 고독이 나를 끝내 놓아주지 않았었다.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의 존재인 것 같은 이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카뮈를 통해 나는 내 속의 이방인을 대면한다.

그 아이에게 생은 누구에게나 이방의 낯선 세계라고 조용히 일러준다.

 

어쩌면 당신도 마음속에 그런 이방인을 품고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카뮈를 통해 당신의 마음속 이방인도 어떤 이해와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는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야말로 부조리에서 우리를 구원해준다고 믿는다. 거리낌 없이, 아낌없이, 남김없이 '사랑'한다는 것, 그 또한 최초의 인간이자 마지막 인간으로서 우리 각자가 삶의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수행해야 할 '권리'이자 의무가 아닐까 한다. _ 최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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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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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그리고 나는 고아가 되었다.

시간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어떤 손들을 영영 잡을 수 없도록, 어떤 이름들을 영영 부를 수 없도록.

어른이 된다는 일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순간을 묵묵히 견뎌내는 일인가 보다.

그렇게 어른이 된 사람이 여기에도 있다.

엄마를 잃은 시간들, 그 이후의 시간들에 대해 담담히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낯선 타인이 건네주는 익숙한 '상실의 순간'은 우리를 울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눈물을 멈추게 만들기도 한다.

같은 슬픔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닌 동질감과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감정들의 이해가 우리를 위안하게 한다.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의 순간들에 조용히 서로의 손을 잡아준다.

 

 

 

부모를 잃는다는 것.

누군가의 아들, 딸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한 번은 기어코 겪어내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그 이별이 닥쳐온다고 해도 아프기는 매한가지.

전혀 다른 시간에 겪었던 두 번의 이별을 떠올려본다.

갑작스러웠던 죽음과 천천히 예견되었던 죽음.

다를 줄 알았던 이별의 순간은 결국 모두 슬픔과 고통과 상처로 남겨졌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도 했고, 죽음 한가운데 주저앉아 한없이 그저 울고 있고만 싶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건너 간신히 희석된 아빠를 잃은 슬픔 위로 다시 얹혀진 엄마의 죽음은 아직 너무 선명하기만 하다.

그래서 작가가 그려주는 임종의 순간을 읽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숨이 뚝, 멈췄다가도 엄마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다시 훅~ 깊은숨을 쏟아내길 반복하던 엄마의 마지막 모습.

그 순간들이 와락 쏟아져내렸다.

아플 줄 알면서, 울게 될 줄 알면서 책을 읽었다.

 

 

 

 

우습지만, 같은 후회를 하고 있는 사람의 '그 이후'의 시간들이 내게 묘한 위안을 준다.

괜찮아 보이는 얼굴로 오늘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당신도 괜찮지 않았구나.

후회와 슬픔과 망각과 담담함이 뒤엉킨 하루를 당신도 살아내고 있구나.

다들 같은 슬픔의 조각에 찔리면서 굳은살이 박이기를 기다리고 있구나.

그렇게 아프면서 묵묵히 일어서려고 하고 있구나.

슬픔을 견디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구나.

뜻밖의 위로와 쓸쓸한 깨달음.

나와 같은 울음을 울고 있는 사람의 낮과 밤을, 어제와 오늘을 지켜보는 일은 기묘한 경험이다.

내게서 발견하지 못한 얼굴을 마주하기도 하고, 나와 너무 똑같은 얼굴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았고, 글로 쓰여있지 않았던 무언의 말들 마저 나는 읽고 있었다.

공백 사이를 가득 채운 공허한 쓸쓸함을.

종이에 번지는 눅눅한 눈물의 무게를.

 

 

 

 

 

나의 죽음이 너의 페달을 밟게 한다.

나의 죽음이 너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_ P.158

 

 

 

이 책 속에 담긴 엄마의 죽음 이후의 시간들은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싶다.

눈물을 그칠 다정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할 것이고, 참았던 슬픔을 쏟아낼 토닥임이 되어주기도 할 것이다.

