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온도 - 얼어붙은 일상을 깨우는 매혹적인 일침
이덕무 지음, 한정주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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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모더니스트 이덕무를 발견하다!

18세기 한국의 문예부흥을 이끈 위대한 문장가

 

'책만 보는 바보'로 익히 알려진, 조선 최고의 에세이스트 이덕무의를 읽다.

그가 쓴 한시들을 모아 엮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해석한 한정주의 글들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이전에 출간된 '문장의 온도'에서는 에세이스트로서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었다면, 이 책 '시의 온도'에서는 한시를 짓고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이덕무의 진솔하고 청아한 매력을 마음껏 느껴 볼 수 있다.

특히나 엮자가 일러주는 시를 짓고, 읽고, 느끼는 다양한 방법과 시선들이 몹시 인상적이다.

좋은 시만큼이나 그 시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시를 마음으로 품는 일은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처럼 식견이 부족하고 한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부족한 사람도 얼마든지 한시를 읽고 느낄 수 있도록 역자는 쉽고도 다정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보통 '시'를 읽을 때 누군가의 해석과 설명을 멀리하는 편이다.

그것은 나만의 느낌과 감상을 사라지게 하고, 배운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이해는 못 하더라도 내 마음이 가닿아 공명하는 시를 만나 마음에 품는 일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시'는 내게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분야이지 싶다.

한시의 제대로 된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일단 한문을 제대로 알고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슬프게도 나는 한문과 가장 먼 세대다.

되려 우리 아이들은 다시 한문을 배우고 있는데, 애매하게 낀 세대였던 나는 한문보다 컴퓨터를 배웠던 세대였다.

덕분에 한문은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면서도 정말 손이 가지 않는 학문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내가 한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맨몸으로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는 일 만큼이나 어렵기만 하다.

 

그런 내게 여유롭게 태평양은 건널 수 있도록 든든한 배가 되어준 이는 역자인 한정주님이시다.

이덕무를 몹시도 흠모하는 마음을 가득가득 드러내는 그의 글은 그래서 더 다정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가르치려는 목적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처럼 다정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덕분에 한시에 대한 나의 경직된 마음이 스르르 녹고 말았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 끝끝내 얼어붙어 있을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래서 어쩐지 봄 같다.

누구의 마음이라도 사르르 녹게 만들 것만 같은 따뜻하고 다정한 봄의 기운이 전해진다.

이덕무를 봄과 가을을 함께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덕무 본인은 가을을 좀 더 사랑했던 것 같지만, 이 글은 봄을 더 진하게 품고 있다.

쓸쓸함보다는 다정함이 더 듬뿍 담긴 책이다.

 

 

 

 

 

이덕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간단히 그를 소개하자면,

조선의 산천과 강호의 실경을 그대로 표현한 '진경시대'의 대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덕무이다.

진경시대라고 불리는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 예술의 양대 축은 진경산수화와 진경 시문이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겸재 정선 선생이 있고, 진경 시문의 대가는 사천 이병연으로 시작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 '백탑파' 시인들이 있었다.

 

그 속에서 친우들과 어울려 세상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글을 짓고, 솔직하고 꾸밈없는 글을 쓰려 노력했던 가난하지만 청렴한 선비 이덕무가 있었다.

그의 시에는 18세기 조선의 가장 조선스러운 모습과 함께 그의 문학적 색깔 또한 듬뿍 담겨있다.

 

 

 

혁신은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상상하고, 실험하고, 도전하고, 모험하고, 개척하고, 생산하고, 창조한다는 뜻이다. 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은 '불온성'이다. 불온해야 낯익고 익숙한 것을 거부하고 부정할 수 있으며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불온해야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의 본질이고, 이 때문에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불온하다고 선언한 김수영을 사랑한다.

불온함'이야말로 '살아 있음'의 증거다. 글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글은 죽은 글이요, 사람이 불온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이다.

P 107~108

 

 

 

 

표현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는 최전선의 작업이다. 어떻게? 천 마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한 마디의 시어詩語 혹은 한 구절의 시구詩句로 압축하여 표현한다. 압축은 동시에 생략이다. 천 마디 말을 한 마디 말로 압축하는 것은 나머지 구백구십구 마디 말을 생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압축과 생략의 묘미, 시를 읽는 재미가 거기에 있다.

P. 26~27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한시를 짓는 선비의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멋지고 대단하게 여겨지고는 했다.

주어진 글자에 맞추어 운율과 리듬을 갖추어 자신의 뜻과 의지, 마음을 담아 일필휘지로 써내리는 모습은 누구라도 매료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선비를 가장 선비답게 빛나게 해주는 모습이 바로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조선시대의 청렴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덕무의 시가 그러했고, 그의 시를 엮는 한정주 역자의 글 또한 그러했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그림처럼 썼다는 이덕무의 글과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된다.

가난했던 그의 곤궁한 생활 모습이 눈에 그려지기도 하고, 산골의 매미소리며 가을 향취가 코와 귀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친우들과 어울려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 꽃놀이를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의 모습들도 찬찬히 그려졌다.

또한 속세의 출세와 부와 권력을 멀리하고 그저 매화를 사랑하며 밤새 글을 짓는 선비의 절개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시는 그를 꼭 닮았다.

꾸밈없는 솔직함과 소탈함, 숨길 수 없는 기개와 청아함.

 

그래서 그의 글을, 시를 읽으면 나 또한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속에 담긴 어지러움들이 찬찬히 가라앉고 다시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한시 매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독서할 때 얽매이게 되면 책의 노예가 될 뿐이요, 글을 쓸 때 얽매이게 되면 글의 노예가 될 뿐이요, 시를 지을 때 얽매이게 되면 시의 노예가 될 뿐이요, 학문을 할 때 얽매이게 되면 학문의 노예가 될 뿐이다.

…중략…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얽매이는 곳 없이 마음대로 떠다니는 맑은 구름처럼 자유롭고 활달해야 한다. 이래야지만 공자의 책을 읽어도 공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사마천의 글을 배워도 사마천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두보의 시를 익혀도 두보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주자의 학문을 배워도 주자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공자에게서 벗어나고, 사마천에게서 벗어나고, 두보에게서 벗어나고, 주자에게서 벗어나는 그 지점에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다.

득오得悟, 진실로 깨달아 얻는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아야 한다.

P.217~218

 

 

 

 

이 책은 이덕무를 모르는 사람도, 이미 이덕무를 알고 있는 사람도, 누구라도 읽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특히나 시를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직접 시를 쓰는 사람에게 어쩌면 더 좋은 책이 아닐까 싶다.

시뿐 아니라 자신만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을 필독서로 권하고 싶어진다.

글 쓴다는 일, 그 기본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솔직하고, 틀에 매이지 않은 채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움을 추구할 줄 아는 진정한 글쟁이의 면모를 이 책을 통해 배울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은은히 풍겨 나오는 곧고 맑은 선비 정신 덕분에 마음의 평온을 찾기에도 맞춤인 책이다.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책, 「문장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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