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찾아서 창비시선 438
정호승 지음 / 창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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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저 혼자 일찍 피었다고 봄이 오는 것은 아니다

꽃이 저 먼저 져버렸다고 봄날이 아주 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저 혼자 걸어간다고 새로운 길이 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길이 다 무너졌다고 길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는 곳마다 비가 와서 길은 진흙탕이 되었다

진흙탕 길을 걷는 내 발자국마다 그래도 꽃은 피었다

P.67 _ 「슬프고 기쁜」 中… 앞부분

 

 

 

정호승 시인은 내게 청춘의 시간의 위로였다.

어쩌자고 내 스무 살은 그렇게도 진창이었는지, 가는 곳마다 진흙에 푹푹 발이 빠져 앞으로 걸어가는 일이 그렇게도 서러웠다.

나만 힘들고 나만 슬프고 나만 절망이었다고 착각하던 시간들.

빌어먹을 하늘을 향해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냐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시간들.

누구에게나 청춘은 난생처럼 다리가 생겨난 인어의 걸음처럼 서툴고 아프고 고통스러웠음을 지나온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 시절들을 기어코 견뎌내게 했던 것들 중에 '시'가 있었다.

비뚤어진 세상도,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도, 끝없이 넘어지기만 하는 인생도 모두 암담하기만 했던 시절.

내 마음을 토닥여주고 이해해주고 일렁거림을 잦아들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사춘기 시절부터 내내 좋아하던 시들이었다.

그 시들 중에 정호승 시인의 시도 있었다.

절망과 희망을 함께 노래하던 시인.

그래서 무조건적인 희망의 노래보다 훨씬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어쩐지 그 희망을 믿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던 그의 시는 내 마음이 엉망으로 헝클어질 때마다 가만히 내 곁에서 침묵의 친구가 되어 주고는 했다.

 

그 시절들을 버텨낸 덕에 나는 '어른'의 이름표를 달았다.

여전히 미숙하고 부족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전혀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시간에 떠밀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동안 시인은 황혼에 접어들어 있었다.

 

낮은 곳에 눈을 두고 삶의 고통들에 관심을 두고, 그 슬픔들을 밟고서도 희망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빈 그릇에 허무와 고독한 성찰을 담아 따뜻한 한 끼를 대접하려고 한다.

일흔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평생을 시인의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온 그의 발걸음이 가득 찍혀 있어서 그 쓸쓸함마저 좋다.

 

 

 

 

오늘도 나는

나를 위해 죽어간 나를 위하여

슬피 울 필요는 없다

 

P.72 _ 「개미」 中… 앞부분

 

 

 

 

 

< 백송(白松)을 바라보며 >

 

모든 기다림은 사라졌다

더 이상 기다림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잠 못 이루는 밤도 사라져야 한다

그 어딘가에 순결한 기다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더 이상 희망에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

절망 따위는 더더구나 필요 없다

그 어딘가에 성실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제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을 때 왔다

겨울은 봄을 준비하기 위하여 있는 게 아니라

겨울을 살기 위하여 있다

 

지금이라도 절벽 위에 희디흰 뿌리를 내려라

무심히 흰 눈송이가 솔가지 끝에 켜켜이 쌓여도 좋다

허옇게 속살까지 드러난 분노의 상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P.52~53 _ 「백송을 바라보며」 전문

 

 

 

그의 이번 시집은 고뇌와 절망과 슬픔과 죄와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더 이상 피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부끄러움과 죄와 절망과 슬픔들을 어떻게든 건너 보려고 단단하게 견뎌내던 시인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은 것도 같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그것마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인생의 끄트머리쯤에 가닿으면 우리 또한 그렇게 도망치려고 했던 많은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되는 걸까.

늘 정면으로 마주 보며 외면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많은 것들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챈 것마냥 시인은 그보다 더 앞선 걸음으로 삶의 통찰이 담긴 시들을 건네주었다.

 

「심장」, 「나의 지갑에게」, 「시간에게」와 같은 시들에서는 삶의 끝자락까지 우리를 쥐고 흔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글픔을 보게 된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이 깊이 새겨진 이 시들을 읽으면서 아팠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여전히 깨닫지도 못한 채 내내 심장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고, 버렸다가 다시 주워오고, 그렇게 생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서글펐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어쩐지 그 일들은 여전히 반복하며 생을 살아내고 있을 것만 같은 쓸쓸함이 밀려든다.

 

「점안」「새똥」, 「해우소」 같은 시들에서는 어떤 해탈의 얼굴을 본다.