아직 겪지 않은 어떤 시간들을 짐작해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하고, 당연했던 일상의 풍경들에 감사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이미 겪은 슬픔이든 아직 겪지 않은 슬픔이든, 어차피 우리가 한 번은 통과해야 할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이 책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당신과 내가 이 커다랗고 공허한 슬픔을 건너오는 동안 부디 무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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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이 습관이 되기 전에 - 자꾸 미루는 버릇을 이기는 7단계 훈련법
스티브 스콧 지음, 신예경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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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걱정하느라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미래의 자신'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장기적인 대가를 치를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는 대개의 경우 그 결과가 언제 일어날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_ P.037

 

 

새해가 밝았다.

1월 1일이 어제였던 거 같은데 31일이라니.

순식간에 한 달이 끝나버렸다.

뚜렷하게 무언가를 해낸 것도 없고, 의미 있는 일을 한 것도 없다.

분명 1월 1일이라고 계획을 세웠지만,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무너졌다.

의지박약인가, 게으름인가.

진짜 심각하게 게으름을 물리치고 싶은 마음에 읽게 된 책.

<게으름이 습관이 되기 전에>

 

 

 

 

자꾸 미루는 버릇을 이기는 7단계 훈련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장 사용 가능한 실용서에 가깝다.

읽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깨우치는 쪽보다는, 당장 몸을 움직여 행동에 옮겨보기를 권하는 책의 내용 또한 제목과 맞춤이다.

아주 쉬운 것부터, 아주 사소한 것부터, 아주 작은 부분부터 시작하라는 제안이 꽤 그럴싸하다.

나처럼 게으른 독자를 움직이게 하려면 원대한 계획과 긴 과정을 나열하기 보다 직관적이고 바로 실천 가능한 것들을 제시하는 게 훨씬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말이다.

0단계에서는 게으름의 원인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눠 분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아요"와 "그냥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그리고 "주의가 산만해질 수밖에 없잖아요"가 내 경우와 딱 맞아떨어진다.

어쩌다 보니 어느 순간 무기력증이 심각해졌고, 미루기는 천성이라 늘 닥쳐야 움직이고, 늘 아이들과 있다 보니 항상 산만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한 가지 원인만으로도 충분히 게으름 피우기 좋을 텐데 심지어 여러 가지 이유를 덕지덕지 붙이고 앉아 있으니 어느 순간 게으름은 그냥 내 성격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전의 나는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게으른 사람 또한 아니었다.

어쩌다 이렇게 모든 것이 귀찮아져버리고 말았을까.

마음을 먹고 계획을 세워도 자꾸만 어긋나버리는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을 넘어선 '행동지침'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권하는 방법들 중에는 이미 내가 하고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하루하루 투두리스트를 만들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매번 노력하고 있다.

물론 투두리스트에 적어놓은 일들 중에도 미루다가 다음날로, 그 다음날로 넘어가는 일도 있다.

그래도 리스트를 만들어서 체크하면서 평소보다 조금은 더 움직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일단 할 일들을 잔뜩 적은 후에 분류를 하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다섯 가지로 꼽으라고 한다.

그 다섯 가지만을 남기고 나머지 일들은 일단 아웃.

중요한 일을 미루게 만드는 다른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내게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완벽한 실천까지야 아직도 멀고 먼 길이 될 테지만, 한 달 단위로, 주 단위로, 일 단위로 나눠서 체크하고 교정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중요한 일들을 효율적으로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게으름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 책에 담겨있다.

차근차근 따라 할 수 있도록 단계를 높여가며 주어진 미션들을 클리어하다 보면 분명 지금보다는 조금 더 활기 차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좀 더 효율적이고 시간을 덜 빼앗기며 일할 수 있는 팁이 담겨있어 도움이 될 것 같다.

일과 가족의 균형을 맞추는 문제에 대해서도 책이 도움을 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은

미루는 버릇과 안녕을 고할 수 있는 '실천 편'인 것이다.

