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쳤다. 해가 들지 않은 채 여전히 꾸무럭거리는 날씨. 내가 가장 견디기 버거워 하는 날씨 중의 하나. 이런 날은 한껏 웅크린 채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쓰고 띄엄띄엄 생각에 잠기다가 스르르 낮잠에 들고 싶다.

어젯밤은 악몽에 시달렸다. 뜬금없이 고향 친구와 함께 마라톤 대회에 나가게 된 나. 열심히 달려서 도착 지점까지 왔을 때 스탬프를 찍어주던 스포츠 머리의 한 남자. 50대 초반으로 보이던 아버지 또래의 남자. 그는 나보고 여기까지 오면서 산도 넘고 어디어딘가를 거쳤냐고 했다. 그래서 아니라고, 그런 건 없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럼 다 뛴 것이 아니라며 스탬프 찍어주길 꺼리는 것이었다. 마라톤 대회엔 왜 나갔으며, 팔목에 스탬프 찍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스탬프를 찍어달라고 화도 냈다가, 앙탈도 부렸다가 하면서 기어이 팔목에 스탬프를 찍었다. 그 남자는 대신 나에게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마, 하고 참 쉽게도 승낙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대회를 마치고 친구와 함께 터미널에 와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 나에게 온 문자 한 통. 당신을 사랑합니다. 쿵. 깜딱 놀란 나, 친구에게 말하길. 이 아저씨 미쳤나봐. 나보고 사랑한댜. 그러면서 나는 오늘은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의 이름을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옆에서 우리를 관찰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 그 남자 내가 잘 아는 사람 남편인데 순 바람둥이야. 속지 마. 쿵. 정말이지 개 풀 뜯어먹는 소리만도 못한 허황된 꿈이었다.

꿈땜을 하려는지 새벽부터 전화벨이 온 집안을 울리더니 전화를 받는 엄마의 긴장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난 평소보다 한 시간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입맛이 없어 누룽지를 끓여달래서 먹고 있는데 오래전부터 묵혀두었지 싶은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잔소리라면 잔소리랄수도 있지만 사실은 내가 꽁꽁 묵혀두고 싶었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제언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겹다, 는 말이 계속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할 정도로 또 다시 지겨운 반복이었다. 새벽에 받은 전화 내용에 신경 쓰기만도 벅찰텐데 왜 하필이면 나에 관한 일까지 하나 더 보태고 있을까. 그러면 피곤하지 않아? 엄마는 신경 쓰며 사는 게 단련이 되어서 괜찮아. 쿵. 엄마가 그러는 것이 싫어서, 엄마가 그러는 것이 안됐어서, 안된 걸 알지만 계속 신경 쓰이게 하는 나 자신이 짜증나서 가슴이 화끈거리며 울고 싶었다. 영화에서 보면 머리로 벽을 탕탕 치는, 아니면 벽으로 머리를 탕탕 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가.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욕심스런 아이들은 내어준 과제물을 제대로 정리해 놓지도 않고, 수행평가 범위를 전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로 시험을 보고는 점수를 덜 준다고 뾰루퉁이다. 평가 시즌만 되면 하여간 옥신각신 설득하고, 다투고, 타이르고 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다. 열심히 하면 점수는 잘 주게 되어 있고 열심히 안하면 잘 줄 수가 없다. 이렇듯 간단한 룰인데도 몇몇 아이들의 머릿 속에 박힌 룰은 오직 한 가지. 열심히 안해도 점수는 잘 받아야 돼. 쿵. 내가 언제 그렇게 가르쳤단 말이냐.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듀스의 의식혼란. 내 뜻대로 되가는 건 하나도 없어. zoom zoom zoom 나를 구해줘. boom boom boom 가슴이 터질 것 같아. 듀스의 이현도는 요즘 뭐하며 사나.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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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하던데....
깐따삐야님 요즘 조급하게 사시는 걸지도....^^

건우와 연우 2006-06-22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인도 의식을 못하는채 힘든일이 있으신건 아닌지...
힘내세요^^. 그리고 안녕하세요^^ 꾸벅..

깐따삐야 2006-06-2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나저나 이 더위에 왠 마라톤이란 말이며 왠 오십대 아저씨란 말입니까. 이해불가에요. 덥다, 더워~

건우와 연우님,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 모든 걸 더위와 꾸물꾸물한 날씨 탓으로 돌리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는 않고 뭔가가 얹힌 것처럼 답답하네요.

마태우스 2006-06-2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굉장히 리얼하게 꾸시는군요. 미녀는 꿈에서도 괴롭다니깐요.

깐따삐야 2006-06-2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는 꿈을 종종 총천연색으로 꿀 뿐더러 이따금씩 가위에 눌리기도 해요. 엎어놓은 사진 속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 사진을 들었더니 사진 속 낯선 여자가 스르르 빠져 나와서 내 목을 조른다든지 하는. 하지만 갠적으로 오십대 유부남의 사랑고백이 그보다 스무배 쯤은 더 공포스럽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