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악센트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서라미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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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위한 글밖에 쓸 줄 모르는 나는 어쩌면 작가와는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오늘 편지를 쓴다. 그날, 그때, 내 마음이 떨렸던 눈부신 순간들이 하나든 둘이든 당신에게로 가닿기를 바라며.

이토록 좋은 것들을 나누고 싶어서.

당신과 함께.

 

P. 6 _ 시작하며 (작가의 말)

 

 

이런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면 우리는 마음이 떨리고 행복해질 것이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오늘 자신이 마주친 작은 행복의 순간들을 정갈하게 적어 건넨다면 누구라도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런 행복을 누군가에게 건네 준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문득 부끄러워진다.

얼마든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오늘 내가 발견한 행복의 모습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나이를 먹어 갈수록 무심해지고 나태해지는 기분이다.

 

저자는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임에도 나보다 더 젊게 느껴진다.

아직도 젊은 감각과 젊은 마음들이 하나도 나이 들지 않은 것만 같다.

놀랍도록 반짝이고 아름답다.

심지어 세심하고 섬세하기까지 하다.

무던하게 지나친 오늘이라는 시간을, 저자는 섬세하게 결을 매만지며 그 속에서 빛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그러고는 그 순간들을 기꺼이 함께 나누기를 청한다.

이렇게 마음까지 꾹꾹 눌러 담아.

 

 

 

 

마쓰우라 야타로는 <생활수첩>의 편집장이고 일본 셀렉트 서점의 선구자이며 수필가인 동시에,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프로페셔널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 채 책을 읽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왜 일본 젊은이들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인물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을 장을 덮으며 나 또한 이렇게 존경할 만한 어른이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시간이 가져다준 강제의 선물이지만, 제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자신의 나이를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다 시간에 등 떠밀려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마쓰우라 야타로는 하루하루를 온전히 감당하며 제대로 나이 든 멋진 어른의 표본으로 보였다.

누구보다 젊지만, 누구보다 '어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

 

 나이를 먹어도 나답지 않은 것을 계속 발견하고, 배우고, 경험하자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실패할 용기다.

P.173

 

 

끝없이 자신을 단련하고, 어느 한곳에 정착한 채 고여있지 않도록 늘 새로움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그런 용기를 가지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경험을 기꺼워하는 사람.

닮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그것도 에세이를 읽다가 누군가를 존경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공감과 위로의 글이 에세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이 책은 전혀 다른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본받고 싶은 어른, 닮고 싶은 어른, 곁에 있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어른.

그런 어른을 만났다.

 

 

 

나 이외의 사람은 모두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그 사람이 어떤 분야의 스승인지는 내가 발견해야 한다. 스승을 발견하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P.152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관계를 이어 나갈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매번 상대에게 바라는 것만 많고, 섭섭한 것만 많은 부족한 우리들에게 너무 와닿는 문장이다.

상대방을 깊이 바라보고,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해 내고, 그 사람만이 가진 최고의 것들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는 자세로 누군가와 만난다면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더 풍요로워질까.

생각만 해도 근사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누군가를 만난다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두근거리는 설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고, 지치고, 피곤했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지나쳐 사람을 만나는 일을 피하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장점만 가진 사람은 없다.

장점만큼의 단점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의 단점들 또한 넘치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의 단점이 내게 강펀치를 날릴 때마다 참는 일이 점점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싫은 것들은 마치 돋보기로 보는 듯 점점 더 크게 보이고, 좋은 것들은 자꾸만 잊혀져 갔다.

그렇게 사람에게 지쳐갔다.

 

이 문장을 마주치고 반성하게 된다.

내게 이런 기꺼운 마음이 있었다면, 상대방을 스승으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분명 그 관계에서 덜 힘들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어쩌면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나 보다.

 

아직은 누군가에게서 스승을 발견하는 눈이 내겐 없다.

하지만, 꼭, 그런 눈을 갖고 싶어진다.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존경할만한 점을, 배우고 싶은 점을, 그 사람만이 가진 위대한 부분을 반드시 찾아내고 싶어진다.

그런 눈을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사귀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자신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사귀지 않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러니 지금부터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과 까치발을 들고서라도 사귀어보자.