지금 당장 행동하며 변화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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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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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저 혼자 일찍 피었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꽃이 저 먼저 져버렸다고 봄날이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저 혼자 걸어간다고 새로운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다 무너졌다고 길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비가 와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탕 길을 걷는 내 발자국마다 그래도 꽃은 피었다

P.67 _ 「슬프고 기쁜」 中… 앞부분

 

 

 

정호승 시인은 내게 청춘의 시간의 위로였다.

어쩌자고 내 스무 살은 그렇게도 진창이었는지, 가는 곳마다 진흙에 푹푹 발이 빠져 앞으로 걸어가는 일이 그렇게도 서러웠다.

나만 힘들고 나만 슬프고 나만 절망이었다고 착각하던 시간들.

빌어먹을 하늘을 향해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시간들.

누구에게나 청춘은 난생처럼 다리가 생겨난 인어의 걸음처럼 서툴고 아프고 고통스러웠음을 지나온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시절들을 기어코 견뎌내게 했던 것들 중에 '시'가 있었다.

비뚤어진 세상도,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도, 끝없이 넘어지기만 하는 인생도 모두 암담하기만 했던 시절.

내 마음을 토닥여주고 이해해주고 일렁거림을 잦아들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사춘기 시절부터 내내 좋아하던 시들이었다.

그 시들 중에 정호승 시인의 시도 있었다.

절망과 희망을 함께 노래하던 시인.

그래서 무조건적인 희망의 노래보다 훨씬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어쩐지 그 희망을 믿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시는 내 마음이 엉망으로 헝클어질 때마다 가만히 내 곁에서 침묵의 친구가 되어 주고는 했다.

 

그 시절들을 버텨낸 덕에 나는 '어른'의 이름표를 달았다.

여전히 미숙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전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시간에 떠밀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동안 시인은 황혼에 접어들어 있었다.

 

낮은 곳에 눈을 두고 삶의 고통들에 관심을 두고, 그 슬픔들을 밟고서도 희망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빈 그릇에 허무와 고독한 성찰을 담아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려고 한다.

일흔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평생을 시인의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온 그의 발걸음이 가득 찍혀 있어서 그 쓸쓸함마저 좋다.

 

 

 

 

오늘도 나는

나를 위해 죽어간 나를 위하여

슬피 울 필요는 없다

 

P.72 _ 「개미」 中… 앞부분

 

 

 

 

 

< 백송(白松)을 바라보며 >

 

모든 기다림은 사라졌다

더 이상 기다림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잠 못 이루는 밤도 사라져야 한다

그 어딘가에 순결한 기다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더 이상 희망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절망 따위는 더더구나 필요 없다

그 어딘가에 성실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제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을 때 왔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있는 게 아니라

겨울을 살기 위하여 있다

 

지금이라도 절벽 위에 희디흰 뿌리를 내려라

무심히 흰 눈송이가 솔가지 끝에 켜켜이 쌓여도 좋다

허옇게 속살까지 드러난 분노의 상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P.52~53 _ 「백송을 바라보며」 전문

 

 

 

그의 이번 시집은 고뇌와 절망과 슬픔과 죄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더 이상 피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부끄러움과 죄와 절망과 슬픔들을 어떻게든 건너 보려고 단단하게 견뎌내던 시인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은 것도 같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마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인생의 끄트머리쯤에 가닿으면 우리 또한 그렇게 도망치려고 했던 많은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되는 걸까.

늘 정면으로 마주 보며 외면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마냥 시인은 그보다 더 앞선 걸음으로 삶의 통찰이 담긴 시들을 건네주었다.

 

「심장」, 「나의 지갑에게」, 「시간에게」와 같은 시들에서는 삶의 끝자락까지 우리를 쥐고 흔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글픔을 보게 된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깊이 새겨진 이 시들을 읽으면서 아팠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여전히 깨닫지도 못한 채 내내 심장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고,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고, 그렇게 생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서글펐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어쩐지 그 일들은 여전히 반복하며 생을 살아내고 있을 것만 같은 쓸쓸함이 밀려든다.