고뇌와 번뇌를 벗어던지고 말갛게 무엇이든 그대로 투영시킬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본다.

삶이라는 긴 시간을 걸어오며 거듭 성찰하고 낮추며 구도의 길을 걷듯 만나기를 원했던 그 무언가.

기어코 가닿기를 원했던 어떤 것에 가닿은 느낌마저 든다.

나이가 주는 혜안일까, 아니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길 끝에 주어진 선물일까.

나도 시간이 흘러 그런 눈을 가질 수 있게 될까.

 

 

 

 

< 기차에서 >

 

나는 왜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차에서 뛰어내리는가

나는 왜 기차가 달리고 있는데도

기차에서 뛰어내려 울고 있는가

그곳은 종착역이 아니다

내가 기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내 비록 평생 조약돌을 갈아

당신에게 바칠 맑은 손거울 하나

만들지 못했다 할지라도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달리는 기차를 사랑하라

고요히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모내기 막 끝낸

무논의 푸른 그림자를 바라보라

내가 기차에서 뛰어내린다고 해서

기차가 달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P.89 _ 「기차에서」 전문

 

 

 

 

 

곡기(穀氣)

 

당신이 곡기를 끊으셨다

그리고 나를 끊으셨다

창밖엔 비가 왔다

 

당신에게 도적이 든 것이다

당시의 도적을 잡으려고

날밤을 새웠으나

 

내가 잠깐 조는 사이

당신은 도적을 따라

빗속을 뚫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당신처럼

내 안에 도적이 들어

곡기를 끊는 날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

 

P.144 _ 「곡기」 전문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나는 어머니를 잃은 시인의 가슴에 자꾸 나를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두 번째 기일이 지나고, 나는 꽤 괜찮아졌다고 믿고 있지만, 여전히 자책감과 슬픔을 짊어지고 산다.

어쩌면 영영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짓누르는 이 이별의 무게가 자꾸만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열심히 뒤척이는 몸부림의 끝은 또 언제가 될지 알 길이 없다.

 

그런 내게 시인의 슬픔은 공감과 위로를 함께 건네준다.

 

그 나이가 되어서도 슬픔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느 나이 때에 마주치더라도 슬픔의 무게가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나의 오늘의 슬픔에 안도가 든다.

내가 덜 자라서,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서, 내가 아직 너무 서투르고 젊어서 이토록 슬픈 게 아니었음에.

나의 이 수많은 후회와 자책과 미안함들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고통의 무게라면 견뎌내는 수밖에.

 

그저 사람이라서 겪어야만 하는 슬픔이었던가 보다.

생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짊어져야 할 업보인가 보다.

내내 이별을 만나고 앓으면서 삶을 이어가는 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던가 보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고통은 누구에게나, 어느 나이에나, 조금도 덜하지 않고 아프다.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고 돈만 버느라 무심하고 다정하지 못했던 자식들은

매번 잃고서 가슴을 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텅 빈 시간만을 부여잡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랑한다고 외친다.

놓쳐버린 시간은 아무 힘이 없는데도.

 

시인은 시로 그 시간들을 고해성사 한다.

 

 

 

 

 

 

< 새를 키우는 것은 >

 

새를 키우는 것은 폭설이다

겨울나무 가지를 스치는 매서운 바람이다

바람을 견뎌내는 인내다

끝끝내 높은 가지 끝에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 홍시의 붉은 미소다

지난밤 꿈속에 나타나신 어머니의 눈물이다

모든 하늘을 다 날지 않고

모든 나뭇가지에 다 앉지 않고

모든 벌레를 다 잡아먹지 않는 절제다

서늘한 겨울 달빛의 고요다

폭설을 견디고 고요히 심장을 드러낸

산수유 붉은 열매에 대한 감사다

 

P.46 _ 「새를 키우는 것은」 전문

 

 

 

오랜만에 읽은 정호승 시인의 신작 시집.

덕분에 집에 있던 정호승 시인의 다른 시집들도 꺼내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잊고 지냈던 오랜 벗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갑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닮은 듯 낯선, 낯선 듯 익숙한,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정호승 시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어쩐지 뭉클해졌다.

시간의 힘 앞에 우리는 모두 어제보다는 더 늙고, 죽음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구나 싶어서 서글프기도 했고,

그 먼 시간을 건너 여전히 살아남아 서로에게 시로 가닿을 수 있어서 가슴 찡하기도 했다.

 

지친 내게 여전히 묵묵한 다독임을 건네주는 시인의 시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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