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Dreamer'를 보고 난 후 K와 함께.



- 쭈꾸미 샤브샤브를 먹고 난 후 식당 근처에서 E, S와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함께 나온 20년지기 고향 친구들이다. 17 삐리리를 만드는 유업 회사에 다니는 친구 K, 목사님 딸내미로 교회 일을 보면서 피아노 학원을 하는 E, 학교 급식 영양사인 S. 제각기 서로 다른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내던 중에 이번 주말 K가 사는 도시에서 뭉쳤다. 손바닥만한 시골 동네에서 낮과 밤을 거의 함께 하다시피 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던 친구들. 서로 가장 어설펐을 때를 함께 보고 겪고 느껴온 친구들이라 그런지 언제 만나도 부담 제로. 참 즐겁고도 편안한 시간이었다.

K는 체격 조건이 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짝궁을 했었다. K는 하여간에 성격이 무지하게 좋아서 남자 아이들은 누나처럼 따르고 여자 아이들은 언니처럼 따랐던 친구다. 반면에 K가 기억하는 나는 상당히 예민하고 까칠하고 도도했단다. 그 성격 다 어디갔는지 지금은 척 보기에도 부드럽고 털털해진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 옛날 그 성격 그대로 가지고 살았으면 너 스스로도 겁나 피곤했을 거라고. OTL.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이 뭘 시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시키는대로 하는데 나는 혼자 불만에 싸여서 씩씩거리고 반항하고 했던 모습이 기억 난단다. "그래서 그 업보를 고스란히 받고 있잖냐." "응, 그려도 싸. 헤헤." K는 그다지 깨끗하지 못했던 나의 성격을 묵묵히 참아주고 이해해주던 고마운 친구다. 다시 돌아봐도, 뭐든지 왠만하면 양보를 했고 뭐든지 왠만하면 그냥 참고 넘어갔다. 사사건건 짜증투성이였던 나와는 아주 대조적인 그런 넉넉한 사람이었다. 현재는 공익근무요원인 덩치 좋고 잘생긴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어릴 때는 쬐그만했던 게 몰라보게 자라서 K의 오빠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다. 아, K를 보며 나도 갑자기 남동생이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 복스러운 덩치에서 간지러운 애교가 퐁당퐁당 떨어지는 앙증맞은 남동생. 흐흐.

E는 교회 목사님의 딸내미란 경건한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늘 장이 좋지 않아서 냄새를 풍기고 다니던 엽기발랄한 아이였다. 때가 되면 그녀는 일단 신호를 보낸다. 엄지 손가락을 세우는 것. 누군가 엄지 손가락을 꾹 눌러 접어주면 그 때서 스컹크마냥 폴폴 냄새를 피우고는 저 길고 냉정한 얼굴로 크크크... 웃곤 했다. 그런 그녀가 주일만 되면 참하디 참한 표정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곤 했다니. 두근두근 뛰는 가슴 붙들고 컨닝을 하고는 진짜 우등상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는 그녀. 우리는 E를 볼 때마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실감하곤 한다. E는 항상 다른 사람 앞에 설 때마다 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사명을 느낀다고 한다. 아무래도 어딘가 코메디언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실제로 그녀는 참 재미있다. 수선스럽고 호들갑스런 재미가 아니라 아주 잔잔한 가운데 이따금씩 폭발적으로 용솟음치는 그런 유머감각. 차분한 목소리로 "니들 보험은 다 들어놨지?"라고 묻고나서 보여주는 그녀의 운전솜씨는 또 어찌나 위험천만하고 스릴 넘치던지. 양파처럼 알면 알수록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는 친구다.

S는 서로 집이 가까워서 거의 항상 등하교를 같이 하던 친구였다. 아직도 생각나는 추억 하나는, 하교 길에 다람쥐가 모아놓은 밤을 훔쳐 먹었던 것. 우리 눈앞으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루루 사라졌고 S는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인다는 듯 다람쥐 뒤꽁무니를 따라서 숲속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에 밤을 한 움큼 가지고 나타났다. 다들 농사가 기반인 시골에서 자랐지만 S만큼 순수토종 시골 아이, 시골의 삶에 대해서 빠삭한 아이도 드물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늘 먹거리에 관심이 많긴 했다. 방학이 되면 찐 옥수수나 집에서 빚은 김치만두를 가지고 우리집에 놀러왔고 학교에서 가사실습을 할 때도 늘 앞장 서서 칼질을 하고 간을 맞추며 즐거워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별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일관성 있게 '푼수'였다. 먹거리와 관련된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심하다보니 4차원의 정신세계를 지닌 것처럼 보였고 목소리와 말투 또한 매우 독특해서 어린 것이 술 취했냐는 소리를 간간히 들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아주 멋쟁이가 되었고, 네가 세상에서 젤루 예쁘다고 말해주는 성실한 남자친구한테 땍땍거리며 튕기기를 밥먹듯이 하는 도도한 처자로 거듭났다. K의 말을 빌리자면 왕푼수가 어찌어찌 용됐다나. 어찌 되었든 S는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매우 각별하게 생각하는 친구이다. 고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이 그 친구의 것이니까.

세월이 우리를 조금씩 변하게는 했지만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진 않은 것 같다. 언제 봐도 반갑고 다시 봐도 즐거운 친구들. 사회에 나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마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런 부담도, 경계도 없이 나를 활짝 열어보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에 이렇듯 오래 묵은 된장처럼 구수하고 믿음직한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녀들의 일과 사랑과 삶이 모두 술술 풀리기를, 언제나 옛날 그 시절의 순수한 웃음을 잃지 않기를, 마음 속 깊이 바란다. 다음엔 내가 사는 동네에서 뭉치기로 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왜케 재밌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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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4-23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쿤요. 전 세월이 친구지간을 갈라놓고, 그 세월과 맞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요^^ 근데 다람쥐가 밤을 빼앗긴 건 정말 마음이 아픈데요^^

BRINY 2006-04-23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람쥐가 한겨울 먹을 양식을 다 먹어버리신 건 아니겠죠-..-

미미달 2006-04-2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든든하고 행복한 건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 ^^

깐따삐야 2006-04-24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세월과 맞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절로 유지되는 관계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허물 없는 소꿉친구라고 해도 말이에요.
그리고 네... 전 지금도 다람쥐나 청솔모를 보면 숙연해지곤 합니다.;;

BRINY님, 저를 때려 주세요. ㅜ.ㅜ

미미달님, 처음 뵙는 거지요? 반갑습니다. ^^ 예전엔 오히려 잘 몰랐는데 요즘은 어린 시절 친구들이 참 고맙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