 

「점안」「새똥」, 「해우소」 같은 시들에서는 어떤 해탈의 얼굴을 본다.

고뇌와 번뇌를 벗어던지고 말갛게 무엇이든 그대로 투영시킬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본다.

삶이라는 긴 시간을 걸어오며 거듭 성찰하고 낮추며 구도의 길을 걷듯 만나기를 원했던 그 무언가.

기어코 가닿기를 원했던 어떤 것에 가닿은 느낌마저 든다.

나이가 주는 혜안일까, 아니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길 끝에 주어진 선물일까.

나도 시간이 흘러 그런 눈을 가질 수 있게 될까.

 

 

 

 

< 기차에서 >

 

나는 왜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는가

나는 왜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기차에서 뛰어내려 울고 있는가

그곳은 종착역이 아니다

내가 기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내 비록 평생 조약돌을 갈아

당신에게 바칠 맑은 손거울 하나

만들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달리는 기차를 사랑하라

고요히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모내기 막 끝낸

무논의 푸른 그림자를 바라보라

내가 기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P.89 _ 「기차에서」 전문

 

 

 

 

 

곡기(穀氣)

 

당신이 곡기를 끊으셨다

그리고 나를 끊으셨다

창밖엔 비가 왔다

 

당신에게 도적이 든 것이다

당시의 도적을 잡으려고

날밤을 새웠으나

 

내가 잠깐 조는 사이

당신은 도적을 따라

빗속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당신처럼

내 안에 도적이 들어

곡기를 끊는 날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

 

P.144 _ 「곡기」 전문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머니를 잃은 시인의 가슴에 자꾸 나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두 번째 기일이 지나고, 나는 꽤 괜찮아졌다고 믿고 있지만, 여전히 자책감과 슬픔을 짊어지고 산다.

어쩌면 영영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짓누르는 이 이별의 무게가 자꾸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뒤척이는 몸부림의 끝은 또 언제가 될지 알 길이 없다.

 

그런 내게 시인의 슬픔은 공감과 위로를 함께 건네준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슬픔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느 나이 때에 마주치더라도 슬픔의 무게가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나의 오늘의 슬픔에 안도가 든다.

내가 덜 자라서,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내가 아직 너무 서투르고 젊어서 이토록 슬픈 게 아니었음에.

나의 이 수많은 후회와 자책과 미안함들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고통의 무게라면 견뎌내는 수밖에.

 

그저 사람이라서 겪어야만 하는 슬픔이었던가 보다.

생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업보인가 보다.

내내 이별을 만나고 앓으면서 삶을 이어가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던가 보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어느 나이에나, 조금도 덜하지 않고 아프다.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고 돈만 버느라 무심하고 다정하지 못했던 자식들은

매번 잃고서 가슴을 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텅 빈 시간만을 부여잡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외친다.

놓쳐버린 시간은 아무 힘이 없는데도.

 

시인은 시로 그 시간들을 고해성사 한다.

 

 

 

 

 

 

< 새를 키우는 것은 >

 

새를 키우는 것은 폭설이다

겨울나무 가지를 스치는 매서운 바람이다

바람을 견뎌내는 인내다

끝끝내 높은 가지 끝에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 홍시의 붉은 미소다

지난밤 꿈속에 나타나신 어머니의 눈물이다

모든 하늘을 다 날지 않고

모든 나뭇가지에 다 앉지 않고

모든 벌레를 다 잡아먹지 않는 절제다

서늘한 겨울 달빛의 고요다

폭설을 견디고 고요히 심장을 드러낸

산수유 붉은 열매에 대한 감사다

 

P.46 _ 「새를 키우는 것은」 전문

 

 

 

오랜만에 읽은 정호승 시인의 신작 시집.

덕분에 집에 있던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꺼내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잊고 지냈던 오랜 벗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닮은 듯 낯선, 낯선 듯 익숙한,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정호승 시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어쩐지 뭉클해졌다.