사람이란 아무래도 즐거운 인간관계에 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안에 계속 머무르는 이상, 얻는 것이 없거나 막혀 있는 상태를 돌파할 수 없다. 안이한 생각이나 습관과 감각이 어떤 지점에서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자신의 성장을 방해한다.

_ P.187~188

 

 

무엇이든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고,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내게 그의 말들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같이 여겨진다.

과연 열수 있을까, 두려우면서도 설레인다.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그 세계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문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또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영원히 멈춰진 채로, 흐르지 못한 채로,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게 되는 건 아닌지.

문득 두려워지기도 한다.

 

평온한 나의 하루하루가 사실은 성장을 멈춘 나무의 마지막인 것은 아니가 싶은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주위에서 새로운 것을 하라고, 무엇이라도 도전해 보라고 나를 재촉하지만, 익숙한 오늘을 벗어나기가 싫었다.

이렇게 산다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왜 다들 자꾸만 새로운 것만을 강요하는지 불편하기만 했다.

그냥 나는 지금이 좋다고, 늘 말해왔다.

 

그런데 처음으로 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저자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그저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을 뿐인데, 내가 그 삶이 궁금해진 것이다.

경험해보지 못했던, 살아보고자 한 적도 없는 삶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진 것이다.

이런 마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내가 아는 나는 낯설고 새로운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나답지 않게 살아가는 일에 열심이라는 저자의 말에 나답게 살아가려고만 노력한 내 시간들이 미련하게 여겨졌다.

나다운 게 뭔데?

내가 나를 스스로 규정짓고 그 틀에 나를 가둬두고 있었던가 싶어서 헛웃음이 난다.

익숙한 것을 탈피하고, 규정된 틀을 벗어던지고, 끝없이 새로워지려는 저자의 모습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게 강요된 새로움 보다, 그저 삶으로 그것을 보여준 저자의 움직임이 훨씬 더 깊이 와닿았다.

 

아직 새로운 문을 열기엔 나의 용기가 좀 부족하지만, 문 너머의 세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제와 다른 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당신이 삶이 나에게도 분명한 자국을 남겼다.

좀 더 다른 사람이 되어 보기로 나도 결심했으니까.

 

 

 

고독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은 안다. 고독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마음이 생기고 다정해진다는 것도 안다. 그래,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하지만 고독에도 종류가 있어서 나를 한없이 끌어내리는 고독은 꽤나 괴롭다. 바닥까지 끌어내리면 그나마 낫지만, 그 와중에 일상이나 업무를 이어나가야 하는 고독은 가슴을 바싹바싹 쥐어짠다.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_ P.75

 

 

사실 이 책은 굉장히 섬세한 에세이다.

책을 덮고 나니 일상에서 내가 반드시 배우고 싶은 부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 마치 인문 에세이처럼 서평을 쓰고 있지만, 책이 지닌 색감은 단정하고 다정하면서도 섬세하다.

책의 절반을 읽을 때까지 나는 저자가 여자인 줄 알았다.

너무도 섬세하게 감정과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저자의 글을 읽고 도저히 남자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의 편견을 마주하고 헛웃음이 났다.

남자는 섬세하면 안 되나? 남자는 사려 깊으면 안 되나? 남자는 감성적이면 안 되나?

남자다움이라는 틀을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은 저자의 성별을 모르고 읽는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될 것만 같다.

그만큼 문장의 결들이 섬세하고도 다정하다.

 

공감하며 읽은 부분들이 너무 많고, 마음을 조용히 흔드는 문장들도 참 많다.

문득 외로워지는 날,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다정함을 꿀꺽 삼키고 싶어진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만큼 근사한 일은 없다.

누군가를 못 견디게 좋아하는 마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괴롭거나 쓸쓸하거나 슬플 때,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그 존재만으로도 응원이 된다. 다시 열심히 해보자는 용기가 생긴다. 만나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위축되었던 마음이 눈 녹듯 풀린다.

_ P.41

 

 

 

 

띄엄띄엄하는 연습은 덧셈밖에 안되지만, 조금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는 연습은 곱셈이 된다는 말을 믿었다.

나는 법칙을 발견했다. 걸리는 시간과 성장은 정비례하지 않는다. 성장은 이차함수여서, 처음에는 느리지만 어느 지점을 넘으면 성장세가 증가하며 단숨에 뻗어나간다. 단조로운 직선 그래프가 아니라 곡선 그래프가 된다.