시간의 힘 앞에 우리는 모두 어제보다는 더 늙고,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구나 싶어서 서글프기도 했고,

그 먼 시간을 건너 여전히 살아남아 서로에게 시로 가닿을 수 있어서 가슴 찡하기도 했다.

 

지친 내게 여전히 묵묵한 다독임을 건네주는 시인의 시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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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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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임수와 거짓말, 위협과 루머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가도 좌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뒤에야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물론,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이해하게 됐다.

프롤로그 _ P.23

 

 

 

이 책을 읽으려고 선택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인 줄 알았다.

 

실제의 사건이 바탕이지만 그 위에 작가의 허구를 두껍게 펴 발라 매혹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한 글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책을 펴고 몇 장을 넘기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실제의 사건을 최대한 사실 그대로 옮기려고 노력한 논픽션이었다.

문장마다 꼬리표처럼 달린 숫자들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해 진실에 가닿으려고 노력했는지가 느껴졌다.

진실을 찾아 헤맨 작가의 모든 걸음걸음이 이 한 권의 책에 녹아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연사 박물관을 턴 '깃털 도둑'에 대한 끝없는 물음이다.

그는 왜 자연사 박물관의 죽은 새 표본을 훔쳐야만 했는가.

그는 어떻게 그런 죄를 짓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가.

그가 훔친 새들은 어떻게 세상에 흡수되어 플라이의 재료가 되었는가.

그들은 왜 새의 깃털에 그토록 열광하는가.

물음은 또 다른 물음으로 이어져 새로운 물음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이 책은 '도둑질'로부터 시작되지만 상상하지 못한 수많은 다른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깃털'의 존재는 너무도 깊고 무겁기만 하다.

깃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과학사에 중요한 표본 중 하나이고, 인간의 탐욕과 집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지적이고 탐구적인 시선이 가닿으면 깃털은 과학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고,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 어린 시선이 가닿으면 깃털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장식품이 되고,

탐욕스러운 욕망의 시선을 투영시키면 비싼 값어치를 지닌 부의 축적물이 된다.

바라보는 사람이 욕망하는 것에 따라 깃털은 다른 의미를 지닌 채 우리 곁에 있다.

학자의 눈을 버리고, 장사치의 눈을 버리고, 갈망과 욕망의 눈마저 버리고 나면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깃털을 바라보게 될까.

한때는 살아 있었고, 어디선가 여전히 살아있을 깃털의 진짜 주인인 새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깃털은 생명이다.

지식도 아름다움도 탐욕도 아닌, 존중받아야 할 생명.

그 생명들은 어떻게 해서 사라져갔고, 어떻게 해서 사람들의 집착의 대상이 되었는지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바로 우리의 손으로 그런 일들을 행해 왔기 때문에.

당신도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이 책을 통해 듣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더 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책은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가 299마리의 새 표본을 훔친 에드윈 리스트의 사건을 궁금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뛰어난 플루트 연주자였고, 동시에 플라이 타잉에 매료되어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힌 플라이 타이어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왜 자연사 박물관에서 죽은 새를 훔쳐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 잠깐,

플라이 타잉은 연어 낚시를 할 때 쓰는 가짜 미끼인 '플라이'를 만드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연어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플라이 타잉을 하는 게 일반적일 것 같지만, 유구한 역사(?)를 지나는 동안 플라이 타잉은 연어낚시와 상관없이 별개의 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취미 생활이 되었다.

실제로 플라이 타잉을 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새를 훔친 에드윈 또한 연어낚시를 위한 타잉이 아닌 오로지 그 자체로서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위한 플라이 타잉을 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연어낚시를 위해 필요했던 플라이는 사람들의 욕망의 움직임에 따라 어느 순간 예술적 작품으로서의 가치에 치중하는 독립된 객체로 변화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건의 쓸모마저 사람들의 욕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의미로 변질되고 마는 현실이 어쩐지 씁쓸하게 여겨진다.

어쨌든 그 시작이 연어 낚시인 것인데 연어가 사실은 플라이의 종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날 뿐이다.