_ P.144

 

 

늘어질 대로 늘어진, 도대체 변곡점이라고는 없는 느슨한 나의 일상에 이 책은 확실한 악센트가 되어 주었다.

섬세한 문장들을 읽으며 조용하고 다정한 위로를 받다가 끝 날 줄 알았던 책은, 그보다 더 짙고 선명한 점을 찍어 주었다.

그 점을 향해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나의 걸음이 비록 빠르지 않더라도, 천천히 조금씩 어제와는 다른 내가 되어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책을 통해 전해준 당신의 삶이 내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책이었던 것 같다.

다른 시간에 이 책을 만났다면, 나의 감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필요한 책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나답지 않은 나를 꿈꿔본다.

 

 

 

 

좋거나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호불호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P.184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지는 책.

나다움을 깨트리고 싶어지는 책.

사람을 바라보는 섬세한 시선을 얻게 되는 책.

단조로운 일상에 조용하지만 선명한 파문을 일으켜 주는 책.

 

『일상의 악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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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미의 시방상담소 - 뭣 같은 세상, 대신 욕해드립니다
김수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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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떨지 마!

걔가 너보다 잘 살아

_ P.35

 

 

배우 김수미.

어쩐지 세 보이고 강해 보이는 그녀.

역할뿐 아니라 예능에서도 그녀는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우리의 속을 뚫어준다.

다들 눈치 보느라, 이미지 관리하느라 할 수 없거나 하지 못하는 말들을 그녀는 개의치 않고 뱉어낸다.

젊은 사람이 하면 불편할 수 있는 말들도 연륜이 쌓이고 나이가 많은 그녀가 하면 거부감보다 공감이 먼저 찾아들고는 한다.

요즘엔 '수미네 밥상'으로 새로운 국민 엄마 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 그녀.

그동안의 국민 엄마는 푸근하고 다정하고 다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만들어진 이미지였다면,

그녀는 할 말 다 하고, 등짝도 때려가면서, 욕을 애정표현처럼 들리게 뱉어내는 진짜 우리네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상한 드라마 속 엄마가 아니라 생활 속 살아있는 엄마 그대로인 것이다.

입으로는 타박하면서도 따뜻한 밥, 맛난 음식을 먹이려고 애쓰고, 강해 보이지만 한없이 여린 '여자'를 함께 가지고 있는 그녀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뜨끈히 데워주고는 한다.

 

그런 그녀가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시방 상담소>를 연재했다고 한다.

속 답답한 사연에 욕쟁이 할머니처럼 시원하게 정신 차리라고 욕해주고, 혼내주고, 다독여주고, 함께 걱정해 준 사연들이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녀 방식의 위로와 다독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깊고, 따뜻하다.

 

 

 

 

뚱뚱하다, 살 빼라, 운동해라, 아빠가 하는 모든 말이 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애정 표현인 거야. 근데 말을 왜 저렇게 하냐 따지면 한도 끝도 없어. 그럴 땐 아빠는 외국인이다, 지금 다른 나라 말로 사랑한다고 하는 거다, 하고 생각해. 아빠가 구박하면 너도 봉쥬르, 니하오, 알로하 하고 그걸로 스트레스받지 마.

_ P.43

 

 

현명하다,라는 말을 생각보다 많이 쓸 일이 없었다.

많이 알고 있다, 똑똑하다 싶은 사람들은 많지만, 현명한 사람을 찾기는 은근히 어렵다.

책을 읽다가 문득문득 김수미 선생님의 현명함에 눈앞이 환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알고 있다고 다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만, 깨닫지 못해서 놓치는 것들 또한 너무 많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 자신이 현명해지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오로지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 우리는 지혜로워질 수 없다.

그녀의 경험, 그녀의 삶, 그녀의 시간, 그녀의 생각들이 모두 쌓여 지금의 그녀가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위로는 유쾌하고 즐겁지만, 누구보다 현명하고 지혜롭다.

쉽게 뱉어 낸 것 같은 말들 마저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들, 짐작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우리는 해방시켜준다.

눈앞이 암흑이었던 것은 우리가 눈을 감고 있어서 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때로는 따끔한 충고로, 가끔은 걸진 욕으로, 그리고 대부분 애정이 듬뿍 담긴 다독임으로.