그러니까 플라이가 화려해지고, 진짜 깃털을 사용하고, 보호종의 아름다운 깃털을 탐해야만 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람들의 탐욕과 허세, 남들보다 더 우위에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의 표출일 뿐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에드윈은 플라이 타잉에 필요한 깃털을 왜 '훔쳐야만' 했을까.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하고 더 뛰어난 플라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플라이 타이어들은 모두 희귀 깃털을 열망한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집념은 무섭고도 강하다.

죄를 짓고서라도, 혹은 그 죄를 눈 감고 침묵하고서라도 깃털을 손에 넣기를 소망한다.

그 강한 열망은 옳고 그름의 경계마저도 무너뜨려 자신이 밟고 선 땅이 선인지 악인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희귀하고 구할 수 없는 깃털에 대한 욕망은 희귀본에 대한 모든 인간의 소유욕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특정한 한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소유욕을 들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초판본에 대한 소유욕, 절판본을 향한 갈망, 한정판에 열광하는 심리.

출발은 어차피 똑같을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이 누군가의 생명을 앗는 일이 아니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지탄받지 않을 뿐이다.

욕망이 꼭 나쁜 것이라고만 규정짓기도 어렵다.

욕망하는 마음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을 안다.

단지 그 욕망이라는 마음이 어디까지 좋은 것이고, 얼마만큼 차올라야 임계점에 이르러 변형되어버리고 마는 것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무언가를 향한 우리의 갈구의 마음이 탐욕과 섞이고 집착으로 변질되어 마침내 넘지 말아야 할 그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내 안의 욕망이 내내 아름답고 건강하도록 말이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수억 마리의 새들이 인간에게 살해됐다. 박물관 때문이 아닌,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 바로 여성들의 패션 때문이었다.

P.69

 

 

 

모든 일은 플라이 타잉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플라이 타이어들이 구하지 못해 안달인 멸종 위기종인 새들의 깃털.

그 새들은 왜 멸종 위기종이 되었는가.

자연의 선택이었는가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는가.

그 진실을 알기 위해 19세기로 돌아간다.

놀랍게도 당시의 새들은 오로지 여자들의 치장을 위해 죽어야 했다.

모자를 장식하는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사용되기 위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수많은 새들이 희생당했다.

사람들은 만족을 몰랐다.

더 아름다운 새, 더 희귀한 새, 더 아름다운 빛깔의 깃털, 누구도 갖지 못한 새로운 깃털을 향한 열망이 결국 어떤 종의 멸종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아름다웠기 때문에 죽어야만 했다.

아름답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름다운 깃털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탐욕으로 인해 새들의 개체 수는 현저히 줄어들고야 말았다.

뒤늦게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런 한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서 법이 만들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멸종 위기종인 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단체들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여러 나라들이 그 의지에 공감을 표함에 따라 그나마 남아있는 새들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인간들에 의해 여전히 보호받아야 할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대량학살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일보의 발전은 아닐까 싶다.

동물을 보호하는 아름다운 법, 바로 그 법 때문에 자연사 박물관이 타깃이 되었다.

살아있는 새들을 죽일 수 없다면, 죽어있는 새들이라도 기꺼이 훔쳐야겠다는 마음이 결국 박물관 담장을 넘고야 만 것이다.

 

 

 

 

 

프리스 존스 박사와 애덤스는 세상이 이미 이러한 표본들에 지식이라는 빚을 졌다고 설명했다. 월리스와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밝혀낸 것도 그 덕분이었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박물관에 있는 오래된 알 표본들을 서로 비교해 DDT 살충제가 쓰인 이후부터 알껍데기가 얇아지고 알의 부화율도 줄었음을 밝혀냈다. 덕분에 이 살충제의 사용이 완전히 금지될 수 있었다. 좀 더 최근에는 150년 된 바닷새의 표본에서 뽑아낸 깃털 샘플을 사용해서 바닷물의 수은량이 증가했음을 알아냈다. 그것 때문에 다른 동물들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수은에 중독된 물고기를 먹는 인간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깃털을 "바다의 기억"이라고 표현했다.

P.235

 

 

그들은 박물관에 왜 그렇게 많은 새가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같은 종의 새들을 여러 마리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이 여유분의 새들을 내어준다면 살아있는 새들이 그만큼 죽지 않아도 될 거라는 이상한 논리를 펼치는 에드윈.

그렇다면 박물관의 표본으로서의 새의 가치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저자는 찰스 다윈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론'을 비슷한 시기에 발견하고 발표한 두 생물학자가 있다.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

이 책에서는 두 사람 중 월리스의 생애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윈이 더 익숙하겠지만, 트링 자연사 박물관과 에드윈의 깃털과 더 가까이 닿아있는 인물이 월리스이기 때문이다.

그가 연구하고 표본을 만들어 수집했던 새들 중 플라이의 아름다움을 완성해줄 매혹적인 깃털을 지닌 새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생을 바쳐 연구했던 새들 중 몇몇의 표본은 한낱 깃털로 플라이 타이어들의 손을 떠돌게 되고 말았다.

아름다웠고, 희귀했으므로.

 

 

 

 

 

잃어버린 표본들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표본은 지나간 시대를 압축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였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표본을 훔쳤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서 지식을 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P.204

 

 

 

플라이 타이어들이 갖고 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작품을 빛내줄 아름다운 깃털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지나친 열망과 오리지널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었다.

그들에게 깃털은 딱 그만큼의 의미를 지녔을 뿐이었다.

하지만 박물관에 표본으로 소장되어 있던 새의 표본은 그보다 더 크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코앞의 아름다움에만 미쳐있는 사람들의 시선 너머, '아름다움'을 넘어서 자연의 일부로서의 존재가치와 무한한 정답들을 담고 있던 새의 표본들.

그 엄청난 과학적 지식과 시간의 기록들을 에드윈은 아무렇지 않게 해체하고 돈으로서 환산된 가치만을 좇았다.

그가 훔친 것은 정말 아름다운 새의 깃털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내고 있는 표본들이 과학자들이 아직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믿었다.

P.236

 

 

 

 

지식이냐 탐욕이냐. 이들 사이의 전투에서 탐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345

 

 

 

저자는 탐욕이 승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세상이 어쩐지 자꾸만 탐욕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이 책처럼 희망을 향한 발걸음 또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을 믿는다.

저자가 포기하지 않고 오랜 시간 묻고 또 물으면서 알고자 했던 '깃털을 둘러싼 탐욕'의 민낯이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에 이제는 우리가 답할 차례인 것 같다.

누군가의 탐욕을 손가락질 하기 전에 나의 탐욕을, 내 안의 잘못된 욕망을 바로잡아야겠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수많은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에 생명을 죽이고 얻은 피로 목을 축이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향해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지,

멈춰서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주는 책.

 

 

 

 

책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들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생각하게 하고, 돌아보게 하고, 깨어있게 하는 책만큼 좋은 책이 있을까.

하지만 좋은 책은 나에게 너무 많은 질문들을 하고 그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게 만드는지라 리뷰를 쓰는 일이 너무 어렵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되려 너무 좋았던 책의 리뷰를 쓰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많이 흔들어 놓는 책일수록, 내 안에서 진동의 여운이 오래 남아 끝없이 퍼져 나가고 있으므로 그 물결의 끝을 나조차 짐작하기 어렵다.

이 책 또한 내게 그런 책 중 하나다.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었던 생물학과 멸종에 대한 이야기부터 박물관이 지켜내고 있었던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귀 기울여 듣게 되었다.

플라이 타잉의 세계 또한 흥미로웠고, 아스퍼거 증후군을 연기해 의사를 속일 수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다.

저자가 해오던 일인 난민 문제마저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19세기로부터 시작된 깃털의 여정은 상상하지도 못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논픽션이지만 믿을 수 없게 흥미롭고, 재미있고, 쉽다.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좋은 책이 심지어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있다는 점이 가장 감사하다.

그래서 추천!

당신도 함께 읽고, 우리가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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