 

 

 

 

정말 속상하지만 우리의 육체가 어리고 순수할 때 가끔 짐승이 와서 들이받기도 해요. 모든 사람이 싸울 준비가 됐을 때 적을 만나는 건 아니야. 그냥 저건 뱀이야. 그래, 내가 뱀하고 상종할 수는 없지, 난 사람이야, 이렇게 한번 과감하게 털어 버리세요.

_ P.226

 

 

우리에겐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을 경험한 '어른'의 지혜가 필요하다.

잔소리 같지 않고, 꼰대 같지 않은, 투박한 듯 보이지만 다정하고 애정이 담긴 타박이 필요하다.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고,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웃음이 나는 투박한 엄마의 목소리.

그 울림이 이 책 속에는 있다.

 

끝없는 참견에 지치고, 꽉 막힌 꼰대스러운 생각의 강요에 귀를 막아버렸던 우리들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던가 보다.

그녀의 욕이 기분 나쁘지 않은 건 그 바탕에 깔린 두꺼운 애정이 너무 잘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는 일의 고단함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기에, 철없고 어린 청춘이라고 함부로 무시하지 않는다.

'난 이미 다 살아봤으니 니 고민 같은 건 우스워'라는 고압적인 자세가 없다.

그 자리에 애정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 살아가게 될 고단한 삶에 대한 애정.

 

답을 몰라 애쓰고 있는 우리들의 동동거림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혼구녕이 나면서도 '고생했다, 여기까지 애쓰며 오느라. 더 정신 차려야지!'하고 응원받은 것만 같다.

지금은 잘못된 선택지를 들고 있더라도, 뭐든 괜찮아질 것만 같은 긍정이 솟아난다.

혼나고 주눅 들기는커녕 반대로 힘이 나는 호통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우리는 종종 아주 간단한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그럴 때 곁에서 단호하지만 애정 어린 목소리로 조언을 건네주는 이가 있다면 인생이 좀 덜 지칠 것 같다.

인생이 맛있어지려면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소금 한 꼬집, 설탕 한 스푼, 깨소금 적당히가 꼭 필요하다.

 

그런 것들이 바로 내게는 책이다.

오늘의 조미료는 '김수미의 시방상담소'를 추천해 본다.

 

김수미만의 목소리와 김수미만의 말들로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고민 해결서.

깔깔깔 웃다가 나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 마음이 말랑해지는 위로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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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 - 삶이 흔들릴 때마다 꼭 한 번 듣고 싶었던 말
박애희 지음 / 수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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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금씩 어긋난 인생이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내게 생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못다 한 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는 삶이 고인이 바라던 삶이었을까. 인생의 유한함을 온몸으로 알려준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깊은 슬픔들은 바닥까지 내려간 존재에게 말한다.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 것들을 잊지 말라'고.

___ P.86

 

 

 

부모님을 떠나보낸 자식들의 마음은 늘 후회와 자책으로 얼룩져 있다.

철없던 시절의 행동들에 대한 후회, 자신의 생을 앓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부모님을 향한 미안함, 좀 더 다정하고 살갑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책.

부모를 잃은 자식들의 마음은 늘 그런 미안함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잃지 않고도 소중함을 알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성숙하지 못했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남아 있는지 헤아릴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었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언제든지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에만 얽매이기엔 우리는 너무 서투르고 실수투성이인 초보 인생일 뿐이다.

허우적거리며, 동동 거리며, 생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기에도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벅찼다.

결국,

지나버리고, 놓쳐버리고, 잃고 나서야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얼마나 소중한 것들을 우리가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나 또한 부모님을 보내고 참 많은 시간 앓았다.

어쩌면 지금도 아직 앓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좋았던 기억보다 못 해줬던 기억들, 눈치채지 못했던 외로움들이 더 마음을 찌르는 걸 보면 아직 그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시간이 나의 상실을 희석시켜 주기를 그저 묵묵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에 이 책을 만났다.

나와 똑같이 부모를 보내고 헛헛한 가슴을 끌어안고 살기 위해 애쓰는 누군가의 생을 마주쳤다.

순간, 슬픔과 슬픔이 만나, 공허와 공허가 만나 내 안에 매달려 있던 슬픔의 풍경이 짜랑~하고 소리를 냈다.

맑고 처연한 풍경 소리가 한없이 가슴속에서 퍼져나갔다.

고요히 고인 채 희석되지 못한 슬픔들이 그렇게 흔들리며 울리고 있었다.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내 삶이 부끄러워졌다.

아직도 슬픔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안타까웠다.

 

내게 사랑을 남기고 간 사람들.

내게 오직 사랑만을 남기고 간 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왜 여태 자책만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저 사랑만을 주고 갔는데,

내가 나를 탓하고, 내가 나를 미워하고, 내가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 슬픔에 잠겨 있었던가 보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었다.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품은 존재로, 받은 사랑이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아빠가, 엄마가 내게 준 사랑만을 기억하면서, 사랑받은 존재로 빛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이별 앞에 한없이 무너져 울고만 있었던가 보다.

늘 깨달음은 한 박자 늦게 찾아온다.

 

이제 그만 나를 미워해야겠다고, 이제 그만 나와 화해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슬픔이 아니라 사랑으로, 미안함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그들을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책 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음악을 듣다가 문득, 그렇게 문득문득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에 저자가 떠올린 생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큰 슬픔을 통과한 사람은 그 만의 터널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을 터덜터덜 걸어본 사람만이 가진 냄새가 있다.

그것은 슬픔의 냄새이기도 하고, 공허의 냄새이기도 하고, 눈물의 냄새이기도 하다.

작가의 글에서는 그런 터널의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기어코 그 터널 끝에서 마주친 햇볕의 따사로운 향기가 함께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터널의 끝에 빛이 있다고, 따뜻한 온기가 있다고 일러주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된다.

 

 

 

 

『후회와 자책의 시간을 애도하고

다정과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법』

 

누구에게나 후회와 자책을 남기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살면서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들에게 후회와 자책은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인 지도 모른다.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허비해버린 시간들이 너무도 많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제대로 헤어 나오지 못해서 내내 무거운 후회를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느라 한걸음 한 걸음이 너무도 힘이 든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애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후회와 자책의 시간을 제대로 애도하고 껴안아야 희망으로 건너 갈 수 있다고.

 

이 책은 어쩌면 그 '애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책과 후회를 조용히 어루만져 주는 다정한 애도의 시간.

 

'그래, 이제 인생이 이렇다는 걸 충분히 알았을 테지.

앞으로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살 테냐.'

 

이별과 상실로 무너진 우리에게 사실 생은 묻고 있었던가 보다.

이렇게 느닷없고 당혹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고.

뼈아프게 고통스럽고, 한없이 후회스럽고, 끝없이 추락해보니 이제 정신이 드느냐고.

느닷없이 후려갈기는 뺨따귀에 정신을 못 차리고 아파하고만 있던 내게, 사실 삶은 이렇게 묻고 있었던 거다.

이제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차례인가 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 것인지.

 

삶이 내게 예상치 못한 변화구를 던지다 해도, 흠씬 두들겨 맞아 녹다운이 되어도, 나는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삶은 나를 벌하는 것이 아닌, 내게 끝없이 질문하는 것이므로.

정답을 알 수 없는 이 삶에 어떤 것을 나의 답으로 적어 낼 것인가를 나 또한 열심히, 치열하게 생각해보아야겠다.

꿋꿋이 오늘 하루를 버텨내면서.

 

 

 

 

내가 나로 사는 일은 늘 어렵다.

당신은 당신으로 온전히 살아가고 있습니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확고한 믿음으로 '네'라는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고, 누군가의 엄마다.

세상에 나 혼자 홀연히, 어떤 계기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존재가 아니기에 '오직 나'로만 사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어떤 날, 어느 하루는 온전히 나로만 살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

누군가의 무엇이 아니라 나의 나로, 오롯하게.

 

당신의 무엇이라서 나는 행복했다.

당신의 무엇이라서 나는 감사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저 나로 존재하고 싶어지는 시간이 있다.

아마 당신도 그러하겠지.

 

 

 

 

 

우리도 모두, 때때로 서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해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서 삶이 서럽고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있었으니까.

삶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공부는 이게 아닐까 싶다.

나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___ P.286

 

 

 

감사하다.

아직 내게 사랑할 사람들이 남아있어서.

너무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도, 여전히 내게 너무도 사랑하는 누군가가 남아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놀라운 기적이다.

우리의 마음은 초 단위로 변하며 다양한 감정들을 뿜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저자가 말하는 제대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당신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내가 주고 있는 사랑이 당신이 받고 싶어 하는 사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혹시 내 방식대로, 내 사랑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믿는 사랑의 방식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아낀다고 말하면서, 나는 과연 당신이 원하는 사랑을 제대로 주고 있는가.

 

그저 사랑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어떻게'를 사랑에 붙여 본 적이 없었다.

 

오랜 시간 한 사람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왔지만,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들이 원하는 사랑의 방식을 제대로 돌려주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그들이 외롭고 쓸쓸하지 않도록, 잘못된 사랑 방식으로 서럽고 고통스럽지 않도록,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열심히 고민하며 살아가야겠다.

익숙해지고, 당연해지고, 무심해져서 사랑의 '본심'을 잃지 않도록.

늘 내 사랑의 올바름을 의심하면서.

 

 

 

 

『몸의 일기』를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하나의 삶을 마치면 한편의 이야기가 남는다는 것. 그렇게 인간은 부재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더 잘 살고 싶어졌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또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남기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___P. 327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남기는 존재가 될까.

내 삶이 끝나도 그들의 삶 속에 여전히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더 잘 살아야겠다.

 

내게 이 책은 조금 더 나를 사랑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 같다.

내가 내 삶을 좀 더 '잘' 살아야 하는 이유.

내가 내 삶을 좀 더 '사랑'해야 하는 이유.

잊고 있었던 이유들을 다시 눈앞에 데리고 와 잊지 말라고 말해 준다.

생활에 지쳐서, 슬픔에 잠식당해서, 잊고 있었던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고

내 마음대로 이뤄지는 일보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더 많은 삶이지만

그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생을 끝없이 사랑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되뇌어 본다.

 

오늘 밤은 누구보다 다정히 나를 껴안아 주고 싶다.

눈물로 얼룩진 내 생을 껴안고 토닥 토닥 다독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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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온도 -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이덕무 지음, 한정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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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모더니스트 이덕무를 발견하다!

18세기 한국의 문예부흥을 이끈 위대한 문장가

 

'책만 보는 바보'로 익히 알려진,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 이덕무의를 읽다.

그가 쓴 한시들을 모아 엮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해석한 한정주의 글들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이전에 출간된 '문장의 온도'에서는 에세이스트로서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었다면, 이 책 '시의 온도'에서는 한시를 짓고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이덕무의 진솔하고 청아한 매력을 마음껏 느껴 볼 수 있다.

특히나 엮자가 일러주는 시를 짓고, 읽고, 느끼는 다양한 방법과 시선들이 몹시 인상적이다.

좋은 시만큼이나 그 시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시를 마음으로 품는 일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처럼 식견이 부족하고 한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부족한 사람도 얼마든지 한시를 읽고 느낄 수 있도록 역자는 쉽고도 다정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보통 '시'를 읽을 때 누군가의 해석과 설명을 멀리하는 편이다.

그것은 나만의 느낌과 감상을 사라지게 하고, 배운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이해는 못 하더라도 내 마음이 가닿아 공명하는 시를 만나 마음에 품는 일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시'는 내게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분야이지 싶다.

한시의 제대로 된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일단 한문을 제대로 알고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슬프게도 나는 한문과 가장 먼 세대다.

되려 우리 아이들은 다시 한문을 배우고 있는데, 애매하게 낀 세대였던 나는 한문보다 컴퓨터를 배웠던 세대였다.

덕분에 한문은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정말 손이 가지 않는 학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내가 한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맨몸으로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는 일 만큼이나 어렵기만 하다.

 

그런 내게 여유롭게 태평양은 건널 수 있도록 든든한 배가 되어준 이는 역자인 한정주님이시다.

이덕무를 몹시도 흠모하는 마음을 가득가득 드러내는 그의 글은 그래서 더 다정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가르치려는 목적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덕분에 한시에 대한 나의 경직된 마음이 스르르 녹고 말았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 끝끝내 얼어붙어 있을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래서 어쩐지 봄 같다.

누구의 마음이라도 사르르 녹게 만들 것만 같은 따뜻하고 다정한 봄의 기운이 전해진다.

이덕무를 봄과 가을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덕무 본인은 가을을 좀 더 사랑했던 것 같지만, 이 글은 봄을 더 진하게 품고 있다.

쓸쓸함보다는 다정함이 더 듬뿍 담긴 책이다.

 

 

 

 

 

이덕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간단히 그를 소개하자면,

조선의 산천과 강호의 실경을 그대로 표현한 '진경시대'의 대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덕무이다.

진경시대라고 불리는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의 양대 축은 진경산수화와 진경 시문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겸재 정선 선생이 있고, 진경 시문의 대가는 사천 이병연으로 시작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친우들과 어울려 세상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글을 짓고, 솔직하고 꾸밈없는 글을 쓰려 노력했던 가난하지만 청렴한 선비 이덕무가 있었다.

그의 시에는 18세기 조선의 가장 조선스러운 모습과 함께 그의 문학적 색깔 또한 듬뿍 담겨있다.

 

 

 

혁신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상상하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개척하고, 생산하고, 창조한다는 뜻이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불온성'이다. 불온해야 낯익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으며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온해야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본질이고, 이 때문에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하다고 선언한 김수영을 사랑한다.

불온함'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글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요, 사람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다.

P 107~108

 

 

 

 

표현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는 최전선의 작업이다. 어떻게? 천 마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한 마디의 시어詩語 혹은 한 구절의 시구詩句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압축은 동시에 생략이다. 천 마디 말을 한 마디 말로 압축하는 것은 나머지 구백구십구 마디 말을 생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압축과 생략의 묘미, 시를 읽는 재미가 거기에 있다.

P. 26~27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한시를 짓는 선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멋지고 대단하게 여겨지고는 했다.

주어진 글자에 맞추어 운율과 리듬을 갖추어 자신의 뜻과 의지, 마음을 담아 일필휘지로 써내리는 모습은 누구라도 매료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선비를 가장 선비답게 빛나게 해주는 모습이 바로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조선시대의 청렴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덕무의 시가 그러했고, 그의 시를 엮는 한정주 역자의 글 또한 그러했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그림처럼 썼다는 이덕무의 글과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다.

가난했던 그의 곤궁한 생활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하고, 산골의 매미소리며 가을 향취가 코와 귀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친우들과 어울려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 꽃놀이를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의 모습들도 찬찬히 그려졌다.

또한 속세의 출세와 부와 권력을 멀리하고 그저 매화를 사랑하며 밤새 글을 짓는 선비의 절개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를 꼭 닮았다.

꾸밈없는 솔직함과 소탈함, 숨길 수 없는 기개와 청아함.

 

그래서 그의 글을, 시를 읽으면 나 또한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속에 담긴 어지러움들이 찬찬히 가라앉고 다시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한시 매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독서할 때 얽매이게 되면 책의 노예가 될 뿐이요, 글을 쓸 때 얽매이게 되면 글의 노예가 될 뿐이요, 시를 지을 때 얽매이게 되면 시의 노예가 될 뿐이요, 학문을 할 때 얽매이게 되면 학문의 노예가 될 뿐이다.

…중략…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얽매이는 곳 없이 마음대로 떠다니는 맑은 구름처럼 자유롭고 활달해야 한다. 이래야지만 공자의 책을 읽어도 공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사마천의 글을 배워도 사마천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두보의 시를 익혀도 두보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주자의 학문을 배워도 주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공자에게서 벗어나고, 사마천에게서 벗어나고, 두보에게서 벗어나고, 주자에게서 벗어나는 그 지점에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다.

득오得悟, 진실로 깨달아 얻는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P.217~218

 

 

 

 

이 책은 이덕무를 모르는 사람도, 이미 이덕무를 알고 있는 사람도, 누구라도 읽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특히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직접 시를 쓰는 사람에게 어쩌면 더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시뿐 아니라 자신만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권하고 싶어진다.

글 쓴다는 일, 그 기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솔직하고, 틀에 매이지 않은 채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움을 추구할 줄 아는 진정한 글쟁이의 면모를 이 책을 통해 배울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은은히 풍겨 나오는 곧고 맑은 선비 정신 덕분에 마음의 평온을 찾기에도 맞춤인 책이다.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책, 「문장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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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인생의 문장들
전승환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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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내 마음을 알아주는 한 문장이다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게 되는 시작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나는 '한 문장'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한 단락이거나 한 페이지 일 때도 있다.

어쨌든 내가 책을 선택하고 읽게 되는 시작점엔 어떤 문장들이 있다.

마음을 흔들고, 쿵- 내려앉게 만드는 문장의 힘.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더 굳건히 믿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 싶어졌던 이유도 인터넷을 떠돌던 책 속 문장들 때문이었다.

사랑에 관한 문장들에 홀려 그 어려운 책을 덥석 선택했고, 끙끙거리며 읽었다.

섹스를 한다는 것과 함께 잠을 잔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 말하던 발췌문에 홀려서 읽게 된 책은 또 다른 의미로 내게 남겨졌다.

완벽하게 해석하지 못한 나의 무지로 인해 다시 읽어야겠다고 늘 생각하는 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쩌면 여러 번 다시 읽고, 매번 다시 생각하고, 다시 고민하고, 사유하라고 책이 그렇게 모호하게 감춘 부분을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깊은 우물을 감추고 있는 책.

 

최근에 한 문장에 꽂혀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한 책은 『작은 마음 동호회』다.

페미니즘 책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페미니즘 책을 골라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버렸었다.

이 책도 그런 소개 글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볍게 넘겨버렸던 책이었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굿즈로 받게 된 독서대의 글귀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약속해,

어떤 가정법도 사용하지 않기로.

그때 무언가를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들로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로 해

<작은 마음 동호회> _ 윤이형

 

 

나는 이 책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지만 저런 문장을 담고 있는 책이라면 기어코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어떤 상황에 저 문장들이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너무도 필요한 위로였다.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이 나를 가장 아프게 찌르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문장이라는 게,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한 권의 책보다, 때로는 한 줄의 문장이 훨씬 더 힘이 세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숨 쉬게 해주는 건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절실한 문장이 아닐까.

 

그래서 전승환 님의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는 내게 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문장들을, 그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내게 위로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주었던 문장들이 그의 글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무사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P.14 _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문장

 

 

하필이면 책은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속의 한 문장.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저 단 한 줄의 문장 때문에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구입한 사람 중 하나다.

워낙 유명한 책이기도 했지만, 나를 흔들고 움직이게 만든 것은 한 줄의 문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책 또한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첫 줄을 읽고 벌써 좋았다.

같은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같은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라니.

묘한 동질감이 기대감으로 옮겨갔다.

 

놀랍게도 저자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다.

이 책 한 권으로 저자의 독서 취향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책들 중에 굉장히 많은 책들이 내가 이미 읽었거나 매우 좋아하는 책이었다.

보통 책을 매개로 하는 인문 에세이들은 고전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어려운 철학 책이나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벽돌 책에서 인용구를 가져오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이 책 속에는 마음을 흔드는 문장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인문서와 철학 책 속 문장들 또한 책 속에 등장하지만, 아무래도 감성을 자극하는 문장들은 문학작품 속에 더 많이 담겨있게 마련이라 그러한가 보다.

에세이나 시집, 소설에서 발췌된 글들이 많기 때문에 그 문장을 담고 있는 책을 찾아 읽으려고 할 때도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이 책을 통해 다른 책으로 건너가고 싶은 독자에게는 아주 좋은 브릿지가 되어 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이 좋은 문장들을 소개하기만 하는 책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어떤 마음들에 필요한 위로들.

지친 마음을 쉬고, 다시 힘을 내어 내일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다독이고 응원하는 저자의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인생이 문장들>이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는 저자의 목소리를 찾아 들어보고 싶어졌다.

책에는 담기지 않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그곳에 있을지 궁금해졌으니까.

 

워낙 책을 좋아해서 독서 에세이들도 종종 찾아 읽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배우는 경험을 했을 뿐이다.

모르는 책, 안 읽은 책들이 세상엔 너무도 많고, 나는 몹시도 게으른 독자였으니까.

이 책은 내게 배움보다는 공감의 경험을 건네주었다.

선생님 같은 책이 아니라 친구 같은 책이라고나 할까.

 

지친 날, 한 줄의 문장에도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쏟아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책이다.

 

혹은 지금, 그런 위로가 간절한 누군가에게 이 책이 가닿는다면

문장이 주는 조용하고 깊은 위로에 다친 마음이 조금은 낫게 되지 않을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다시 한번 살아가야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고통, 쾌락,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P.188 _ 니체의 『즐거운 학문』 발췌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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